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69화 (69/126)

캐슬(1)

식사의 마무리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앞에 놓은 채.

“제가 원래도 영미 문학을 좋아하긴 하는데, 이 작가는 처음 보는 작가였거든요.”

김하연 작가와 권상준, 권유진 부자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정 팀장님이 직접 책임편집한 책이라고 주셔서 큰 기대 없이 읽어봤는데··· 오는 내내 이 책만 내리 읽은 거 있죠?”

“취향에 맞으셨나 보군요.”

권상준의 말에 김하연 작가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런 수준이 아니었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그대로 책에 집어삼켜지는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

“다 읽고 나서도 잔상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기내에서 잠도 못 잘 정도였거든요.”

김하연의 열정적인 말에, 권상준은 은근슬쩍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당황하거나 민망해하거나, 혹은 지나칠 정도로 흥분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무슨 얘기든 해보라는 듯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아들이지만, 참 통이 크다니까.’

상준이 저도 모르게 또다시 팔불출스러운 생각을 하던 그때, 아들의 입이 열렸다.

“작가님이 호러소설도 좋아하실 줄은 몰랐는데.”

“글쎄, 이게 호러가 맞나요? 분명 장르는 호러인데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아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장르를 두고 잠시 토론하던 두 사람은 이내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작가님 보시기엔 이 책의 장르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말이시죠.”

“네. 근데 ‘호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싶기는 해요. 이 책은··· 내면의 깊은 심리를 건드리는, 보다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거든요.”

곧바로 말을 잇는 김하연.

“사람들이 이 소설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도 좀 알 것 같고요.”

“···열광이요?”

“아, 네. 두 분은 모르실 수도 있겠구나.”

핸드폰으로 한국의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 접속해 ‘소설 베스트셀러 순위’를 검색해 보여주는 김하연.

“···와.”

“순위가··· 상당히 높네요.”

국내도서 전체 45위, 소설 부문 11위를 기록 중인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보며 두 사람이 감탄하는 가운데.

“요즘 이 책이 한국에서 진짜 인기가 많거든요. 입소문이 많이 퍼져서 순위가 역주행하는 중이라고···.”

이에 각종 플랫폼이 이 책을 대대적으로 노출시켰고, 그에 힘입어 판매부수가 현재는 2만 부를 바라보는 상황이란 것.

“2만 부요? 그거 놀라운데요.”

“그렇죠? 솔직히 한국 출판시장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아시잖아요.”

신인작가, 심지어 영미소설이 2만 부 가까이 팔린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라는 것.

그렇게,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얘기가 한참 오간 후.

화제는 어느덧 김하연 작가의 최근 심경으로 흘러갔다.

“···솔직히, 좀 꿈 같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미국 시장에서 주목받기 전에도 김하연은 한국의 장르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였다.

그러니 유명세와 인기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상황이었는데도-

“이게··· 판이 커져서 그런 걸까요? 환상문학상 후보작으로 발표된 후에는 정말 눈이 돌아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어요.”

그에 관한 언론 기사가 나간 후.

한동안 제자리걸음이었던 <녹슨 칼 끝>의 소장본 판매부수가 급격하게 치솟은 것은 물론.

“기존의 구작들까지 재쇄에 돌입한 거 있죠? 절판됐던 것들도 재계약을 맺었고···.”

신문이나 잡지 인터뷰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방송 채널에서까지 그녀를 섭외하려고 난리였단다.

그러나 막상 지금의 자신은-

“솔직히 말하면,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요. 물론 지금 상황이 정말 기쁘긴 하지만···.”

미소 띤 얼굴로 말하는 김하연.

“또 한편으론 좀 긴장이 되기도 해요.”

“긴장···이요?”

“음, 저는 뭐라고 해야 하나, 조금 독특한 작품관을 갖고 있는데.”

유진의 물음에 김하연 작가가 그 쪽을 돌아봤다.

“제게 있어서 소설이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쓰는 뭔가가 아니거든요.”

“···.”

“세상에는 반드시 ‘쓰여져야 하는 글’이 있는데, 그 글의 탄생을 위한 도구로서 내가 선택이 된 거다- 라고 늘 생각해요. 그런데···.”

손 끝으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매만지며 말을 잇는 김하연.

“여기저기서 불러주시고,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시고. ···그 하나 하나가 감격스럽고 감사하지만, 한편으론 여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샌가 그걸 당연히 여기는 것으로 모자라-

“반드시 태어나야만 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닌, 그저 인정과 인기를 얻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더군요.”

···담당 작가가 털어놓은, 상준 자신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속내에 조금 놀라고 있던 그때.

“···.”

뒤늦게 아들 유진의 표정이 권상준의 눈에 들어왔다.

‘···녀석.’

김하연 작가의 그 말에 자신 또한 백 퍼센트 공감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래, 에곤 K로 지내면서 유진이 또한 많은 것을 느꼈겠지.’

유진이 녀석의 결심대로 필명으로 책을 낸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루마니아에 도착한 첫날은 밥 먹고 잠 자는 게 전부였다면.

그다음부터는 제법 일정이 빡빡했다.

시상식, 저자 강연, 좌담회 등 김하연 작가의 여러 공식일정을 아버지가 직접 보좌해야 하는 만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유진이 너는 너 편한 대로 다니려므나.’

그 말대로 나는 내가 따로 짜놓은 스케줄을 따라 움직였다.

둘째날에는 제일 기대했던 것- 그러니까 트란실바니아 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는 김하연 작가님의 강연을 들었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고 해야 할까.’

장르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판타지를 좋아하는 청중 앞에서 김하연 작가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판타지 문학에 입문하게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역사광이었어요. 대학에 가서는 사학을 공부했고, 이후 대학원에서는 중세 서양사를 전공으로 택했는데···.’

<시간의 수도원>은 그 같은 김하연 작가의 ‘중세 사랑’에서 탄생한 작품이라는 것.

처음만 해도 취미이자 부업으로 썼던 소설이지만, 차츰 더 많은 인기를 얻게 되며 자연스럽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 그녀의 작품들이 한국 판타지 장르에 미친 영향은 상당한데, 그녀 이후로 ‘로우판타지’라는 개념이 우리나라 장르판에도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여하튼, 개인적으로 뜻깊었던 강연을 들은 이후.

셋째날과 넷째날에는 혼자서 택시를 타고 비에르탄 요새 교회, 투르다 소금광산, 비스트리타 마을 등을 관광했다.

그리고 어느덧 다섯째날.

“어··· 정말로 괜찮겠어요?”

나는 브란 성을 방문하고 싶어하는 김하연 작가를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원래는 아버지가 같이 가시겠다고 했지만.’

KMC에이전시와 트란실바니아 대학 사이의 협업 논의가 길어지면서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그럼요. 제가 가이드북으로 미리 준비도 철저하게 해왔거든요. 아, 물론 작가님이 불편하지 않으시다는 전제하에.”

“제가 불편할 거야 없죠. 사실 혼자 다녀도 상관은 없지만···.”

김하연 작가가 생긋 웃었다.

“유진 군과 다니는 게 더 재밌을 것 같네요. 그럼 염치불고하고, 안내 잘 받을게요.”

그렇게 나는, 중학생 때 내게 판타지 장르에 발을 들이게 해준 작가와 함께 브란 성 관광에 나서게 되었다.

*

유진이 루마니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미국에서는 <토끼 남작의 모험>의 정식 출판본 제작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클레그.”

원더테일의 수석 편집자 대니얼 앤더슨은 이 책의 최종 가제본 확인을 위해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와 만난 참.

“저도 반갑습니다, 앤더슨 편집자님. 이렇게 뵐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하하.”

베니 르 레푸스의 에이전트인 그와 대니얼은 이전에 다른 일로 이미 안면을 튼 사이였는데.

함께 일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미스터 클레그의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던데···.”

최근 이 출판업계에서 케빈 클레그의 이름은 꽤 유명해져 있었다.

에곤 K의 에이전트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주목을 받던 와중-

‘비록 아동서 업계에서만 화제가 되는 듯하긴 하지만.’

베니 르 레푸스라는 필명의 공동저자들과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다는 것에, 또 한 차례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뭐 그건 그렇고, 클로이네 오빠··· 아니지, 유진 작가님과는 어떻게 계약하시게 된 겁니까?”

순전한 호기심으로 던진 질문에, 케빈은 미리 유진과 말을 맞춰놓은 대로 대답했다.

“제가 아이오와대학에서 출판 관련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게 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유진 작가님의 대학 진학 상담을 맡게 됐거든요.”

“아하, 그런 식으로 인연이 생겨난 거군요. 아 맞다, 일단 가제본부터 보여드리자면···.”

두 사람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가제본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제본이란-

본격적인 인쇄 작업에 들어가기 전, 이 책이 어떤 모양새로 인쇄될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만드는 임시 제본 책이다.

인쇄소가 아니고, 따로 가제본만 제작하는 업체에서 만들어서 보내주는데.

이때 받은 가제본을 살펴보며 마지막 오류까지 잡아내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최종파일이 인쇄소로 넘어가는 것.

“···와, 너무 훌륭한데요?”

대니얼과 함께 가제본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케빈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글쎄요, 수정할 부분은 딱히 없을 것 같고. 오히려 이 색감···이라고 해야 하나? 색감이 정말 좋네요.”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하하. 사실, 클로이 어머니··· 그러니까 케이트 권 디자이너의 솜씨가 너무 뛰어나서, 저희 디자인팀에서 거의 건드린 게 없습니다.”

제목 타이포에다 디자인 요소만 살짝 첨가했고.

기존의 표지를 그대로 살리되 바깥쪽에 프레임(액자) 디자인을 덧붙여서 화려한 느낌을 준 것이 전부이며-

“무엇보다도 이 책은 후가공에 가장 큰 공을 들였습니다.”

후가공이란 책을 인쇄한 후, 제본 이전에 들어가는 모든 처리 단계를 말한다.

즉, 제목 타이포가 돌출돼 보이도록 형압을 준다든가.

홀로그램처럼 반짝거리게 박을 입히거나, 특정 부분에만 코팅을 입히거나 하는 이 모든 것이 후가공 작업에 속하는 셈.

“말하자면, 소장용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랄까요?”

아이들이 탐낼 만한 예쁜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대니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케빈의 시야에 원더테일판 <토끼 남작의 모험>이 들어왔다.

토끼 남작 베니가 당근 검을 들고 당당하게 서 있는 표지화가 눈길을 가로잡는 가운데.

‘기존의 자가 출판 버전과 비교하자면-’

조금 더 화려하고, 색감이 보다 생생하며.

아이들에게는 만지는 재미까지 선사해줄 만한 책으로 탄생한 것.

“와, 이거 클로이 양이 보면 정말 좋아하겠는걸요.”

“아! 미스터 클레그도 클로이를 만나보셨습니까? 저희 마리사의 베스트프렌드인데.”

신나서 말하던 대니얼이 <토끼 남작>의 본문을 넘겨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희 마리사도 이 책을 진짜 좋아하는데···.”

첫 페이지에 ‘동생은 아주 많았다’라고 나오는 대목 아래.

거대한 토끼굴 속, 어린 토끼들이 드글드글한 삽화가 케빈의 시선을 붙잡는다.

‘크, 그림이 너무 귀엽네.’

누구는 울고, 누구는 당근으로 펜싱 연습을 하고, 누구는 서로들 싸우고, 누구는 자기 발을 빨아먹고···.

케빈의 시선이 그림에 꽂혀 있는 가운데 대니얼의 말이 이어졌다.

“마리사가 이 페이지만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이 1쪽만 너덜너덜해졌지 뭡니까.”

“푸흐, 마리사 양이 평소에 동생 때문에 힘들었나 본데요.”

“네, 그것도 그렇지만···.”

방금만 해도 웃음 짓던 대니얼의 표정이 조금 우울해졌다.

“약간 제 잘못 같기도 합니다. 제가 자꾸 말 안 듣고 동생이랑 싸우면 동생 또 생길 거다! 라고 겁을 줬는데.”

···아니 그건 좀 너무한걸.

협박이 과하셨네- 라고 생각하는데, 대니얼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이어진다.

“설마 그게 현실이 될 줄은 저도 몰랐죠···.”

“아아···.”

케빈이 위로를 해야 할지 어떨지 몰라하던 그때.

대니얼이 아- 하며 잊고 있었던 용건을 떠올려냈다.

“아 맞다! 2권 원고와 삽화는 언제까지 작업 가능할까요?”

“아 네, 원고는 거의 다 완성됐습니다. 작가님이 퇴고만 좀 더 진행하면 마무리될 것 같다 하시더군요. 관건은 삽화인데.”

하지만, 언젠가 케빈이 일정을 물었더니 네드 또한 이렇게 답한 터였다.

‘그림요? 그거야 뭐, 그리면 되죠. ···햇볕이 쨍쨍할 때 건초를 만들라고 하잖아요?’

선인세 금액을 듣고서 얼마나 두 눈을 열정으로 불태우던지.

그러니 못해도 방학이 끝나기 전에 삽화를 전부 끝낼 수 있다는 네드의 말을 전달하자-

“와, 그러면 진짜··· 어쩌면 올해 안에 2권도 나올 수 있겠는데요?”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에 수석 편집자 대니얼의 얼굴이 밝아졌다.

“크, 생각만 해도 좋군요! 아 그리고, 영국 맥밀란에서도 곧 <토끼 남작> 영국판을 출간할 예정인데···.”

그곳에서도 큰 틀의 수정 없이 그대로 제작을 진행하는 만큼, 1달 내에 출간이 될 예정이라는 것.

···아동서 강국이라 불리는 영국 시장에서는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가 되는 가운데-

“흠, 저희 원더테일 쪽의 출간이 조금 더 빠르군요.”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이 되고, 양쪽에서 대대적인 마케팅이 진행된다면-”

“그 효과가 배가되겠군요.”

곧바로 튀어나온 대니얼의 대답에, 케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한동안은 이 <토끼 남작> 이야기로 아동서 시장이 시끌시끌할 겁니다.”

“···!”

대니얼과 케빈.

두 사람의 눈동자가 이 <토끼 남작의 모험> 시리즈가 일으킬 파란을 향한 기대감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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