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깨의 힘을 빼고(2) >
*
5월 중순이 되었는데도 <캐슬>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아니,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는 상황.
티미 샐먼을 필두로 수많은 셀럽들의 SNS에 심심찮게 등장 하는 것은 물론.
[에곤 K <캐슬>, 올해의 최장기 1위작으로 남을 수 있을까]
[<캐슬>, 출간 1개월 만에 종이책, 전자책 도합 75만 부 판 매··· ‘광풍 그 자체’]
[<캐슬>에 러브콜 보내는 영화제작사들··· 과연 행운의 주인 공은 누구?]
···
아마존을 비롯, 수많은 도서판매 플랫폼에서 베스트셀러 1위 의 자리를 공고히 지키는 중이었다.
이처럼 열기가 상당한 시점, 오래전부터 열렬한 관심을 받아 온 <캐슬> 오디오북의 정식 발매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한참 전부터 출시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에곤 K의 팬들, 그리 고 성우 롤랜드의 팬들은 이 반가운 소식에 흥분할 수밖에 없 는 상황.
[30.1k 캐슬 오디오북 방금 다 들음!!!!!]
└미쳤음 그냥 미쳤더라
└ㅇㅇ 마지막 챕터는 진짜 소름
└개좋음 캐릭터가 다 살아 있어
└눈앞에서 영화가 펼쳐지는 기분
└아 캐슬 영화 언제 나오냐
└근데 영화로 만들긴 넘 길지 않나? 최소 3편은 나와야 할 듯
└클라이브랑 라이언 둘이 대화하는 장면 나올 때마다 소름 돋음
└근데 둘 다 롤랜드 목소리라는 거
└ㅋㅋㅋㅋ
···
오디오북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고스란히 완벽한 만족감으 로 이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캐슬>을 귀로 듣는 경험을 한 독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이 작품의 ‘영화화’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재미난 포인트를 꼽아보자면-
└근데 롤랜드 블랙우드는 에곤 K 만났으려나
└아니지 않을까
└왠지 둘이 만나면 잘 맞을 것 같은 느낌
└오 그러고 보니 연령대가 비슷하네
└이제 거기에 비숍을 곁들인
└에곤+롤랜드+비숍?
└ 노인 3인방 모임이냐
└ㅋㅋㅋㅋㅋㅋ
···
바로 그 시각.
“···푸하하.”
매니저와 함께 댓글 반응을 살펴보던 노배우가 웃음을 터뜨 렸다.
“하하, 독자들 반응이 재미나네요.”
“그러게 말일세. 여기 적힌 대로, 언젠가 노인네들 모임을 한 번 마련해봐야겠구만.”
“비숍 작가님과도 친분이 있으셨죠.”
매니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롤랜드.
‘그게··· <듄>의 20주년판 오디오북을 제작할 때였지.’
프랭크 허버트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는 SF 거장, 랜든 비숍 과 안면을 트게 되었고.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1년에 한 번씩은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둥글둥글한 체형, 솜사탕 같은 수염을 지닌 노작가를 떠올리 는 롤랜드의 두 눈이 반짝이던 그때.
“흠, 그런데 말이네.”
원로배우는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둔, 에곤 K의 친필 메시지 카드를 집어 올렸다.
“여기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이가 많은 분 같 진 않단 말이지.”
“많지 않다뇨, 에곤 K 작가님 말입니까?”
“이걸 보게.”
[Dear Roland Blackwood···]
롤랜드 블랙우드 님께, 라는 문구를 짚어 보이며 말을 잇는 다.
“글씨체만 봐도 그렇지 않나? 내 나이대 사람이라면 필기체 를 쓰는 게 보통인데.”
롤랜드 자신만 해도 물 흐르는 듯한 느낌의 필체를 갖고 있 지 않은가.
그 말에 매니저가 눈을 크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펜으로 꾹꾹 눌러서 쓴 에곤 K의 핸드라이팅은 필기체보다 는 깔끔한 인쇄체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글씨체만 보면 확실히 젊은 느낌인데···. 오, 소문자 g를 굉 장히 특이하게 쓰는걸요.”
“그러게. 실제 나이는 30~40대 정도이려나?”
노배우의 말에 매니저가 인터넷에서 돌던 농담을 언급했다.
“뭐, 고등학생이라고?”
“하하, 말도 안 되는 얘기이지만요. 커뮤니티에 누가 그런 글 을 올리자마자 어그로라고 엄청 욕을 먹었다더군요.”
“그럼, 말도 안 되는 얘기이지.”
세차게 고개를 저은 롤랜드는 본인의 목소리로 재현했던 대 사들을 떠올렸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각하? 혹여 겉모습이나 알맹이가 달라진다 해도 그 몸에 흐르는 더러운 피는, 각인된 유전자는 바꿀 수 없는 법이지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규정하는가.’
‘무엇을 해내는지가 나를 규정한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소 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
···라이언에, 파이톤 사제에, 클라이브에 반쯤 빙의한 채로 녹 음했던 텍스트가 여전히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분 속.
‘그런 걸 고등학생이 써낼 수 있을 리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 롤랜드가 다시 한 번 메시지 카드를 읽어 내려갔다.
[롤랜드 블랙우드 님께,
일찍이 <듄>의 20주년 에디션 오디오북을 들었을 때부터 저는 당신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모든 캐릭터에 놀라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배우님의 목소리 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과 같았으니까요.
(···중략···)
이제 제 작품 <캐슬>이 당신의 목소리로 재탄생한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제게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배우 롤랜드 블랙우드의 목소리가 제가 만들어낸 세계와 인 물들을 살아 숨쉬게, 한결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며.
배우님의 기여에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당신의 진실한 팬, Egon K.]
내용을 다시금 눈으로 읽는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깃 들었다.
*
봄날의 오후를 만끽하며 클럽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평일 오 후.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
새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뒤로 떠올려본, <토끼 남작> 3권의 아이디어들을 정리해봐야지 싶어 책상 앞에 앉으려던 그때.
“···와.”
나는 미스터 케빈이 보내온 보고자료를 보고 잠시 입을 다물 지 못했다.
‘누적 75만 부를··· 벌써 넘겼다고?’
이제 고작 1달이 된 시점이 아닌가.
앞선 두 개의 전작들은 이쯤 판매 부수가 10만 부에 한참 못 미쳤음을 떠올려보면···.
“어마어마한걸.”
리암홀트 출판사에서 보내온, <캐슬>의 판매부수도 놀라웠 지만.
“해외판권 옥션, 오픈한 지 이제 겨우 사흘째라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작가님 전작들이 번역 출간된 바 있는 나라 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까지 포함해 총 22개국에서 딜이 진행 중이며.
-그중 영국 같은 경우, 하퍼콜린스에서 7자릿수 선인세딜을 제안하고 나왔습니다.
“···7자릿수라고요?”
영국 한 나라에서만 그 정도 금액을 부르다니.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뿐이 아닙니다 작가님. 독일, 일본, 중국 등 출판시장이 큰 나라들 대부분이 백만 달러 이상의 금액으로 경합을 벌이는 중 이고···.
조만간 국가별 오퍼상황을 정리해 보고할 것이라는 미스터 케빈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시작부터 기세가 너무 좋기에 해외 반응 또한 좋을 거라 예 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그 예상을 기어코 뛰어넘는 느낌이었기 에.
또한.
영상화 판권 문의도 수없이 들어오고 있지만, 그쪽은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진행하자는 것에 우리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후우.”
쏟아지는 좋은 소식들에 마음이 잔뜩 들떴지만.
나는 간만에 붙잡은, <토끼 남작>의 새로운 영감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금 심기일전한 뒤, 노트북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을 정리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대체, 동생 케니는 어디로 간 걸까?’
아니 아니지, 좀 더 질문을 구체화하자면···.
[베니가 동생을 어디에 가서 찾아봐야 이야기가 재미있을까?]
나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해봤다.
일단 1권에서는 집을 뛰쳐 나온 베니가 모험을 떠났다가 황 당한 경험을 하고 돌아오고.
2권에서는 이 과정에서 얻은 의도치 않은 명성 덕분에 안킬 로 백작의 의뢰를 받아 아기 티라노를 구해낸다.
그리고 이제 3권에서는···.
[“나도! 나도 베니 형처럼 모험을 떠날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케니. 모험을 떠나기엔 넌 아직 어 려.”
“세니 누나가 뭘 안다고 그래! 나도 먹을 만큼 나이 먹었거 든!”]
나는 싱긋 웃는 채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화를 그대로 워 드파일에 적어나갔다.
[-베니처럼 유명한 모험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집을 나서는 케니.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이 아니던가.
너무 어린 아이가 진짜로 혼자서 집을 뛰쳐나가는 이야기는 교육상 좋지 않다.
‘클로이가 집을 나가서 혼자 돌아다닌다? 상상만 해도 끔찍 하지.’
···그건 더는 동화가 아니라 공포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니 말이다.
그러니 케니의 연령대를 너무 어린 나이보다는-
“십대 청소년, 정도가 딱 좋겠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이른바 중2병을 심하게 앓을 시기 말 이다.
K가 알파벳에서 중간 정도이니, 더더욱 그 정도가 적절하다.
‘X나 Y, Z로 시작되는 이름의 동생들은 아직 갓난아기 수준 인 거고.’
···그리고 케니의 가출 소식을 베니에게 알려주는 것은-
[셋째와 넷째인 세니(Cennie)와 대니(Dannie).
둘은 베니를 대신해 성을 다스리고 동생을 돌보느라 죽어나 는 상황]
그래.
이 둘은 베니 오빠, 베니 형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매순 간 체감한다.
그래서 베니가 돌아올 때마다 다시 나가지 못하게 어떻게든 애를 써보지만.
‘베니는 그럼에도 기어코 성 밖으로 나가지.’
그런데 이번에 3권에서는, 동생 케니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베니가 직접 찾으러 나가는 것.
“음, 그래도 여전히 독자 입장에서는 케니가 조금 걱정스러 울 수도 있으니.”
케니가 아예 혼자 간 건 아니고···
나는 한 줄을 덧붙였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토끼 성의 충실한 다람쥐 집사가 케니 를 따라 나섰던 것
-집사는 나이가 많지만, 체구도 작고 얼굴도 귀여운 탓에 토 끼 수인의 눈에는 어린애처럼 보임
-그러니 다람쥐 집사를 보호자로 보기보단, 이 둘 모두 남들 눈에는 어린 소동물로 보일 것]
···
상황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만큼, 베니는 하루 빨리 동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 일단 여기까지 흐름은 재밌네.’
그렇게 떠오른 것들을 차례로 모두 정리해놓았다.
늘 그렇듯, 모든 아이디어에는 일종의 ‘숙성 기간’이 필요할 뿐더러.
이렇게 만들어낸 이야기의 핵심 줄기에 붙일 만한 가지들, 즉 이런 저런 디테일들은 억지로 짜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산책을 하다가, 혹은 샤워기의 물 줄기를 맞다가.’
생각지도 않은 순간.
팟- 하고 떠오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나머지는 조금 천천히 생각해봐야지, 그런 마음으로 파일의 저장을 마치고 닫으려던 순간.
“···아.”
방금 전 언급했듯 반짝, 하고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 다.
다만 이건 <토끼 남작>의 작중 내용에 관련된 것이 아니었 는데.
‘동생들 캐릭터를 활용한··· 워크북은 어떨까.’
전에 네드가 알파벳 왕국 얘기를 꺼내며 그런 말을 하지 않 았던가.
아예 베니 캐릭터로 학습용 워크북을 내보는 것은 어떻냐고.
그런데 이번에 3권에서 베니의 동생을 등장시킬 생각을 하 다 보니 자연스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것.
탁, 타다닥-
나는 얼른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토끼 남작> 3권 파일 끄트 머리에다 메모했다.
[-토끼 남작 알파벳 학습용 워크북은 어떨까?
-저연령 어린이 독자 대상
-각 알파벳을 따서 이름을 지은 여러 동생들의 일러스트가 등장하는 것이 핵심!]
그래, 동생들 캐릭터를 활용하는 게 바로 핵심이지.
그렇게 정리를 마친 그때, 한 가지 사실이 뒤늦게 생각났다.
“아.”
그건 바로, 이 프로젝트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네드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동생들을 하나 하나씩 다 구분해서 그려야 하잖아?’
그것도 스물여섯 마리의 캐릭터를, 토끼로만 한정해서 말이 다.
···솔직히 나라면 자신이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