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인 동시에 딸인(3)
*
15분간의 인터미션이 끝나기 직전.
“···.”
유진은 남 몰래 감정을 추스르고 본인의 좌석에 돌아와 앉았다.
눈가가 붉어진 것이 티가 날까 봐 내심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흐어엉, 유진!”
“어디 갔다, 훌쩍, 이제 왔어.”
“흐윽, 흑, 제이든, 얼굴 좀 봐, 눈이 완전···.”
“그러는 너도, 훌쩍, 울고 있으면서···.”
아예 펑펑 울고 있는 제이든과 미아는 물론이고.
“이제 겨우 1막 끝났는데 벌써부터 통곡하면 어떡하냐.”
“근데, 로완, 너도··· 눈이, 빨간데···.”
“···.”
로완과 샬롯도 눈가가 붉어진 채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얘들아, 흐끅, 이제 곧 2막 시작하니까 조용히···.”
담당교사 레너드마저 속으로 감정을 삼켰는지 연신 흐끅거렸으니.
이윽고 인터미션이 끝남과 동시에 극장 안이 어두워졌다.
몇 안 되는 관객 전원이 강렬한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는 가운데.
‘드디어!’
···의 2막이 시작되었다.
무대 오른편, 검푸른 조명이 서서히 밝아진다.
투명한 막 너머에 서 있는 것은 -낡은 원피스 차림이었던 엘라 모건이 아닌-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보다 더 젊은 느낌의 ‘엘라’.
“나의 어머니 데이지는, 내가 열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의 ‘데이지’가, 엘라의 딸이 아닌 어머니였음이 밝혀지는 장면.
소설에서는 강렬한 반전으로 등장했던 이 부분이-
‘일인극인 덕분에 한층 더 큰 효과를 자아내게 되었단 말이지.’
레너드 하인스는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채 고개만 끄덕였다.
실감 넘치는 대사와 독백, 배경음악을 통해, 엘라가 가상현실 속에 AI 어머니를 만들어내게 된 배경이 설명되는 가운데.
‘그렇다면 이 부분은 과연 어떻게 표현할까.’
교사 레너드는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아는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이 2막에선 가상현실 속의 어머니 ‘데이지’와 현실에 존재하는 딸 ‘엘라’가 동시에 등장해야 할 텐데.
‘이걸 대체 1인극으로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하던 순간.
팟- 조명의 색이 푸르게 바뀜과 동시에 무대 위 대도구가 천천히 90도 회전한다.
그러자 방금 전, 무대를 반으로 나누는 역할을 했던 투명한 막이 관객들을 정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거기에 불이 켜지더니-
‘···스크린이었던 건가!’
그 위로 젬마 도노반이 분장한 ‘어머니 데이지’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
몇 안 되는 관객들에게서 숨 죽인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무대 위.
배우, 아니 ‘딸 엘라’는 그 화면을 더듬으며 ‘어린 데이지’로서 말한다.
“엄마, 엄마예요? 나 여기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엄마. 오늘 학교도 잘 다녀왔어요.”
“엄마, 울지 말아요··· 엄마 목소리가 슬퍼요.”
앞서 1막에서 나왔던, 녹음된 ‘어린 데이지’가 했던 그대로의 대사를, 울먹임을 삼키며 다 큰 딸은 하나씩 읊어나간다.
···그것이 저 화면 너머의 어머니, AI 데이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주길 바라며.
“흐윽···.”
저도 모르게 훌쩍임을 삼킨 교사 레너드에 이어 학생들 대부분이 눈물을 애써 참는 가운데.
어느새 2막의 클라이막스 씬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엘라가 가상현실 속의 AI 데이지를 놓아주기로 결심하는 순간이지.’
팟- 무대가 암전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조명이 다시 켜지며 환해졌다.
그러자 ‘AI 데이지’의 모습을 보여주던 스크린은 아까처럼 무대를 반으로 가르는 투명한 막으로 돌아와 있었다.
“···!”
그리고 그 막을 중심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엘라와 데이지- 아니.
‘저건··· 홀로그램?’
배우 젬마 도노반이, 자신의 홀로그램 버전 ‘데이지’를 마주한 채로 대사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
이처럼 모든 이들이 젬마 도노반의 강렬한 연기를 홀린 듯 빠져들어 감상하던 와중.
“엄마, 나는 늘··· 엄마의 마음 속에 살아 있어.”
무대 위의 배우 젬마 도노반.
“데이지. 어머니 당신은 내 마음을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어요···.”
그녀는 극중의 ‘엘라’에 완벽하게 동화돼 있었다.
배우는 사라지고 오로지 캐릭터만이 남은 것.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버린 후였다.
무의식에 가깝게 연기를 이어나가는 가운데.
희미하게 남은 ‘젬마’의 자의식이 이렇게 속삭인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이유인지도 모르지.’
···자신이 이 라는 오프브로드웨이 연극에 출연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 말이다.
엘라 모건이 되어.
데이지 모건이 되어.
서로를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동시에, 결국에는 온전한 애도를 해내는 데 성공하는-
‘어머니와 딸이 되어보고 싶은 욕망 때문.’
이제 고작 20대 후반에 불과했지만.
젬마 도노반의 삶은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에 가까웠다.
대배우의 딸이 아닌, ‘젬마 도노반’이라는 본인의 이름만으로 불리기 위한 처절한 싸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비롯, 수많은 영화제의 주인공으로 불려온 어머니.
대배우 마거릿 도노반은 그녀가 평생토록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그 같은 고민에 매일처럼 시달리던 그때, 대학 시절부터 존경하던 교수 로렌 루먼이 신작을 집필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수님이··· 원작이 있는 극본을 쓰신다고요? 상상이 안 되는데요.’
연출가 릭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로렌 루먼이 어떤 유의 창작자인지 잘 아는 만큼.
처음에는 그저, 순전한 호기심에서 소설 를 읽게 되었다.
‘이걸··· 고등학생이 썼다고요?’
첫째로는 그 사실에 놀랐으며, 둘째로는 그 안에 존재하는 어머니와 딸 사이의 애정을 미묘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낸 것에 놀랐다.
대부분은 이 소설을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극복해나가는 딸’의 심정에 이입해서 보겠지만.
···자신에게 거대하게 드리운, 어머니의 영향력으로부터 늘 독립하길 소망해온 젬마에게는 조금 다르게 읽혔다.
‘딸이 어머니를 진정으로 애도하고 떠나보내는 과정이란.’
어떤 의미로 ‘온전한 독립’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하여 의 주연을 맡게 된 후로, 젬마는 극본이 다 닳을 정도로 연구하고 원작도 수십 번을 정독했다.
···지극히 높은 난이도라고 할 수 있는, 일인극의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스케줄을 전부 스톱시킨 채 이 작품에만 집중한 것은 물론.
매니저가 그녀의 컨디션을 걱정할 정도로 배역에 몰입한 덕분일까.
‘젬마, 이거야. 아주 훌륭해!’
까다롭기로 소문난 연출가 릭마저 탄성을 냈지만, 막상 그녀 자신은 무언가 1퍼센트가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주 작은 퍼즐 조각.
그 하나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던 그때-
‘젬마 배우님, 어머니를 뛰어넘으려하는 것보다는···.’
바로 오늘.
원작자 유진은 이런 말을 했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보려 하는 건 어떨까요?’
그 말을 듣고 난 후에야, 자신은 여전히 이 에 담긴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엘라는 어머니의 상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 또한.
“엄마, 엄마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게.”
무대 위에 있는 이 순간에야.
젬마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았던 기억부터,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까지 전부 다.”
엘라 모건이 어머니의 상실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어머니와 온전히 애도했듯이.
‘어머니와 딸은··· 밀접한 동시에, 복잡한 감정으로 얽힐 수 있는 관계이잖아요.’
···젬마 자신은 내면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
내 안에 있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없듯.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어머니의 영향을 그대로 품은 채.
엄연히 독립된 자기 자신, 젬마 도노반으로서 일어서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한 깨달음을 온전히 담아서.
“그녀를, 내 안의 데이지를.”
젬마는 남은 호흡을 그러모아 마지막 대사를 외쳤다.
“어머니 당신을··· 이제는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 젬마인 동시에 엘라의 목소리가 너른 무대에 에코처럼 울리는 가운데.
짝짝짝—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객석에서, 온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
천천히, ‘엘라 모건’에서 자기 자신, 젬마 도노반으로 돌아오는 가운데.
젬마는 그제야 진짜 독립을 했음을 깨달았다.
*
잠시 후.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대기실로 돌아온 젬마는 거울 속을 가만히 응시했다.
갈비뼈 아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가운데.
거울 속 자신은 여전히 젬마라기보단 엘라 모건에 가까워 보인다.
“···.”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녀의 내면은 방금 전 공연에서 느꼈던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에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나’를 잊은 채 맡은 배역에 완벽하게 녹아든 것이 얼마 만이었을까.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온전하고도 완벽한 충족감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다.
‘엘라 모건’의 삶을 온전하게 살고서 돌아온 기분.
그리고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있다면-
‘앞으로도 이 경험을··· 수없이 더 할 수 있을 거란 것.’
연극 가 얼마나 인기를 끌지에 따라 공연 기간이 달라지겠지만.
젬마 도노반은 관객 앞에서 엘라 모건의 인생을 최소한 수십 번은 더 살 수 있을 터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이 경험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가운데.
‘아무래도 그 친구한테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
원작자 권유진.
그의 몹시도 예리한 충고가 아니었다면, 오늘처럼 공연 도중에 성장하는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에, 연기 수업의 어느 교수님이 그러셨지.”
무릇 연기력이라는 건 대각선 그래프의 형태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고.
‘아주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고 상상해봐라.’
‘그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근육과 체력을 기르는 등,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겠지.’
‘어느 선까진 다음 계단으로 영영 올라가지 못할 것처럼 지지부진하다가···.’
어느 기점을 넘어서는 순간.
어느새 다음 계단 위로 올라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고.
“···그게 바로, 오늘 내가 했던 경험이기도 하고.”
그저 완벽한 기분 속.
젬마 도노반은 전신에 차오르는 희열을 가만히 갈무리했다.
‘엘라 모건’의 연기가 남긴 잔상을 제 안에 완벽하게 받아들인 뒤 대기실을 천천히 나서자.
“···어.”
문 밖에서는 자신의 매니저와, 뜻 밖의 인물 하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 군?”
그녀의 목소리에 반갑게 고개를 드는 유진.
젬마는 매니저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눈짓하고는, 유진을 대기실 안으로 안내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유진이 내민 꽃다발과 커다란 선물 상자에 젬마의 눈이 커졌다.
“오늘이 첫 정식 공연은 아니지만, 그래도 드레스 리허설이니 꼭 꽃을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표정과 말투가, 아무리 봐도 그녀의 팬이라기보단 원작자로서 선물을 주는 느낌이 아닌가.
젬마는 입술 새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와, 정말 상상도 못 했네요. 너무 기뻐요.”
“저도 방금 전 리허설 보고 너무 기뻤어요.”
“···.”
젬마는 한 박자 후에 조심스레 물었다.
“공연··· 어땠어요? 그러니까, 원작자로서 보기에-”
“완벽했어요.”
“···.”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유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극이 진행되면서 젬마 배우님의 엘라 모건이, 점점 더 완벽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고 할까요.”
실시간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는 듯한 감각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는 말에-
“유진 군의 충고 덕분이에요.”
젬마는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