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2)
*
다시 그 시각,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
“Te rog mergi la Castelul Bran(브란 성으로 가주세요).”
여행용 회화책에 나온 문장을 어설프게 따라 읽었는데도.
부우웅-
택시기사는 찰떡 같이 알아듣고 브란성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역시 택시가 최고네요. 편하고, 시원하고.”
“오늘 날씨가 좀 덥긴 하죠?”
덕분에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저야 원래 중세광이지만··· 유진 군도 브란 성을 보고 싶어했다니 신기하네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때문이냐고 묻는 김하연 작가.
“음, 반반이랄까요? 물론 브램 스토커도 좋아하는 작가이긴 하지만. 사실 저도 중세풍 판타지를 엄청 좋아해서.”
“아하.”
“그리고 그 시작을 따져보면, 작가님이 쓰신 <시간의 수도원>인 것 같고요.”
내 말에 김하연 작가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미소를 짓는다.
“···그거 영광이네요.”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드래곤을 제외하고는 마법 등의 환상적 요소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시간의 수도원>을 읽고 진심으로 매료되었고.
저자 김하연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는 작가 후기를 읽고-
“<장미의 이름>을 읽었다고요? 중학생 때?”
“···네, 엄청 어렵더라고요.”
“후후, 조숙한 학생이었네요.”
···나중에 대학 가서는 중세 유럽사 청강까지 했다는 얘기는 덧붙이지 않았다.
이내 나는 오늘의 본론을 꺼냈고, 김하연 작가는 그 말을 이렇게 정리했다.
“중세풍의 세계관에 걸맞은 이야기를 고민하고 있단 말이죠.”
오늘 브란 성에 오기 전까지, 나는 기존에 생각해뒀던 소재 몇 가지를 정리해본 터였다.
···그러니까 병상에 누워 있을 적 떠올렸던 이야기들 말이다.
그렇지만 그중 무엇이 잘 어울릴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
“음, 세계관에 맞춰서 이야기를 써야 하는 경우라면.”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잠시 고민해보던 김하연 작가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한 번, MMORPG 게임의 세계관 기획을 의뢰받은 적이 있거든요.”
나중에는 그 게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소설도 썼다고.
“그때 바로 지금 유진 군과 비슷한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내가 그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가운데,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작가들은 보통 캐릭터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키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세계관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그 정반대 방향이다 보니, 처음에는 감을 잡기 어려웠는데···.”
그래서 발상을 전환해봤다는 것.
“이른바 ‘스킨’이라는 거죠.”
“스킨이요? 스킨을 씌운다- 할 때의 그 스킨?”
“네 맞아요. 쉽게 예를 들면··· 서부극이라는 장르 알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김하연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총잡이들이 벌이는 활극이 이 장르의 기본이잖아요? 그런데 이 내용을 그대로 배경만 우주로 옮긴다면-”
“스페이스오페라가 되겠네요.”
뭔가 손에 잡힐 듯한 기분에 저절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바로 그거예요.”
내 대답에 김하연 작가가 눈을 빛낸다.
스페이스오페라란 SF의 하위장르 중 하나.
애초 이름부터가 ‘우주 활극’으로, 과학적 정합성을 중시하는 하드 SF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장르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배경에 넣는 것만으로도, 결은 비슷하지만 그 색깔이 확 달라지게 되죠.”
그런 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다양한 배경에 넣다 보면 거기서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난다는 김하연 작가의 설명.
“···그렇게 얘기하시니 바로 이해가 되는데요.”
역시 경험이 많은 작가라고 해야 하나.
소설 작업뿐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해온 덕분에, 작법 자체에도 상당히 능통해 보였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이건 사족일지도 모르겠는데···.”
부우웅-
목적지에 다와가기 때문인지, 속도가 조금 느려진 가운데.
김하연 작가는 내게 마지막 힌트를 주었다.
“내가 그런 중세에 떨어지게 된다면, 거기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편하게 질문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소설의 구성이나, 기승전결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보라는 것.
“···우리는 때마침 이 브란 성이라는 고성의 표본에 도착한 셈이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그런 세계에 떨어진다면···.’
그녀의 질문을 곰곰이 되새겨보던 와중 택시가 멈췄고.
차에서 내리자, 우리를 마주하는 풍경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와.”
바위 언덕 위에 자리한 거대한 고성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
그 시각, 미국 뉴욕의 어느 영화 스튜디오.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본격적인 포스트프로덕션이 이뤄지고 있는 편집실 앞, 갓 사춘기에 들어선 소년 한 명이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들어가도··· 되려나.’
그것은 이번 작품에서 소년 일라이저의 배역을 소화한 아역 배우 노아.
노아는 한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과감하게 노크했고.
“어어, 들어와요.”
곧바로 들려온 목소리에 안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제대로 환기를 안 해서인지 답답한 공기가 훅 느껴지는 가운데.
편집실 안에는 감독 막성스 라미와 -그의 대학동기인- 편집감독이 앉아 있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 노아.”
“그러게, 아니 뭘 또 이렇게 사왔어.”
“감독님들, 편집은 잘 진행되고 있는···.”
웃으며 대꾸한 노아는 막성스를 보고 한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깜짝이야.’
배우처럼 잘생기기로 유명한 외모가 오늘 따라 확 초췌해져 있었기 때문.
까치집 같은 머리에 며칠째 안 깎은 듯 보이는 수염은 물론, 광채가 사라진 얼굴은 흙빛이 돼 있었다.
“···감독님,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얼굴빛이 영···.”
그 말에 풋 웃음을 터뜨리는 편집감독.
“야, 노아가 다 걱정하잖냐.”
“···어? 아, 어. 그런 거 아냐, 노아. 걱정 말고.”
막성스는 그러면서도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리둥절해하는 아역배우에게 편집감독이 설명해줬다.
“아니, 내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히 괜찮거든? 근데 우리의 막성스 감독님은 아직도 멀었다고 하시잖냐.”
“···멀었다, 정도는 아니고. 조금 더 공을 들이고 싶다 이 말이지.”
두 사람의 대화에 아역배우는 한순간 긴장하고 말았다.
‘내 연기가··· 부족해서인가.’
그때, 그런 소년의 속내를 엿듣기라도 한 듯 덧붙이는 막성스.
“그리고 노아, 네 연기는 너무 좋았어.”
“···.”
“사실 그래서이기도 해. 너도 그렇고, 우리 배우분들 연기가 너무 훌륭해서··· 그걸 150퍼센트로 살려내고 싶다는 욕심이 너무 커서.”
그 말에 소년 배우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되게 세심하시다니까.’
노아는 예전부터도 이 열정 넘치는 감독이 참 좋았다.
‘잠깐, 잠깐! 우리 노아 배우는 이제 가야 한다고. 아역배우의 법정퇴근시각이···.’
촉망받는 아역이라곤 해도 인지도가 아직 한참은 떨어지는 자신을 촬영 내내 배려해준 것은 물론, 배우진 모두에게 따스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그때, 편집감독의 말이 이어졌다.
“감독님아, 솔직히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보기에 지금도 이미 120퍼센트는 돼.”
“···.”
“근데도 니가 더 이걸 붙잡고 있는 건 욕심이 아니라 애정 때문이라고, 애정.”
“···농담은.”
막성스 감독은 웃으면서 말을 흐렸지만.
소년은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잘 알았다.
‘감독님의 원작 사랑은 엄청나시지.’
그렇다고 원작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영상으로 담아내는 타입은 절대 아니다.
···다만, 원작을 향한 애정이 강렬한 만큼 그 이상을 보여줘야 된다는 야망으로 가득하다고 할까.
그리고 노아 자신은 물론, 배우진 모두가 그 같은 감독의 열정에 취해 평소 기량을 훨씬 웃도는 아웃풋을 내놓았으니.
‘놀라운 촬영 현장이었지.’
소년이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문득 고개를 든 순간.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 동글동글 귀여운 것들이 잡혔다.
‘저건···.’
그것은 바로 에곤 K의 캐릭터를 SD화해놓은 자그마한 피규어.
소년의 시선을 깨달은 편집 감독이 설명했다.
“요즘엔 참 세상이 좋단 말이야, 저게 팬들이 만든 SD 캐릭터래요. 저걸 3D프린터로 뽑아서 판다나···. 막성스, 맞지?”
“···.”
막성스 감독이 입을 꾹 다문 사이.
소년은 새삼 이 영화 편집실 안 여기저기에 그런 유의 굿즈가 잔뜩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력과 탁상용 시계, 노트와 메모지까지.
소년 배우의 표정을 본 막성스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냥, 팬들이 만들어서 파는 거라니까 신기해서 사본 거야.”
···전혀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감독의 마음을 이해해주기로 했다.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그렇지?”
역시 아역배우답게, 어른들의 마음을 배려할 줄 아는 훌륭한 태도였다.
*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관광지 브란 성.
그것은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험준한 절벽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
그 환상적이고도 위압적인 존재감에 우리 두 사람 모두 압도당한 채 발을 옮겼다.
기념품 가게나 매점 따위가 늘어선 구역을 지나 정문으로 들어서자.
“와···.”
“너무 근사하네요.”
어느덧 모습을 드러낸 아름다운 정원과 안뜰.
성 내부로 들어가 중세 무기나 갑옷, 태피스트리 따위로 장식된 방을 지나, 미로 같은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니-
“···여기가 그 유명한 비밀통로인가 본데요, 작가님.”
가이드북에 나왔던 ‘비밀 통로’가 드디어 등장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마디하자,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하연.
“올라가봐요.”
우리는 좁고 구불구불한 비밀통로를 따라 올라갔다.
양벽이 울퉁불퉁한 돌담으로 이뤄진 가운데, 계단을 밟을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좁은 통로 안에 둔중하게 울려퍼진다.
‘···으스스한 분위기인걸.’
중세의 고딕소설 속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한참을 걷다 보니 섬뜩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지는데, 꽤 오래전 어느 대학 수업에서 알게 된 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그게 아마··· 머빈 피크의 <고멘가스트> 3부작이었지.’
과거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이제는 쇠락해가는 거대한 고멘가스트 성.
이곳을 대대로 지배해온 가문의 77대 백작 타이투스 그로언의 삶을 따라가는 소설로, 고딕 판타지 장르의 효시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이 <고멘가스트> 시리즈에 등장하는 고성 역시 폐쇄적인 구조의 성인데.
지금 우리가 걸어 올라가는 이 통로 같은 비밀통로 수십 개가 도처에 얼키고 설킨, 미로 같은 구조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 통로를 손바닥 들여보듯 아는 사람만이 성 안을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는 설정이지.’
이곳 브란 성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처음부터 끝까지,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던 그 소설이 유독 더 떠오른다.
···그리고 잠시 후.
“아,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네요.”
비밀 통로를 완전히 벗어나자, 돌연 널찍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성탑의 정상···!’
일종의 전망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자.
확 트인 창으로 시원한 산바람이 얼굴 가득 밀려들었다.
더불어 보이는 저 멀리의 카르파티아 산맥과, 그 아래 옹기종기 자리한 브란 마을.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풍경이네.’
그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경관이 시야를 꽉 채우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고성.’
깎아지른 절벽 위의 고립된 성.
그 안을 가득 채운, 소름끼치도록 음산한 분위기.
공포 통치를 펼치는 영주와 억압받는 주민들.
성을 대대로 지배해온 가문의 일원들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수십 개의 비밀통로들···.
그 모든 것이 하나 하나의 퍼즐조각이 되어 차츰 맞춰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완성된 커다란 그림은-
‘으스스하고, 기괴하며, 수많은 음모와 수수께끼가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고 있는.’
···환상적이고도 어두운, 고딕풍의 무대였다.
이내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김하연 작가의 목소리.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배경에 넣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지는···.’
그 순간, -미리 생각해놓은 여러 개의 이야기 중- 이 무대에 가장 적합한 것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더니.
원래의 형태가 아닌, 이 무대에 적합한 형태로 변형되어 움트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머릿속에서 펼쳐진 것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는데.
불현듯 그에 걸맞는 제목이 떠올랐다.
‘캐슬···!’
···어두운 음모가 도사리는 미궁 같은 고성 안에서 갇혀 지내온 소년의 탈출기, <캐슬>.
그래, 그것이 나의 차기작이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