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고등학생(2)
유진은 이틀 전, 아이오와 대학 출판부의 셜리 맥그로우와 나눴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유진 작가니이이임~~ 대체 뭐예요,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진짜아~’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뜸 <토끼 남작의 모험> 얘기를 꺼냈고.
‘아, 알고 계셨군요. 제가 진작에 연락드리고 책도 보내드려야 했는데···.’
‘에이, 보내주길 뭘 보내줘요. 저 이미 이거 한 권 있거든요!’
수업 듣는 학생 중 하나가 줬다는 것.
‘와, 소식이 빠르네요.’
‘그럼요, 아이오와시티의 자랑이 되어가는 중인데요.’
동네의 자랑거리라니, 한국이었다면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라도 걸렸으려나.
셜리의 들뜬 목소리에 유진마저 입꼬리가 올라가던 그때.
‘뭐, 축하도 축하이지만, 진짜 용건은 따로 있어서요.’
이내 이어진 그녀의 진짜 용건에, 유진은 꽤 놀란 터였다.
‘저희 출판부에, 유진 작가님 연락처를 묻는 문의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요.’
그 자체로는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문의가-
‘대학의··· 진학 담당자들이라고요?’
‘네. 스콜라스틱 공모전 심사위원이라고 밝힌 경우도 있고, 셰익스피어 앤솔로지를 읽었다는 곳도 있고, 또···.’
<토끼 남작> 얘기를 꺼내며 문의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
그리하여 유진은 고민하다가 이메일 주소만 알려주라고 얘기했고.
‘···아이오와대학을 비롯, 총 15개 대학 담당자들이 이메일을 보냈지.’
재미난 게 있다면 그중 절반은 스콜라스틱 공모전을 통해, 나머지는 <토끼 남작>의 출간 덕분에 들어온 제안이었는데.
‘···알래스카에도 문예창작 프로그램이 있단 말이야?’
온갖 대학 입학처에서 보내온 이메일에, 유진은 각종 조건들을 명확하게 제시한 문서를 힐크레스트 고등학교 측에 공문으로 보내달라- 라고 답장을 보내둔 상황.
···그것이 바로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
그로부터 약 30여분 간.
나와 교장, 그리고 미스터 레너드는 교장실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채 대학입학처들에서 보내온 문서를 살펴보았다.
“허허, 이렇게 좋을 데가! 아니, 컬럼비아대학에서도··· 오오, 시카고대학은 아주 파격적이군요!”
총 15곳 대학에서 온 장학생 입학 제안.
그 문서들에 적힌 조건 하나 하나를 볼 때마다, 교장은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유진 군, 벌써 아이오와대학으로 마음을 굳힌 건가요? 다른 학교들의 제안도 충분히 유혹적인데-”
“네, 이미 굳혔습니다.”
집에서 통학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지만, 아이오와대학의 경우-
“···아이오와작가워크샵에 우선적으로 참여하게 해준다고 해서.”
“아니, 이건 엄청나군요! 작가워크샵의 경쟁이 엄청 치열하다고 들었는데.”
아이오와대의 명성을 만들어낸 일등공신, 아이오와작가워크샵.
역대 최다 퓰리처상 및 전미도서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이 프로그램은 본디 석사 학위 프로그램으로, 학부 졸업장이 있는 경우에만 -치열한 경쟁과 선발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오와대학에선 내가 <토끼 남작의 모험>을 출간한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여, 워크샵 과목 중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수강하게 해주겠다는 특혜를 제안해온 것.
···물론, -학부과정의 4년제 학비와- 이 워크샵 비용 모두 전액 지원해준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호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여기 레너드 하인스 선생님과 마지막까지 고민해보도록 해요,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네, 조언 감사합니다 교장선생님.”
볼이 축 늘어진 교장은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이었다.
“여하튼 아주 훌륭합니다, 유진 군. 이 학교의 개교 이래, 이런 일은 정말 처음이에요 으하하.”
힐크레스트 고등학교.
원래도 문화예술 분야에 강한 학생들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15곳에서 동시에 제안을 받은 것은 최초라고.
“그것도 심지어 아직 11학년인 학생에게 이 정도로 러브콜을 보내다니, 허허.”
내년도 입학 홍보 때 자랑할 얘기가 많겠다며 신나하는 가운데.
“···.”
미스터 레너드는 본인이 더 고무된 기색으로 아무 말도 못하더니.
이내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유진, 점점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
그 말에 문득, 회귀 직후에 레너드 선생님과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고독한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동료가 있는 편이 훨씬 낫거든.’
절반은 그의 착각에서 비롯되었지만, 사실 맞는 말이었다.
회귀 이전, 병실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 글을 쓰던 시절의 나는 지독할 정도로 외로웠으니까.
“네, 선생님. ···입부를 권유해주신 덕분에,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마음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이 알게 모르게 자양분이 되어줬음을 이제야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대학에 가서 경험할 것들도 기대되고요.”
내 말에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레너드 선생님.
“아이오와대학은 전통적으로 문예창작 강세인 명문 대학이란다. 워크샵도 워크샵이지만, 교수진이 아주 훌륭하지.”
이곳에 자신의 은사가 계시다며 덧붙이기를.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한 번 교수님을 뵈러 가보지 않을래?”
레너드 선생님의 제안에, 나는 저야 좋죠-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한편 그 시각, 대니얼은 아내의 급한 연락에 반차를 쓰고 퇴근한 참이었다.
‘무슨 일이지.’
걱정하면서 집에 들어온 바로 그 순간-
“엄마아~ 나도, 나도~ 나도 해죠오오~”
“야! 징징이 너 그만 좀 하랬지? 엄마 힘들게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하도 찡찡거리는 탓에 ‘징징이’라는 별명이 붙은 둘째 조이와, 그런 조이를 다섯 살짜리답지 않게 혼내고 있는 첫째 마리사.
그리고 목청껏 울어대는 갓난쟁이 막내를 안고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여보, 무슨 일이야. 시터분은?”
“아,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못 오신다고 연락이 왔더라고. 근데···.”
어린이집에서 온 이후로 조이가 내내 징징거리고, 그 바람에 낮잠 자던 막내까지 깨어나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는 것.
“아빠아~ 안아죠~”
“이리 와, 조이.”
둘째라서 그런가.
위아래로 치이는 탓에 욕심도 많고, 징징거리기도 잘하는 둘째를 품에 안아올리자.
조이는 기다렸다는 듯 눈물을 쏟아내며 원하는 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니까아, 어린이집에, 인형, 이써~ 나도, 베니, 베니 가질래~”
“음, 조이 그게··· 무슨 말이니?”
“아빠~ 내가 알료줄게.”
첫째 마리사의 설명에 따르면, 조이네 반의 누군가가 <토끼 남작>의 베니 인형을 들고 왔는데.
그 엄마가 직접 손바느질로 만들어준 인형이라는 것.
“요즘 어린이집에서 베니, 엄청 인기마나~”
요즘 마리사네 어린이집에서는 이 <토끼 남작의 모험>을 몇 권씩 구비해놓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보게 해준다는데.
덕분에 아이들은 토끼 남작의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공부를 하거나, 베니 이야기를 주제로 인형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그 친구를 부러워하며 베니 인형을 갖고 싶어한다는데.
“근데 엄마가 어떻게 만들어~ 엄마는 아기 보기도 바쁜데~”
“시러, 시러~ 베니 인형 죠~”
조이가 다시 징징거리자, 마리사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한다.
“원래애~ 그런 고야 징징아. 원래~ 인생은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냐아~”
“···.”
···나도 모르게 애들 앞에서 저런 말을 했던 걸까.
마리사의 말에 대니얼이 조금 씁쓸하게 반성하던 그때-
부르르르, 진동과 함께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대니얼 편집자님 잘 지내시죠! 다름이 아니고, 반가운 소식을 알려드릴 게 있어서···]
이내 이어진 내용에, 대니얼은 한순간 자기 눈을 믿지 못했다.
“···!”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두 딸을 돌아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조이, 어쩌면··· 아빠가 사줄 수 있을 것도 같아.”
“웅? 뭐를?”
“베니, 베니 인형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
두 딸의 눈이 휘둥그레진 가운데.
대니얼의 눈이 다시금 케빈 클레그의 메시지를 담았다.
[···지금 막, <토끼 남작>의 완구 제작에 관한 캐릭터 라이선스 계약 논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거든요 하하.]
토끼 남작 인형부터 시작해,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 상품을 제작하게 될 거라는 것.
“···토끼 남작 인형이 나오면, 제일 먼저 우리 딸들에게 사줄게.”
“우와아!”
“신나아~”
기쁘게 외치는 어린 딸들을 보며 대니얼은 슬며시 웃고 말았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교장실에서 논의를 마치고 뒤늦게 카페테리아로 가니, 이미 점심을 다 먹고 간식을 새로 사온 학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오! 유진이다!”
“토끼 남작의 아버지!”
···토끼 남작의 아버지는 좀.
새로 생겨난 별명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유진! 이쪽이야.”
나를 알아본 아델과 네드의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너 교장실엔 왜 불려간 거야?”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묻는 아델, 그리고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네드.
···근처에 앉은 다른 학생들의 시선까지 집중된 것을 느끼며, 아델의 말을 받았다.
“아, 조기 입학 얘기 때문에.”
“조기 입학? 너 11학년 다니고 내년 9월에 들어갈 거라며.”
“그러게, 원서 접수기간까지는 아직 멀지 않았나?”
“음, 그게.”
스콜라스틱 공모전 3차에 붙었고, 그 여파로 각종 대학들에서 대학 입학제안을 받았다- 라고 하자.
“뭐어어어—! 3차에 붙었다고?”
“그 얘기를 먼저 했어야지, 그래, 무슨 상 받았어?”
“전국상.”
“으아아아아, 대박!”
아델과 네드가 본인 일처럼 신나 하는 가운데, 나는 방금 교장실에서 들은 스콜라스틱 전국상의 혜택을 다시 떠올렸다.
첫 번째, 학업 보조금 형태의 장학금은 내게는 큰 의미가 없고.
두 번째, 역대 <스콜라스틱 수상작 모음집>에 가 수록되어 출간될 거라는 것.
이 모음집만 사 보는 독자도 상당한 만큼, 의미 있는 포트폴리오가 될 거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데 그거 시상식 되게 크게 하지 않나?”
언젠가 유튜브에서 시상식 생중계를 본 적 있다는 네드의 말에, 아델이 뭔가를 찾아봤다.
“오, 진짜. 스케일 엄청나다.”
“크으, 우리의 권유진이 이 무대에 올라간다니···.”
“로버트 레드포드도 왔었네!”
“또 할아버지 배우냐?”
“···할아버지 아니라고!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얼마나 멋졌는데!”
네드가 아델의 취향이 수상하다며 고개를 젓던 그때.
‘그냥 단순한 시상식이 아니란다, 유진.’
레너드 선생님이 해준 설명이 떠올랐다.
‘공모전 심사위원들과 안면을 트고, 스콜라스틱 수상자들끼리의 정기모임을 가질 기회이기도 하지.’
즉, 작가 혹은 -꽤 많은 작가들이 그러듯- 작가 겸 교수로서의 커리어를 고려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네트워킹의 자리가 된다는 것.
‘기억하기로, 내가 출판사에서 일할 때도 이 스콜라스틱 출신 작가들이 꽤 많았지.’
그들 대부분이 출판계에서 빛나는 활약을 했으며, 내가 담당했던 작가 중에도 이 스콜라스틱 수상자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이득이라기보단-
‘재능 있는 (미래의) 작가들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기대된다는 정도?’
그건 그렇고.
네드와 아델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진, 근데 너 배 안 고파?”
“그래, 뭐든 빨리 먹어라.”
나를 기다리다가 먼저 먹어버렸다는 두 친구.
“어, 잠깐 다녀올게.”
남은 메뉴 중 아무거나 들고 와야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지잉- 지이잉-
청바지 주머니 안에서 연달아 울리는 스마트폰의 진동.
“···.”
슬쩍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하나는 미스터 케빈의 메시지였고.
또 다른 하나는 생각지도 못한 메일이었다.
[발신인 : [email protected]]
[예일대 극작과 로렌 루먼입니다]
로렌 루먼이라면···.
‘토니상 최대 부문 수상 기록을 세운, 천재 극작가!’
회귀 이전에도 익숙하게 들어봤던 이름에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