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100화 (100/126)

< 오해를 불식시키는 법(1) >

*

“···좋아요, 그럼 곧 보아요.”

탁, 기분 좋게 통화를 마친 로렌 루먼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 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이곳은 뉴욕 시티 센터에 위치한 극장 ‘맨 해튼시어터클럽(MTC)’의 사무용 공간.

500석 이상을 보유한 대형 브로드웨이 극장과 달리, 이곳은  300석 정도를 보유한 ‘오프브로드웨이’ 극장의 전형이다.

말하자면 조금 덜 상업적이며 보다 실험적인 연극을 상연하 기에 최적화된 공간이라는 것.

로렌 루먼은 지금껏 이 MTC 프로덕션과 두 작품을 함께했고,  이번의 또한 이 MTC 프로덕션에서 지휘를 맡기 로 했는데-

“하, 세상에.”

그녀가 통화하는 모양새를 말없이 지켜만 보던 연출가, 릭  그로브가 혀를 찼다.

“로렌 자네가 이러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걸.”

“···이러는 거라뇨?”

“아니 아니, 대체 그 학생이 뭐라고 리허설까지 와달라-”

“그 학생이 아니고.”

연출가의 말을 자른 로렌이 뾰족해진 목소리로 정정한다.

“원작자 님이죠.”

“아 그래, 원작자 님. 어쨌거나 자네는··· 그러니까, 본인 작품 에 대한, 음, 철학이 확고하잖아?”

“고집이 세다- 라는 얘기이신 거죠?”

속내를 읽힌 것에 연출가가 화들짝 놀라면서도 곧바로 고개 를 저었다.

“에이 무슨 그런 소릴. 아니 그냥··· 내 딴에는 신기하게 느껴 져서 그렇지.”

극작가 로렌 루먼.

지금이야 천재 극작가이니 뭐니 추앙받고 있지만, 자신과 함 께 첫 작품 <루나 그래피티>를 했을 때만 해도-

‘전, 절대 바꿀 생각 없어요.’

쌩신인에 불과했던 그녀는, 어마어마한 고집의 소유자였다.

‘여기 이 대사들과, 이 장치가··· 연출님 눈엔 그냥 이유 없이  넣은 것처럼 보이세요?’

그러나 결국, 연출가 릭 그로브는 그녀와 무수히 싸우고 논 의하고 협상해가며-

‘좋아요, 저도 이 선까진 타협할 수 있어요.’

최소한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덕분에 딱 아슬아슬한 선을 지킨 실험극 <루나 그래피티> 는 평단뿐 아니라 대중 관객들에게서도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 내기에 이르렀다.

‘근데, 그 어마어마한 작가주의의 루먼이 가져온 것이···.’

본인의 오리지널 작품이 아니라, 원작이 있는 극본이라는 데 서 첫 번째로 충격을 받았고.

‘으음, 아무래도··· 저 이 작품을 쓴 학생을 만나봐야 할 것 같 아요.’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를 쓴 학생을 보러  가겠다던 루먼이, 만나고 돌아온 후에는-

‘연출님! 저 만나고 왔어요! 원작자 님 만나길 너무 잘했단  생각이···.’

‘그때 이야기 나눈 거 토대로 극본을 수정해봤는데, 한 번 봐 주실래요?’

‘아, 이거 원작자 님이 어떻게 보실지 잘 모르겠네요.’

대체 무슨 조화인지 말끝마다 원작자 님 타령을 하는 것은  물론.

의기가 충만해진 채 극본을 수정해서 들고 왔는데, 그게 또  너무 좋은 것이 아닌가.

···뭐, 좋은 영향을 받은 건 다행이긴 했지만.

‘여전히 신기하단 말이지.’

물론 연출가 릭 그로브 또한 당연히 원작 를 읽 어본 터였다.

그리고 이내, 와- 하고 감탄했으며.

‘이걸··· 진짜로 고등학생이 썼단 말인가?’

이 작품이 고등학생 전용 공모전의 심사작이었다는 사실엔  또 한 번 놀랐으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말하자면 에고가 굉장히 강한 창작 자이잖은가.”

“···.”

“그런 사람이 원작이 있는 극본을 쓴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 게 느껴졌다는 거지, 뭐.”

그리고 물론 그렇게 탄생한 극본 가 너무 좋았 으므로.

어떻게 보면 -대중성이 지나치게 없었던- 두 개의 전작보다 도 더 좋았으므로, 딱히 불만 같은 건 없었다.

“늙은이의 호기심이려니 해.”

“저보다 15살밖에 안 많으시잖아요.”

“이 업계에서 40대 후반이면 늙은이야.”

핏, 소리를 낸 로렌이 씩 웃으며 이내 그가 원했던 답변을 꺼 냈다.

“자꾸 궁금해하시니까 얘기드리는 건데··· 연출님은 아시죠?  제가 고아라는 거.”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라니까, 늘 이런다.”

그러나 저러나.

로렌 루먼은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제가··· 를 읽고 난 후로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게 됐다면, 이해되시겠 어요?”

“···.”

릭 그로브가 말 없이 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는데.

“그리고 심지어,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그때 그 ‘원작자 학생’을 만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 덕분이 었다는 말에, 중년의 연출가는 작게 탄성을 내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리허설에 이 유진이라는 고등학생을 참여 시키겠다는 로렌의 고집을 꺾기를 포기했고.

‘어디 이거, 어떤 학생일지 정말로 궁금해지는구만.’

···그 어린 소설가의 실물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

루먼 교수님과 기분 좋게 통화를 마치고 나자.

“아 맞다, 그리고 나도 좋은 소식 있어! 전에 말했잖아, 에이 전트 만나러 간다고···.”

음반 에이전트와 무사히 계약을 마쳤다는 아델의 말에, 나와  네드는 일제히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오오오오—”

“이야, 죽여준다!”

어머니와 함께 에이전트 서너 명 정도를 만나 봤는데, 아델  어머니의 꼼꼼함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고.

“···그중에 제일 사람도 괜찮아 보이고, 조건도 괜찮았던 에이 전트와 계약했지.”

“잘됐네. 진짜 축하한다.”

“으흐흐, 아델 너 이제 진짜 막 셀럽 되고 그런 거 아냐?”

“아, 벌써부터 넘 띄우지 말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델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어머니가 원하는 것과 본인이 바라는 것 사이에서 늘 고민 이 많았으니까.’

워낙 티를 잘 안 내는 편이라 늘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다녔 지만.

회귀 이전, 그녀가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뒤늦게 들은 나로 서는 저런 모습이 특히나 더 의미 있게 다가왔으니까.

아델은 나와 네드를 동시에 힘껏 껴안고는 품에서 놔주며 외 쳤다.

“후후, 다 너희들 덕분이야! 유진, 미스터 케빈 소개해줘서  너무 고마워.”

“그 정도 가지고 뭐.”

내가 씩 웃자, 네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그래, 유진이야 그렇지만, 나는 딱히 니가 노래 만들고 기타  치는 거에 딱히 도움 준 적도-”

“네드 넌, 늘 내 노래 엄청 열심히 들어주잖아. 여기 이··· 사 운드클라우드에 코멘트 남긴 거 사실은 너 맞지?”

“어? 아, 어떻게 알았냐, 그으게···.”

조금 민망해졌는지 얼굴이 붉어진 네드와, 역시나 비슷한 얼 굴을 하고 있는 아델.

“그냥, 너 덕분에 힘이 많이 났다고.”

“아니 뭐 그렇게 따지면 아델 니가 더···. 내 그림 보고 늘 칭 찬해주고, 뭐 그런 것도 좋았고···.”

···이 분위기는 뭘까.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그 자리에서 없던 사람처럼 슬금슬금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뭐, 가끔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회귀 이전, 내 입장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저 둘 사이에 -특히 대학생이 되고 나서- 서로를 이성으로  의식하는 그런 묘한 기류가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특히나 네드는 한동안 아델을 짝사랑하기도 했고.’

둘이 성격도 잘 맞고, 한때는 쌍방으로 호감을 가진 적도 있 어서 나 또한 저 둘이 잘되기를 바랐던 적도 있지만.

타이밍이 매번 잘 안 맞았다.

‘네드가 한창 열을 올리던 때는 아델한테 만나는 사람이 있 었지.’

그러다 아델에게 조금 그런 마음이 생길 때면, 네드는 작품  구상을 위해 면벽수련에 돌입한다든가 해외 출장을 갈 일이 생 기거나 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

1층 주방으로 내려가 음료와 과자 따위를 챙기며 피식 웃었 다.

···뭐가 됐든, 저 둘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이 흘 러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이내, 그날 밤.

“엄마아~ 나도 오빠 언니랑 티비 보면 안 대?”

“클로이는 자야지. 얼른, 이리 와.”

“···히잉.”

우리와 같이 TV를 보고 싶다는 클로이가 칭얼거리며 케이트 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간 뒤.

“···오오, 시작했다!”

“와, 투나잇쇼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크으, 여기에 비숍 작가님이 나오신다니.”

우리 셋은 거실에 있는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티미  샐먼의 투나잇쇼> 오프닝을 보기 시작했다.

*

그 시각, 캘리포니아 버뱅크에 위치한 어느 대형 방송국 스 튜디오.

테마음악에 관객들의 함성, 박수소리가 섞여 나오는 가운데.

“안녕하십니까, 투나잇쇼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  이곳에 모실 게스트는 바로 <스타라이트 크로니클>의···.”

미국 시청자 대부분에게 익숙한 <투나잇쇼>의 호스트, 티미  샐먼이 유머러스한 말투로 오프닝 코너를 진행한다.

“자! 곧 게스트 인터뷰 코너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때, 랜든 비숍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서 무대 뒤편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이곳도 참 오랜만이군.’

10년 만에 와본 스튜디오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것이 반갑기도, 신기하기도 해 스튜디오 안을 둘러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자, 드디어 모시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과학소설 거 장, 랜든 비숍 작가님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짝짝짝—

관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우레 같은 박수소리를 들으며, 비숍 은 무대 위로 올라갔다.

솜사탕처럼 푹신해 보이는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노작가의  등장에 박수소리가 한층 커지는 가운데.

“와, 랜든 정말 오랜만이에요!”

진행자 티미가 책상 바깥으로 나와 그를 가볍게 포옹하고 놔 줬다.

둘은 이미 10년 전, 이 자리에서 만난 후로 꾸준히 연락을 이 어오는 사이.

“허허, 오랜만입니다 티미.”

이내 진행자 티미 샐먼은 데스크 뒤편에, 랜든 비숍은 그 앞 에 마련된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은 가운데.

“랜든, 여기서 당신을 보는 게 10년 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근황을 나누었고.

이내 화제는 비숍의 출간 예정 신작인 <어둠 속의 방문자들> 1권, <그림자와의 조우>로 흘러갔다.

새 시리즈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출간 예정일이 화면 아래 에 자막으로 뜨는 가운데.

“나의 독자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 <어둠 속의 방문자들> 은···.”

80년대 초, 잡지 <로커스판타지>에 발표해 자신에게 SF작가 로서의 첫 명성을 안겨다준 동명의 단편소설의 세계관을 바탕 으로 한다는 것.

“어어, 저 그 소설 읽어봤어요! 이야, 진짜 기대되는걸요. 거 기다 3부작이라고요?”

일찍이 비숍의 팬으로 유명했던 그답게, 티미 샐먼은 두 눈 을 흥분으로 반짝였다.

“랜든, 제가 당신의 엄청난 팬인건 잘 아시죠? 신작이 나오리 라곤, 그것도 심지어 3부작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과거 이곳에서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던 젊은 시절의 티미를 떠올린 비 숍이 그리운 미소를 지었다.

“하하, 사실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 건···.”

이내, 새로운 시리즈의 탄생 비화가 이어졌는데.

곧이어 노작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진행자의 눈이 커졌다.

“에곤 K!”

“아, 티미도 과학소설팬이니 알지도 모르겠군요.”

“그럼요, 당연히 알죠! 안 그래도 그 정체에 관해 다들 관심 이 많은데.”

화제는 어느새 비숍과 에곤 K의 관계로 흘러갔다.

···<사이언스앤드판타지> 공모전을 통해 만나게 된 거장과,  신인 작가.

그 둘이 주고받은 긍정적인 영향력과, 키워온 우정의 무게에  관하여.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지독한 슬럼프의 그림 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힘주어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진행자 티미가 살짝 붉어진  눈가로 경청하는 가운데.

랜든 비숍 또한 유진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제 소설을 쓰는 내내 작가님의 작품 <어둠 속의 방문자들>  을 떠올렸어요. ···제 소년 시절을 함께해준 작품에 대한 일종의 헌정이라고 할까.’

그리고 그때, 자신의 머릿속을 두드렸던 강렬한 영감과 그로  인한 기분 좋은 격정 또한.

어느새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띤 채로 말을 잇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에서 나의 후배작가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군요.”

그 진심 어린 표현 때문일까.

관객석에 잔잔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비숍은 잠시 생각했 다.

‘지금쯤 유진 군, 그 친구도 이 방송을 보고 있겠지.’

···늘 생각만 할 뿐,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그 고마운 마음이 제 대로 전달되었기를 바라는 한편.

‘그 친구가 부탁한 것도 잊으면 안 되지.’

유진이 스마트폰 너머에서 했던 말도 떠올렸다.

‘처음엔 그저, 고등학생 작가가 주는 이미지가 작품의 독해 를 방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는데···.’

온갖 오해가 눈덩이처럼 커져 에곤 K의 이미지가 어느새 손 녀를 둔 노인으로 굳어져버린 지금.

이 젊은 작가는 후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밝히고 나면 실망  하거나 배신감을 느끼는 팬이 있을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는 충분히 준비가 된 후에, 그러니까-’

자신의 나이나 앳된 외모를 비롯해, 그 무엇도 상관없을 정 도로.

오로지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작가가 된 후에  자신을 드러내겠다는 그 결심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이 늙은이가 보기엔 그 시점이 생각보다 금방 찾아 올 것 같지만.’

비숍은 그 같은 후배 작가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만연하게 퍼진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서는-

‘보다 충격적인, 강렬한 한 방이 필요하다.’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고민하는 노작가의 눈동자가 진심  어린 열의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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