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의 사인회(1)
유진은 제게 집중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제 걱정에서 비롯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저희 아버지도 그렇고, 저희 집안에 가족력 같은 게 있더라고요.”
“···.”
“그래서 얼마 전에 아버지가 건강검진을 받으셨는데.”
심각한 건 아니지만, 잘못 방치했다간 위험해질 수 있는 병이었다는 것.
“거참, 미리 발견해서 다행이었구만.”
“그래, 치료하는 건 어렵지 않고?”
“네, 다행히. 완치라기보단 약을 먹으며 꾸준히 관리하는 개념이긴 하지만요.”
두 노교수가 진심으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 그 일로 제가 충격을 받았는지,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에 저걸 놓치고 그냥 지냈더라면.”
지병이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지내다가, 갑자기 아버지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때 나는, 무엇을 제일 후회하게 됐을까.”
“···.”
사실, 그 같은 불안감은 유진이 말한 것처럼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문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회귀 전 유진이 뼈아프게 경험했던 것들이었으니까.
‘아버지의 건강에 진작 신경썼더라면.’
‘평소에 이런 문제에 관해 얘기라도 조금 나눴다면.’
‘아니, 그보다도 내가··· 아버지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더라면.’
기억 깊숙한 곳에 칼로 새긴 듯 새겨진 지독한 후회들.
그 하나 하나를 유진은 지금 이 세 명의 인생 선배들 앞에서 ‘if’의 형태로 고백하는 중이었다.
“그럴 때마다, 음···. 소위 효도라고 해야 하나요? 부모님한테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들이 아쉽게 다가올 것 같은데.”
그래서, 나중의 후회를 줄이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봤다는 것.
“필요한 것, 좋은 것을 사드릴 수도 있고. 아니면 좋은 성적이나 성과를 내서 기쁘게 해드릴 수도 있고··· 수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하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 제일 좋은 건, 같은 공간에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그의 말이 끝난 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 어둑어둑해진 공원.
선선한 밤 공기에 녹음의 향기가 실려오는 가운데, 이따금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러니까 자네는, 아이오와대학에 진학하려는 게···.”
그 고요함을 깨고 스탠리가 입을 열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에서 아버지랑, 케이트랑 막내 동생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함께 식사하고, 소소한 하루 일과를 나누고, 별것 아닌 일들로 즐거워하고···.
“그게 핵심인 것 같아서요.”
“···그래, 결국은 추억이 남는 법이니까.”
노교수가 중얼거린 말에 유진은 대답 대신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내심, 이 속을 알 수 없는 어린 제자의 의중을 늘 궁금해하던 레너드 입장에서는-
‘···.’
제자의 새로운 일면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척 보기에도 그냥 고등학생 같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속이 깊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한편, 온화한 얼굴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헤럴드 그린 교수 또한 이런 생각을 했다.
‘남들은 직선으로 살아온 인생을, 마치 먼 길을 돌아서 온 듯한 청년이구만.’
그래,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나이도, 출신도, 모든 것이 다른 이 네 명의 사내들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순간인지도 몰랐다.
“아, 이것 참.”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스탠리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내, 자네 말을 들으니 클라라한테 연락을 안 할 수가 없겠구먼.”
“···클라라요?”
영문을 몰라하는 유진을 보며, 하하 웃는 해럴드 교수.
“스탠리의 외동딸이네.”
“흐으, 고 녀석이 얼마나 잔소리가 많은지 몰라. ···내가 연락하면 또 왜 이제야 연락하시냐, 요즘 운동은 얼마나 하고 계시냐,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드시냐···.”
온갖 종류의 잔소리를 해댈 텐데, 하며 스탠리는 혀를 찼고.
나머지 사람들이 그런 그를 보며 가만히 미소짓는 가운데.
‘오늘은 진짜로, 클라라 녀석에게 연락을 해야지 안 되겠어.’
아버지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며 유진이 문득 문득 짓던 표정을 보니.
···얼굴만 보면 전혀 닮지 않았지만, 걱정과 애정을 동시에 담은 그 눈빛과 목소리가 자신의 딸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
뉴욕 카네기 홀에서 열린 ‘스콜라스틱 시상식’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비록 고등학생들만이 참가하는, 학생 전용 대회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문화예술 분야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대회의 금메달 수상자가 이곳 아이오와시티 출신이며.
···그것도 무려 <토끼 남작의 모험>을 출간해 화제가 된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은, 지역 신문 기자들의 구미를 당기기 충분한 소재였다.
[힐크레스트 고등학교 11학년 학생이 ‘스콜라스틱 금메달리스트’가 되다!]
[스콜라스틱 금메달리스트가 ‘토끼 남작’의 저자라고?]
[‘스콜라스틱 금메달리스트’ 유진 권에 대해 교장이 말한다 : 개교 이래로 가장 대담한 학생···]
···
그러나 늘 그렇듯, 그 당사자인 권유진은 -이전에 <토끼 남작> 때도 그랬지만- 인터뷰 요청에 절대 응하는 법이 없었으며.
기자들은 아쉬운 대로 힐크레스트 고등학교를 취재하고 그 교장의 인터뷰를 따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유진 본인과 그 가족으로 말하자면-
“사인회 준비요, 그럼요. 곧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뵙겠습니다.”
“우와, 토끼 남작! 베니, 베니를 본대 엄마~”
“그래 그래, 우리 클로이가 제일 신났네. 당신은, 같이 가는 거 괜찮아?”
“그럼 그럼. 직원들한테도 미리 얘기해놨고, 이제 제일 바쁠 때는 지난 상황이라···.”
한 주 앞으로 다가온 <토끼 남작의 모험 2권 : 공룡 왕국으로>의 출간 이벤트에 참석하고자.
온 가족이 캘리포니아 패서디나로 주말 여행을 갈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
10월 셋째 주 주말.
아이오와시티라면 한창 쌀쌀할 때였지만, 패서디나는 제법 선선한 날씨를 자랑한다.
물감을 탄 듯 새파란 하늘 아래 쏟아지는 쨍한 햇살.
기분 좋다 못해 나른하게 느껴지는 가을 풍경 한가운데에서-
“아빠, 빨리 빨리~ 우리 늦었단 말이야~”
차 한 대가 넓은 도로를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이잉, 늦으면 시러, 시러···.”
“얘들아, 좀 조용히.”
카시트를 뒷좌석에 두 대나 장착한 중대형 SUV.
이 차의 목적지는 패서디나 중심부에 자리한 아동서 전문점, 브로먼스 북스토어였다.
“아빠가 열심히 달리고 있잖아, 좀만 기다려.”
운전대를 잡은 아빠의 말에도, 뒷좌석의 아이들은 징징거렸다.
“히익! 벌써 두 시 반이야! 상영회는 이미 시작해버렸쪄···.”
“이잉, 시러, 늦으면 시러···.”
일곱 살짜리 딸과 다섯 살짜리 아들.
두 아이가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처럼 구는 것에 운전석의 아빠가 한숨을 푹 쉬자.
조수석의 엄마가 아이들에게 주의를 준다.
“얘들아, 그만. 아빠 몇 시간째 운전만 하고 계신 거 안 보여? ···그리고 우리가 오늘 늦게 출발한 건, 너희들 때문이잖니.”
아침에 너희가 말도 안 되는 걸로 싸우지 않았어도 늦지 않았다- 라는 엄마의 정확한 지적에.
“···.”
두 아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지금 이 가족은 <토끼 남작의 모험> 2권 출간을 기념하는 출간 이벤트 겸 사인회장으로 달려가는 중.
오로지 이 두 아이가 ‘토끼 남작’을 만나 사인을 받고.
<토끼 남작> 2권을 이 이벤트 현장에서 구입해, 초판 한정 스페셜 굿즈인지 뭔지를 꼭 받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결과였다.
‘잠깐만, 패서디나라고? 거기까지··· 직접 가야 해?’
그리고 그 같은 얘기를 바로 지난 주, 아내와 아이들에게서 들은 아버지는 조금 당황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간만에 휴가 다녀온다고 생각하자고.’
그는 큰맘 먹고 4인 가족이 지낼 숙소까지 근처에 예약한 뒤-
‘너희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이다?’
‘우와아아—’
‘너무 죠아~’
그 같은 조건을 내걸고 온 가족을 데리고 출발했던 것이다.
딱히 막히지도 않았지만, 아침부터 두 아이가 별것도 아닌 일로 싸워대고.
중간에 한두 번 길을 잘못 든 탓에 행사 시각보다 늦게 도착하게 생겼다.
“그래두우··· 상영회, 꼭, 보고 싶었는데···.”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첫째의 말에 엄마가 얼른 대꾸했다.
“괜찮아, 엄마가 찾아보니까, 그거 나중에 상영회 끝나고 토끼 남작 홈페이지에 올라온대.”
“진짜?”
“응, 올라오면 엄마가 꼭 보여줄게 알았지?”
“아랐쪄···.”
그럼에도 상황이 완전히 나아지진 않았다.
첫째는 이따금 상영회 얘길 꺼내며 징징거렸고, 둘째는 늦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내내 훌쩍거리는 중이었으니.
“후우.”
···현장에 도착해야 이 고통이 끝나겠구만.
두 아이의 아버지가 운전대를 붙잡고 있은 지 20분이 더 지났을까.
“···도착했다!”
얼른 주차를 마친 뒤, 그들 가족은 일제히 브로먼스 북스토어로 달려 들어갔다.
“우와아아—”
“너무 죠아—!”
<토끼 남작> 배너와 플래카드, 포스터 따위가 화려하게 붙어 있는 대형 서점.
···이미 그 안은 좋게 말하면 어린이날의 놀이공원 같았고, 나쁘게 나쁘게 말하면-
‘여기가 바로··· 지옥인가?’
그렇다.
아이들로 가득한 지옥을 연상케 하는, 일종의 아수라장이었으니.
“풍선! 풍선이 터졌져, 으앙···.”
“저리 가, 내 차례야아~”
“하나만 더, 더 주세요.”
“솜샤탕, 솜샤탕 떨어졌어, 우아앙-”
강아지 모양 풍선을 만들어주는 광대의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아이들.
서점 바깥에서부터 사들고 들어온 솜사탕이 떨어졌다고 우는 아이.
“비켜~ 비키라고!”
“앙, 얘가 나 밀었어!”
“내 책! 토끼남작 책이 없져···.”
서점 안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술래잡기를 하거나, 그냥 밀치고 다니거나···.
그 외에도 온갖 이유로 생난리를 치는 아이들의 집합소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런 곳에, 내가 숙소까지 예약해가며 내 발로 왔구나···.’
두 아이의 아버지는 일순 머리가 띵해졌지만.
“이히히, 너무 좋다.”
“싱나, 신나~”
그의 딸과 아들은 이런 광경에도 그저 행복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래, 애들이 좋으면 됐지. ···운전하느라 고생했어, 여보.”
“그, 그래. 아니 근데 그나저나, 얘들은 무슨 토끼 남작한테 사인을 받는다는 거야?”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괜히 애들이 실망하는 거 아닌지 몰라.”
사실, 그들 부부는 내심 궁금했던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자 사인회라면··· 저자 본인한테 받는 게 아닌가?’
<토끼 남작의 모험>의 저자가 아무리 ‘베니 르 레푸스’, 그러니까 토끼 남작이라고 써 있기는 해도.
토끼 남작 본인이 이 자리에 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 부부의 의문에,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던 터였다.
‘아냐 아냐, 진짜로 베니가 온다니까.’
‘아빠 베니 아직도 몰라? 베니는 남작이야아~ 전통 있는 가문의~’
‘···너 전통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아무튼! 진짜로 베니가 올 거라고.’
···두 아이는 토끼 남작이 이 자리에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말이 되나 싶어 지금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바로 그때.
-지금부터 토끼 남작 베니의 사인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서점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아이들 사이에서 웅성거림, 아니 소란이 일었다.
“와! 베니! 베니가 나온대!”
“사인~ 나도 사인 받을래~”
“토끼 남작이랑 사진도 찍어야지···.”
쯧쯧, 우리 애들이랑 똑같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부부가 앞을 돌아본 그 순간.
‘···정말로, 토끼 남작이, 나왔네?’
아이들에게 하도 많이 읽어준 탓에, 눈을 감아도 선하게 떠올릴 수 있는 ‘토끼 남작 베니’의 모습.
그 이미지 그대로의 토끼 남작과, 그의 친구인 수탉 버터컵 경, 그리고 안킬로 백작까지-
“끼야아아악——”
“베니! 베니다—!!!!”
“꺄아아아—”
···그렇게 세 명의 인형탈과 인형 옷을 갖춰 입은 일행이, 사인회장 한복판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아이돌 콘서트에 온 것을 방불케 하는 외침, 아니 비명이 온 사방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닭도! 공룡도 있어!”
“안킬로! 안킬로사우르스!”
“꼬리에 곤봉이 달렸어어~”
그들 부부는 이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입을 쩍 벌렸고.
‘아니, 무슨··· 이런 저자 사인회가 다 있어.’
그들의 두 아이는, 그저 베니를 본다는 생각에-
“우와아아~ 토끼 남작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