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78화 (78/126)

각색(1)

*

오늘의 점심 메뉴는 그릴드치킨과 스패니시라이스, 샐러드, 과일.

나름 신선한 것으로 골라 자리로 가져온 뒤, 스마트폰을 꺼내 메일 앱을 실행시켰다.

[예일대 극작과 로렌 루먼입니다]

···메일함에 와 있는 것은 천재 극작가가 보낸 메일.

‘로렌 루먼. 문화예술계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지.’

20대 중반, 예일대 극작과를 졸업하자마자 쓴 실험극 <루나 그래피티>로 평단의 대찬사를 받았고.

이후 <칼레이도스코프> <몽상경> <다락방 미스터리> 등의 히트작을 줄줄이 내며 ‘천재 극작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진다.

‘그중 <다락방 미스터리>는 토니상 1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고, 그중 10개 부문에서 수상에 성공했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업적.

···내가 이렇게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나 역시 연극 <다락방 미스터리>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 천재 극작가의 이름을 이런 형태로 보게 될 줄이야.

‘이 사람이 대체 왜 내게 메일을 보낸 걸까.’

그릴드치킨을 한 점 뜯어 입에 넣은 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클릭해서 열어보자-

[안녕하세요, 로렌 루먼입니다.

나는 극본가이고, 예일대 극작과 교수로 일하고 있어요.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내가 스콜라스틱 공모전 심사위원으로서 유진 권 학생의 를 심사하게 됐는데···.]

다소 두서 없는 얘기로 시작된 메일.

그러나 이내 등장한 본론에,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미친.”

이 로렌 루먼이, 내 소설을 극본으로 각색하겠다고?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멍하니 스마트폰 화면만 보고 있자, 저희들끼리 한참 떠들던 네드와 아델이 나를 돌아보았다.

“유진, 뭐 하냐.”

“그러게, 영혼이 반쯤 나가 있네. ···왜 그러는데?”

“···.”

나는 설명 대신 두 사람에게 폰 화면을 내밀었는데.

둘은 메일을 다 읽고도 나처럼 놀라는 대신 이런 반응을 보였다.

“오오, 연극 각색! 재밌겠다.”

“그러게. 근데 로렌 루먼? 이사람이 누구야? 아, 스콜라스틱 공모전 심사위원!”

···하긴 얘들은 잘 모르겠구나.

‘그래도, 여전히 실감이 안 나는걸.’

네드나 아델에게 뺨을 꼬집어달라고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후우.”

포크를 내려놓고는 메일 답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흥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차분한 어조로.

[안녕하세요, 권유진입니다.

로렌 루먼 교수님이 보내주신 메일의 내용은 잘 확인했습니다.

조금 당황스럽지만, 그에 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물론, 이 천재 극작가가 나의 를 극본으로 각색하겠다는 건 당연히 반가운 제안이다.

다만-

‘각색 계약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따져보고 해야 하니까.’

지금 나는 이 를 아직 어떤 형태로도 출간한 바가 없다.

곧 <스콜라스틱 수상작 모음집>에 수록될 예정이니 그 점은 다행이긴 하지만.

‘자칫 2차 저작권 관련해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그 부분을 확실하게 논의해보고 싶다, 라는 내용으로 나는 답신 작성을 마무리했고.

“···.”

뭔가 정신이 반쯤 나간 기분으로 고개를 들고 보니, 벌써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른 후였다.

‘뭔가 실감이 안 나네.’

다시 포크를 들어 치킨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RE: RE: 예일대 극작과 로렌 루먼입니다]

로렌 루먼 교수에게서 새로운 메일이 왔다.

···곧바로 답장이 온 것도 놀라웠지만 그 내용은 더더욱 놀라웠다.

[타당한 지적이네요. 그럼, 그 부분은 만나서 논의하죠.

힐크레스트 고등학교 맞죠?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안 그래도 곧 아이오와시티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할 예정이라···]

···잠깐만, 로렌 루먼이 여기 아이오와시티로 온다고?

“···하아.”

한순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

로렌 루먼에게서 온 메일도 그렇지만, 미스터 케빈에게서 온 메시지도 반가운 소식 그 자체였다.

‘유진 작가님! 네드 작가님! 해즈브로와의 캐릭터 라이선스 계약 논의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사실, 안 그래도 캐릭터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싶어하는 업체가 몇 군데 있기는 했다.

‘마, 맙소사. 토끼 남작을···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겠다고? 그럼 당장 계약해야지, 왜 안 하는데?’

그러나 케빈 클레그도 그렇고, 유진도 그렇고.

지금까지 접촉해온 업체들은 모두 쭉정이 같은 곳이다- 라며 섣불리 계약하지 않았는데.

7월 말에 출간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토끼 남작의 모험>의 판매부수가 어느덧 5만 부에 다다렀을 즈음.

‘무려 해즈브로와 마텔에서 라이선스 제안을···.’

바로 사흘 전,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완구업체 중 두 곳에서 연락이 왔고.

케빈 클레그는 그중 해즈브로와 <토끼 남작> 작가진에게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던 것.

그리고 목요일 저녁, 여느 때처럼 유진의 방에 놀러온 네드는 제 침대인 양 편히 드러누운 채 중얼거렸다.

“나는, 으, 뭐라고 해야 하지···. 약을 해본 적은 없지만, 약을 하면 꼭 이런 기분일 것 같은 느낌?”

둘은 1층에서 들고 올라온 과자와 음료를 먹으며 시시덕거리는 중.

벌게진 얼굴로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는 친구의 모습에 유진이 픽 웃었다.

“왜, 라이선스 계약 때문에?”

“그럼 그게 아니면 뭐겠냐. 내가 그린, 어? 토끼 베니가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진다는데!”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네드.

···언젠가 자신의 캐릭터로 캐릭터 상품을 출시하는 게 위시리스트 목록 중 하나였는데-

“그 꿈이···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빨리 이뤄진 느낌?”

모든 것이 스노우볼 굴러가듯 너무 술술 흘러가는 느낌에 무섭기까지 하다는 말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드, 이 정도로 무서워하지 마.”

“···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벅이는 친구를 보며 씩 웃는다.

“이건 시작에 불과할 거라서.”

“···.”

“<토끼 남작>은 시리즈물이잖아? 아동서 시리즈는 다음 권이 나올 때마다 그 위력이 배가되거든.”

유진의 입에서  <윔피 키드> 시리즈의 사례가 나왔다.

물론 이 시리즈는 1권부터 베스트셀러가 되며 대단한 성공을 기록했지만-

“이후 5권에 이르러서는 1주 만에 3만 부가, 이후 6권에서는 4일 만에 8만 부가 판매됐지.”

“뭐? 4일 만에 8만 부라고?”

“어어. 참고로 말하자면, 이 6권은 초판으로 50만 부를 찍었어.”

“···.”

참고로 그건, 출판 역사상 최다 초판 부수 중 하나였다고.

“아 물론,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아예 논외로 쳐야 하겠지만 말이야, ···네드?”

그러니 이 정도로 너무 흥분하지 말아라- 라는 의미에서 해준 말이었지만.

“우와··· 미쳤네 진짜.”

오히려 네드는 더 놀란 듯,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손에 쥔 과자를 입으로 가져갔고-

“야, 침대에서 먹지 마.”

“···.”

“흘리잖아, 책상으로 와서 먹어.”

과자 부스러기 흘리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유진의 말에, 고분고분 책상 앞으로 와 앉았다.

*

11학년 1학기의 첫 주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금요일 오후.

‘요, 브로! 새 학기의 첫 금요일을 이렇게 그냥 보내버릴 셈이야?’

에이든의 제안으로, 다같이 동네 버거조인트(버거전문점)에서 저녁이나 한 끼 같이 먹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모든 수업과 그 외 활동까지 마친 오후 다섯 시.

“으, 그러게, 시간이 왜케 빨리 가냐. 내 마음은 아직도 방학 중인데··· 오, 유진! 왔구나 브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아이들 사이.

웬일로 카메라 없이 온 에이든을 발견하고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 에이든. ···오늘은 브이로그 안 찍나 봐?”

“아, 말도 마.”

친구의 파티에 가서 술을 진탕 마시고 필름이 끊겨서 돌아온 탓에 부모님에게 압수당했다는 것.

“압수당할 만했네.”

“야, 고등학생이, 어? 술 좀 마셨다고-”

“술 좀 마셨다고가 아니라,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면 안 되지.”

다량의 알코올을 빠른 시간에 섭취할 경우, 급성중독이 올 수도 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폐해들을 하나 하나 언급하자, 에이든의 얼굴이 이내 침울해졌다.

“···알겠어, 앞으로 조심하면 되잖아.”

“그래.”

그때, 옆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에이든 너, 유진이 스콜라스틱 공모전 전국상 받는 거 아냐?”

···그 사이 소문이 다 난 모양이다.

막상 에이든은 스콜라스틱 공모전이 뭔지 잘 모르는 눈치였는데.

“우와아, 미친!”

아이들에게 대강 설명을 듣고 나더니 급격히 흥분해서 외친다.

“아, 내가 오늘 카메라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우리 코리안큐트보이의 대활약을-”

“···찍기만 해봐.”

“크크크, 아 왜, 너 팬도 많은데... 오, 네드, 아델, 이쪽이야!”

때마침 도착한 네드와 아델까지 합류한 뒤.

우리는 각자 버거 주문을 마쳤다.

“그나저나, 에이든 너 10만 구독자 달성했다며?”

“뭐? 진짜?”

“···와, 엄청난걸.”

네드가 꺼낸 말에 나와 아델이 깜짝 놀라자, 엣헴- 하며 민망해하면서도 기분 좋아하는 에이든.

“으흐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와, 미쳤다··· 그럼 실버 버튼도 받는 거?”

“어어, 곧 온다고 연락받았음.”

“크으, 진짜 멋지네. 내 친구가 실버버튼 유튜버라니!”

희희낙락한 채 한참 실버버튼 얘기를 하는데, 이내 채널 이름을 잘 지어서 그런 것 같다는 에이든.

“그거 알아? 요에이든, 이거 요그캐스트 채널 따라서 지은 이름이거든 으흐흐.”

“요그캐스트?”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

친구들 말로는 엄청나게 유명하고 어마어마한 구독자 수를 자랑하는 유튜브 게임채널이란다.

“크크, 내가 이 요그캐스트 팬이거든. 니들, 동양의 성명학이라고 알런지 모르겠는데.”

잘 지은 이름의 중요성을 설파하던 에이든이 나를 돌아본다.

“유진, 너라면 알겠지? 한국인들은 돈 주고 이름을 짓는다며.”

“아, {작명소}라는 게 있긴 하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한국어 그대로 발음하자, 네드가 그대로 따라 말한다.

“{작명소}? 그게 뭔데?”

“음, 에이든 말대로 돈 주고 이름을 지어오는 곳?”

요즘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한국의 나이든 세대는 아이가 태어나면 이 작명소에 가며-

“오, 생년월일이랑 태어난 시간까지 고려해서 이름을 짓는다고?”

“우와, 뭔가 쿨한데.”

“여윽시, 내가 채널 이름을 잘 지어서···.”

에이든이 신나게 유튜브 실버 버튼 이야기를 이어가는 가운데.

‘이름을 따라간다라···.’

나는 문득, 지난주에 꿨던 기이한 꿈이 떠올랐다.

···다름이 아닌, 고서점에서 발견했던 소설의 저자 에곤 언윅에 관한 꿈.

‘에곤, 에곤. 제발··· 눈을 떠봐요.’

그의 약혼녀로 추정되는 여인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했던 말이나 목소리는 그 후에도 한 번씩 내 머릿속을 울리곤 했다.

···그와 함께, 그 꿈속에서 내가 ‘에곤 언윅’으로서 느꼈던 고통 또한.

‘그것도 그렇지만, 그 꿈의 내용 중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기분인데···.’

나도 모르게 생각에 골몰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때.

“유진, 너 표정이 왜 이렇게 심각해?”

아델의 질문에 대꾸하기도 전,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네드.

“작품 고민 중?”

“음, 뭐 그런 건 아니고···.”

뭐라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때.

에이든이 낄낄 웃으며 끼어들었다.

“유진도 이제 봄을 타는 거지.”

“오, 정말?”

“···지금 가을인데?”

“아, 어쨌거나~~ 유진 너도 이제는 좀 그쪽에도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겠냐.”

에이든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난 언제나 관심도 있고, 연애할 생각도 있어. 다만 지금이 그럴 시기가 아닐 뿐이지-”

“브로, 유진은 문학과 결혼했어.”

네드가 내 말을 자르며 끼어들자, 고개를 끄덕이는 아델과 과장되게 호들갑을 떠는 에이든.

“나도 네드 말에 동의.”

“Holy cow(맙소사)!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아주 저희들끼리 신이 났네.

어이가 없어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데.

“근데 유진, 너 뭔가 부쩍 달라 보인다?”

“그러게. 외모가 어른스러워진 느낌? 운동해서 그런가, 체격이 확 커진 것 같아.”

다른 테이블에 앉은 에이든의 친구들 몇몇이 꺼낸 말에 에이든이 나를 돌아보았다.

“흐흐, 그러게. 유진 이 동네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완전 어린애 같았는데-”

“난 나보다 다섯 살은 더 어린 줄 알았어.”

“그건 아델 니가 워낙 노안-

“뭐라고? 에이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에이든과 아델이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나는 여기 처음 왔을 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중학생 때도 다들 초등학생으로 날 보곤 했지.’

키가 좀 늦게 큰 편인데다 -지금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30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나이보다 늘 어려 보이곤 했는데.

나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을 받았다.

“방학 때 운동해서 그런가 봐. 여기서 좀 더 벌크업하고, 머리도 짧게 칠까 생각 중인데-”

“뭐? 벌크업을 한다고?”

“아, 어.”

근육을 늘리고 체구를 키우고 싶다는 말에 아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왜 굳이 그런.”

“그러게, 유진 너 코리안 큐트보이 아냐. 누나 팬들이 아쉬워할 것 같은-”

“누나 팬 없다니까.”

“아아.”

뒤늦게 cute_bookish 사건을 떠올린 네드가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으으, 마초 스타일의 유진이라니···.”

아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때, 네드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너 내일은 주말인데 뭐 하냐? 또 하루 종일 <캐슬> 집필?”

“아, 맘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말을 흐린 내가 슥 웃었다.

“내일은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뭐? 약속? 여자냐 여자?”

“음? 굳이 따지자면 맞기는 한데-”

“오오, 드디어 유진에게 봄이!”

흥분해서 일어나려는 네드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그런 거 아니고.”

나는 폰을 꺼내 네드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중략)···그럼 내일 오후 4시에 인카운터카페 1층에서 봐요.]

로렌 루먼에게서 온 메일을 본 네드가 에이, 하며 아쉬워하는 가운데.

나는 그 반응에 슬며시 웃고 말았다.

‘모르나 보네.’

···내가 내일의 만남을 얼마나 고대해왔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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