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인 동시에 딸인(4)
젬마 도노반의 말에 유진이 눈을 크게 떴다.
“제 충고라면, 아까 공연 전에 말씀드렸던?”
“맞아요. 그러니까···.”
젬마의 목소리가 한층 차분해졌다.
평소 여간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어째서인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나한테는, 언제나 극복해야만 하는 거대한 관문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기분이거든요.”
이 원작자 학생 앞에서는 그런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놔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유진 군의 조언대로, 오히려 내 안에 있는 어머니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걸 기반 삼아 새로이 ‘나의 것’을 만든다고 생각하니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피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고삐 풀린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왔어요. 아무 생각도, 계산도 없이 내가 그 캐릭터가 된 듯한 기분으로 연기할 수 있었죠. ···고마워요.”
유진은 그 말에 가만히 미소 짓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저도 고맙습니다. 저도, 배우님의 연기 덕분에 이제 한국에 가면 어머니의 무덤에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오랜만에.”
“···!”
몹시도 개인적인 이야기에 젬마는 한순간 깜짝 놀랐지만, 이내 모든 걸 이해해 버렸다.
이 학생이 이런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이유를.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눈동자 안쪽에서 일렁이던 복잡한 감정의 의미를.
“그렇다니 다행··· 아니 영광이네요.”
그 감정이 저에게까지 옮겨오려는 기분에, 젬마는 애써 눈을 깜박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건 뭔가요?”
젬마가 가리킨 것은 낯선 글자가 적힌 상자 패키지.
유진이 꽃다발과 함께 건넨 선물이었다.
“아, 배도라지 주스(즙)예요.”
“배도라지··· 주스요?”
배는 알았지만 도라지란 무엇일까.
의아해하는 그녀를 보며 유진이 간단히 설명했다.
“흔히 풍선꽃(ballon flower)이라고 알려진 건데, 한국에서는 이 풍선꽃의 뿌리 부분을 식용하거든요.”
그 꽃의 뿌리가 바로 도라지이며, 그것이 기관지와 목 건강에 좋다는 것.
“어··· 그렇, 군요.”
“젬마 배우님이 목이 약하신 것 같아서.”
“잠깐,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안 그래도 목이 늘 금방 가는 편인데.”
“음 그러니까, 목소리톤이.”
음색이 허스키한 이들은 성대가 약한 경우가 많다- 라고 유진이 둘러대자 젬마는 납득하는 눈치였다.
‘사실은 회귀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선물을 가져온 거지만.’
까맣게 모르는 젬마는 그저 그 선물을 반가워하며 받아들었고.
“기관지 건강을 위해서는 평소에 따뜻한 물을 자주 드시고.”
“아.”
“특히 목을 많이 쓴 후에는 필수적으로···.”
커피나 차는 기관지를 오히려 자극하니 좋지 않다든가.
귀가한 후에 가글을 해주는 게 좋고, 침구류의 청결과 꾸준한 환기, 비타민 섭취 등···.
기관지 관리 지침을 늘어놓던 유진이 뒤늦게 중얼거렸다.
“아, 또 잔소리를 해버렸네요. 자제하려고 했는데.”
“···.”
그 말에 눈이 동그래진 젬마가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 배우님.”
“푸하하, 너무 웃겨요. 유진 군, 나중에 저희 엄마랑 만나면 말이 잘 통하겠는데요?”
“어··· 어머님이라면.”
대배우 마거릿 도노반이 아닌가.
유진이 눈을 끔벅거리는 와중 젬마가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엄마가 늘 잔소리를 하시거든요. 연기니 스케줄이니 그보다도 니 건강부터 챙기라고, 밥은 제대로 챙겨먹고 다니냐고.”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제일이라고, 좋은 연기도 건강한 몸에서 나오는 거다- 라는 말에 유진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하죠.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생각이 나오고, 건강한 글이 나오는 법.”
그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젬마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올라왔다.
“와, 어쩜 저희 엄마랑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죠? 방금 좀 소름.”
“왜냐면 맞는 말이니까요?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아시거든요, 이미 겪어봤으니까.”
“푸흐흐···.”
젬마는 그로부터 한참을 더 웃어젖혔다.
이렇게 진심을 다해 웃어보는 것이 얼마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
일인극 의 드레스 리허설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다들 이렇게 헤어지긴 아쉽지 않나?”
결과물이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것에 잔뜩 신이 난 연출가 릭이 우리를 집으로 초대했다.
‘아, 저는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너무 아쉽네요.’
진심으로 아쉬워한 배우 젬마 도노반을 제외한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어쩌다 보니 홈파티 비슷한 게 돼버렸다.
“흐으,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하하하! 좋아 좋아, 나도 중서부에 꼭 한 번 가겠네!”
빠르게 술을 들이킨 탓에 조금 취한 레너드 선생님과, 말술인 듯한 연출가 릭은 금방 친해졌다.
한국이었다면 의형제를 맺자고 할 분위기랄까.
그리고 로렌 교수님은-
“유쥐이인~ 내가, 우웅, 대놓고, 말을 못했는뒈에에··· 샤실은, 예일대애··· 왔으면, 조켔어어···.”
맥주 한 잔에 그대로 취해버린 채 혀 짧은 소리로 입학 권유를 했다.
“음, 교수님 일단 물 좀 드시죠.”
“왜 그뤠에, 나 안 취해써어···.”
다행히 고분고분 물을 마신 그녀는 그대로 소파 한구석에서 잠들어버렸고.
내 친구들, 그러니까 제이든과 미아, 로완과 샬롯을 비롯한 문예창작클럽원들은-
“으흐흐흐.”
“키야, 뉴욕의 야경이라니.”
“황홀해···.”
“내가 브로드웨이의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니, 크으.”
알코올 한 방울 안 들어갔는데도 술 마신 것처럼 신나게 잘 놀았다.
···뭐, 즐거워 보이니 상관없지만.
“미스터 레너드.”
“후에에에···.”
나는 반쯤 뻗어버린 레너드 선생님 옆의 연출가 릭을 돌아보았다.
“어, 그게, 억지로 마시게 한 건 아니네만.”
···괜히 찔리는지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중년의 연출가 릭.
“선생님.”
“후우우, 그뤠에, 유쥐이인~ 다 니 덕분이다아아···.”
헤실헤실거리는 레너드 선생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담번엔 이렇게 드시지 마세요, 선생님.”
“너무, 머라고, 하지 마아아아···.”
“주량을 넘는 수준의 알코올 섭취는 구토, 호흡 불규칙, 발착, 의식 불명 등의 중독 증세를 일으킬 수 있다고요.”
“아, 알았다아···.”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내 말에 레너드 선생님이 -시무룩해진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미아가 중얼거렸다.
“근데 말야, 레너드 샘. ···여기 와서 보니까 뭐랄까 은근 하찮은 성격이신-”
“그만, 거기까지.”
나름 엄격하고 진중하기로 유명하던 레너드 선생님의 권위가, 지나치게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
한편 그 시각.
지구 반대편의 대한민국, 출판도시 파주에 위치한 출판사 ‘문학마을’ 사옥.
“흐으, 왜 얼굴을 드러내시지 않는 걸까.”
앞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에 이어 이번 <피터팬>에서도 책임편집을 맡은 정연희 팀장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안 드러내다니, 누가요?”
그 말을 받은 것은 아동1팀의 편집자 김소희 대리.
정연희와는 사수 부사수 관계이기도 한 그녀의 말에 정연희 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에곤 K 작가님 말이야.”
“아아, 선배가 담당하는. 이번에 <피터팬>도 대박 예감이라면서요.”
“으흐흐 그건 그렇지.”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한국판.
예약 출간 이벤트가 걸릴 때부터 이미 4대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한 것에 문학마을이 환호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우리, 내년 서울 도서전에도 참가하잖아. 내년이 ‘영미 문학의 해’라서 영미권 작가들을 대거 초청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그때 맘 같아서는 -어느새 문학마을을 대표하는 스타 작가가 된- 에곤 K를 초청하고 싶지만.
얼굴도, 신상도 드러내지 않는 게 작가의 방침인 만큼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
“흐음, 그러고 보니 내년이 진짜 그렇네요. 우리 아동팀도 초청하면 좋을 텐데.”
“너희 팀은 좀 어때, 저번에 입찰 경쟁 오픈했다는 책은?”
“아아, 안 그래도.”
김소희가 씩 웃으며 자신이 들고 온 샘플책을 꺼내 보여줬다.
[토끼 남작의 모험 2권 : 공룡 왕국으로]
아동서에는 문외한인 정연희 자신이 보기에도, 눈길을 대번에 사로잡는 작화.
“···와, 엄청 화려한데?”
“그쵸? 근데 그림은 이렇게 화려하고 생생한데, 내용은 또 엄청 엉뚱하고 귀여운 거 있죠 후후.”
그 말과 함께 김 대리는 에이전시에 받은 라이츠가이드도 보여주었다.
[켈리장 에이전시| 2024년 하반기]
[<토끼 남작의 모험> 시리즈
1권 레푸스 가문을 벗어난 베니(출간)
2권 공룡 왕국으로(출간)
3권 2025년 중반 출간 예정
베니 르 레푸스
(*각각 글과 그림, 편집 및 디자인을 맡은 유진 권, 네드 밀러, 케이트 권의 공동 필명)
* 미국 아마존 아동서 부문 1위, 최종 1위 달성
* 여섯자릿수 선인세 딜 성사
* 전 세계 4개국 해외 판권 판매
“이 사랑스러운 동화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토끼 남작 베니에게 ‘입덕’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인디북리뷰]
온통 화려하기 그지없는 실적에 정 팀장은 일순 입을 떡 벌렸다.
“이 책, 장난 아니네.”
“그쵸? 괜히 다들 눈독 들이는 게 아니에요. 저희도 엄청 탐내고 있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선인세 경쟁이 박 터질 것 같다고 말하는 동안.
정연희는 라이츠가이드 페이지의 어느 한 부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 잠시만. 이거, 저자가.”
“하하, 베니 르 레푸스래요. 토끼 남작이 직접 쓴-”
“아니 그게 아니고, 여기, 권유진이라고··· 써 있는 거 맞지?”
“어 그런데요.”
그 순간, 정연희는 한참 전 미국의 북콘에서 만났던 권상준 대표의 아들을 떠올렸다.
‘네, 권유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그 태연한 목소리나 자연스러운 제스처가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처럼 보이지 않던 소년.
그와 동시에, 바로 얼마 전 권상준 대표가 보냈던 메일의 한 구절도 떠오른다.
[···하하, 저희 큰아이가 운 좋게 동화책을 출간했는데···]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의 생일선물로 만든 책이 운 좋게 상업 출간까지 하게 됐다, 라는 것.
그의 아들 또한 작가를 목표로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 정연희는 ‘와 정말 잘됐네요 대표님~’이라며 가볍게 답장을 보냈더랬다.
분명,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와, 미친.”
“···선배 갑자기 왜 그래요, 눈빛이 무섭네.”
그래도 혹시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라는 생각에 정연희는 영어로 기사를 검색해보았고.
“와, 소름.”
“아 진짜 왜 그러는데··· 응?”
‘아이오와시티의 두 고등학생이 동생을 위해 만든 동화책이 미국 전역을 강타한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감동 실화’라는.
상당히 긴 제목의 기사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후배에게 그것을 보여주고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선배 말은··· 그, 저희랑 거래하시는 KMC 에이전시 권상준 대표님의 아들이-”
“그래, 이 <토끼 남작> 저자라고.”
“와, 미친. ···선배, 저 소름 돋았어요.”
설명을 다 들은 김소희 대리가 제 팔을 유난스럽게 쓸어내리는 가운데.
‘역시, 보통 고등학생이 아니다 싶었다니까.’
북콘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정연희 팀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권 대표님도 참, 아들 자랑을 할 거면 제대로 하셔야지···.”
언제 한 번 인사차 권상준 대표에게 메일을 보내야겠다, 생각하며 핏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