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의 사인회(2)
*
다시, 그로부터 약 30분 전.
우리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캘리포니아의 명물 아동 서점 브로먼스 북스토어에 와 있는 참이었다.
‘여기서 오늘 출간 이벤트를 한단 말이지.’
오랜 전통의 서점이라는 설명답게 고색창연한 건물 안, 각종 어린이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그 와중에도 어린이의 안전을 배려해 붙여놓은 안전 가드라든가.
아이들이 편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폭신폭신한 쿠션이 온 사방에 구비된 것이 인상적.
그리고 그런 광경에 가장 신나한 것은 당연히도-
“너무 좋아아아~~”
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우리 클로이.
클로이는 이 여행을 꽤 오래전부터 고대했던 터였다.
‘있짜나~ 나, 베니 사인 받으러 간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클로이가 베니의 사인회에 간다는 얘기에 엄청나게 부러워했으며.
‘후후후, 마리사도 간다?’
클로이의 절친 마리사 또한, 아버지가 <토끼 남작> 담당 편집자인 덕분에 사인회에 가게 된 것을 자랑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결국.
‘엄마아~ 나도, 나도 갈래~’
‘왜 우리집은 안 가아~’
‘이이잉, 나도 베니 보고 싶단 말이야···.’
어린이집 아이들이 하원하자마자 왜 우리 집은 안 가냐며 단체로 울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
이에 어린이집 교사들은 클로이와 마리사의 부모에게 연락해 이런 부탁을 했더랬다.
···어린이집의 평화를 위해, 당분간은 베니 얘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생각해보니 좀 죄송스러운걸.’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고충이 십분 이해가 갔으니 말이다.
“아빠, 저거 모야? 저거 저거 볼래!”
“그래, 아빠랑 가보자꾸나.”
아버지가 클로이를 데리고 서점 안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동안.
“세 분은 이쪽으로 오시죠!”
나와 네드, 새어머니는 이 <토끼 남작>의 저자로서 오늘 이벤트의 핵심 역할을 준비하게 되었다.
‘원래는 저자들이 낭독회를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현장에서 읽는 낭독회를 하는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글쎄요, 이 탈을 쓰고 낭독회를 하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편집부의 누군가가 굉장히 일리 있는 의견을 내놓았을 뿐더러.
‘으으, 낭독이라니. 전 못함, 불가능요.’
앞에 나가서 말하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네드가 진저리를 쳤던 탓에, 아이들이 조금 더 좋아할 만한 이벤트로 대체하기로 한 것.
···그것은 바로-
“우와, 동영상 버전이라니.”
바로 <토끼 남작의 모험> 1권의 애니메이션 상영회였다.
말이 좋아 애니메이션이지, 동화책 속의 삽화를 동영상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했는데.
‘스톱모션이라고, 되게 간단하게 영상을 만들 수가 있어서···.’
몇 개 안 되는 이미지를 가지고도 제법 그럴싸한, 짤막한 영상을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설치해둔 스크린과 프로젝터빔을 체크하는 등, 원더테일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상영회를 준비하는 와중.
“···어때요, 괜찮으세요?”
우리 세 사람- 그러니까 나와 네드, 케이트는 <토끼 남작> 캐릭터의 인형탈과 인형옷 착장을 마친 참이었다.
“으음, 시야가 확실히··· 좁긴 하네요.”
“어우, 이거 입고 알바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거지.”
“그래도 덥진 않아서 다행이네.”
안킬로 백작의 옷을 입은 것이 네드.
제일 체구가 작은 버터컵 경의 옷을 입은 새어머니.
그리고 토끼 남작 베니의 옷은 내가 입었다.
···그렇게 우리는 <토끼 남작> 캐릭터가 된 채로 이벤트 현장에 대기하는 중.
“상영회는 10분 이내로 끝날 테니, 잠시만 이 뒤편에서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이내, 상영회가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안 그래도 이미 무대 앞 관객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
“시작, 시작한대!”
아이들 특유의 까르르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대형 스크린 위로 <토끼 남작의 모험> 1권의 동영상이 투사되기 시작했다.
-베니 르 레푸스에겐 누나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애니···.
그리고 그 모습을 우리는 가림막 뒤편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인형탈을 쓴 탓에 시야가 한정된 와중에도.
“베니, 베니가 움직인다!”
“재밌어, 히히.”
“이히히, 동생, 엄청 마나~”
아이들이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어마어마한 소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흐흐, 저거 보고 있으니까, 새로운 꿈이 또 생긴 거 있지?”
네드가 소리 죽여 꺼낸 말에 내가 픽 웃었다.
“무슨 꿈인지 알 것 같은데, 애니메이션화?”
“크, 어떻게 알았냐.”
“척하면 척이지.”
안 그래도 베스트셀러 아동도서들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사례가 꽤 많지 않은가.
처음에는 한두 편 극장용으로 만들었다가, 인기를 끄는 듯하면 아예 시즌제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게,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면 다들 엄청 좋아하겠는걸.”
새어머니 또한 그 같은 기대감을 십분 공유하는 듯했다.
···우리의 <토끼 남작>은 이제 2권이 출간되는 만큼.
아직 본격적인 성공에 들어서기 이전의 단계, 그러니까-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되는, 일종의 기로에 서 있는 셈.’
그리고 잠시 후.
“우와아아—”
“재밌쪄~~”
“이잉 더 보고 싶다···.”
자그마한 손바닥에서 나오는 사랑스러운 박수 소리와 함께 짤막한 상영회가 끝났고.
이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 곧 사인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아이들이 서로를 밀어대며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서점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려던 그때.
-밀지 말고 줄을 서세요. 차례를 지키지 않는 어린이에게는 사인을 해주지 않습니다.
사회자의 단호한 멘트에, 아이들은 금세 차분하게 줄을 잘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대기 중이던 그때.
-어린이 여러분, 토끼 남작 베니와 버터컵 경, 안킬로 백작입니다!
가림막 뒤편에서 우리 셋이 밖으로 나가자.
우와아아—
아이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탄성을 터뜨렸다.
“진짜 토끼 남작이다—!”
“베니, 진짜 베니야!”
“버터컵 아저씨도!”
“우와 그 옆에 공룡도 있다···.”
다들 신이 잔뜩 난 목소리.
이제는 이 답답한 인형탈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기도 했고.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입기 잘했단 생각이 드는걸.’
우리는 편집부에서 준비해놓은 사인용 테이블 뒤편에 착석을 마친 뒤.
줄을 선 차례대로 한 명씩 사인해주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 베니 르 레푸스(Benny Le Lepus)라는 사인을 얼마나 연습했던가.’
제일 먼저 온 것은 뽀글거리는 갈색머리의 대여섯살 짜리 남자아이.
나는 -인형탈을 쓴- 나를 보며 두 눈을 반짝이는 아이에게 책을 받고는 물었다.
“이름이 뭐니?”
“저, 저는··· 조니요.”
“그래, 조니. 만나서 반가워.”
나는 당근 장난감이 붙어 있는 펜으로 책의 면지에 이런 문구를 적었다.
[조니에게, 당근을 많이 먹으렴.
-Benny Le Lepus]
아이들이 읽기 쉽게 일부러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사인을 마치고 돌려주자.
“우, 우와아···.”
감격한 듯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서 가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렇게 사인회를 진행하는 와중 조금 신기한 게 있었다면.
‘아이들만 올 줄 알았는데 성인 독자도 꽤 있네.’
처음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냥 어른 혼자 서 있거나 아예 어른들끼리 함께 온 경우도 제법 되는 듯했다.
지금 내 앞에 선, 30대로 보이는 안경 쓴 남성 또한 조금 민망해하는 기색이긴 했지만-
“안녕, 이름이 뭐야?”
베니 캐릭터를 유지하며 내가 던진 질문에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어어, 난 조셉이야. 이야 베니 너 멋있다.”
“하하, 고마워. 만나서 반가워 조셉.”
조카나 동생을 위해 대신 사인을 받는 건가 했지만 본인 이름을 대는 걸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
‘하지만 뭐 어때.’
어른이라도 얼마든 아동서를 좋아할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
아, 나와 달리 케이트와 네드는 각각 버터컵과 안킬로 백작의 사인을 연습했는데.
‘···줄 서서 사인 받으면, 베니 앞에만 줄을 서려고 할 건데.’
네드가 말했던 대로, 아이들은 대부분 베니의 줄에 서고 다른 둘에게는 잘 서지 않았는데.
‘걱정 마라, 베니한테 받고 나서 그쪽으로도 갈 테니까.’
내가 예상했던 대로, 베니에게서 사인을 받은 아이들은 쪼르르 옆줄로 달려가 섰다.
안킬로 백작과 버터컵 경에게 모두 사인을 받은 뒤, -특히 안킬로 백작은 작은 그림까지 그려줘서 더 좋아했는데- 셋 전부와 사진을 찍고 나서야 만족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당연히도···.
“우와아아··· 진짜 베니다! 베니, 나야 나, 클로이~~”
내가 ‘토끼 남작’의 인형옷 안에 들어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는 클로이와.
“우와우와, 베니, 베니다! 악수, 나랑 악수해.”
마리사 또한 우리 셋을 보고 몹시 기뻐했다.
두 아이는 각자 베니와 버터컵, 안킬로 백작에게 둘러싸여 사진도 찍었는데-
“히히, 베니, 베니랑 사진 찍는다~”
찰칵, 하는 그 순간의 동생 얼굴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쩌면, 클로이에게 또 다른 의미의 생일 선물이 되지 않을까.
*
10월 셋째 주 토요일에 이뤄진 <토끼 남작의 모험 2권: 공룡 왕국으로>의 대대적인 출간 행사.
이날의 사인회는 아동서 역사상 길이 남을 종류의 이벤트였다.
일단, 지난주부터 시작된 2권의 예약 판매 부수는 이미 1만 부를 훌쩍 넘은 상황이었는데.
이에 2권의 초판 부수를 10만 부로 대폭 높여서 잡은 원더테일은 쾌재를 부른 터였다.
출판사 측에서는 이 출간 행사장에 ‘사인회’를 위한 초판을 가져왔는데-
‘오백 명이라니, 이게 말이 돼?’
···최근 몇 년간 현장 이벤트의 참석 인원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 가운데.
2020년대 초 스티븐 킹의 사인회에서나 가능할 법한 인원이 이 <토끼 남작> 행사에 왔다는 소식에, 출판업계는 물론 꽤 많은 언론들이 주목했으며.
저자 세 명이 책 속의 캐릭터들로 분장한 채 ‘인형탈 사인회’를 진행했다는 소식은 뜨거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토끼 남작의 모험> 신간 팬사인회 : 저자 3명이 베니와 버터컵, 안킬로 백작으로 변신하다!]
[토끼 남작의 모험 : 언택트의 시대에 오백 명의 현장 방문객을 끌어모은 책의 비결은?]
[<토끼 남작의 모험> 2권 출간행사 현장 : 어린이 독자들로 발 디딜 틈 없어]
[토끼 남작 베니, 2권에서도 1권의 인기가 계속될 전망···]
···
이처럼 주요 언론들은 물론이고.
굿리즈의 아동서 그룹 게시판을 위시한 아동서 전문 커뮤니티, 그 외의 각종 인터넷 포럼에서도 <토끼 남작> 출간 이벤트는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3.1k 토끼 남작 베니 굿즈 받았다---!]
[베니와 함께 찍은 인증샷.JPG]
[망토를 두르고 당근검을 든 키링 사이즈의 토끼 남작 인형.JPG]
[면지에 ‘조셉에게, 당근은 눈에 좋으니 많이 먹으렴 - 베니 르 레푸스’라고 적힌 2권 사인본.JPG]
└크으 대박이다
└너무너무 귀여워··· 진심 부럽다
└헐 이거 초판 한정판 굿즈 아님?
└으아 사인회 다녀왔구나 대박
└나도··· 나도··· 베니 만나보고 싶어
└저 인형탈 안에는 누가 있을까
└작가가 있겠지ㅋㅋㅋ
└작가가 팬서비스 하느라 고생이 많네
···
그리고 어째서인지.
아동서 커뮤니티뿐이 아니라 SF서브레딧을 비롯, 각종 성인독자들이 상주하는 커뮤니티 게시판에까지 인증샷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마도-
“흐흐흐, 내 팬들이 여기까지 갔나 보구만.”
···유진에게서 갓 배송받은, 따끈따끈한 토끼 남작 키링인형을 받고서 만족스러워하는 랜든 비숍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