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깨의 힘을 빼고(3) >
*
“크크, 재밌는데?”
그주 주말.
우리 집에 점심을 먹으러 온 네드는 <토끼 남작의 모험> 3 권 아이디어를 듣고 낄낄거렸다.
“그래?”
“어어, 생각만 해도 재밌잖아? 알파벳순으로 쭉 서 있는 동생 들이라니, 크크.”
“···.”
마냥 즐거운 얼굴로 낄낄거리는 네드를 보다가.
나는 슬그머니 새로운 제안을 입에 담았다.
“이거 말고도 아이디어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네 의견이 제 일 중요해.”
“뭔데?”
잠시 후.
베니 동생 캐릭터를 메인으로 하는 알파벳 학습 워크북에 관 한 설명을 들은 네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 이거 완전 좋은데?”
“아이디어야 좋지. 근데-”
“어 잠깐만, 오!”
이제야 상황을 깨달은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우리, 워크북 말고. 아예 캐릭터 상품까지 내는 건 어때? 누 나랑 동생들까지 해서 총 26마리니까··· 우리 진짜 떼돈 버는 거 아니냐, 크크크.”
“음.”
“아니 아니지, 동생이 더 태어났다고 했으니까 신규 캐릭터 도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 추가할 수 있는 거고.”
···자본주의의 화신이 되어 벌개진 두 눈으로 열심히 아이디 어를 쏟아내는 네드를 지켜보다가.
나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되짚어줬다.
“네드 너, 잘 그릴 자신 있지?”
“어? 잠깐만, 그렇네? 그러니까 이거···.”
멍하니 반문한 네드의 눈이 한 박자 후에야 커졌다.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말을 잇는 네드.
“그, 각각의 알파벳에 해당하는 26마리를··· 전부 다 그려야 한다는 거지?”
앞서 <토끼 남작> 1권에 잠깐 등장했던, 여러 동생들이 한 페이지에 등장했던 씬과는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
각 알파벳에 해당하는 토끼 캐릭터 하나 하나씩을, 저마다 개성이 살아 넘치게 -무엇보다도 서로 구분이 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니까.
“응.”
“야, 유진. 너 지금 나 보고 그냥 죽으라고-”
“참고로, 학습서 시장은 아동서 시장과는 완전히 다른 거 알 지?”
“···.”
‘소장’이 목적인 일반 아동도서와 달리, 학습용 워크북은 일 종의 소모재나 마찬가지이다.
클로이도 자주 그러지만, 특히 저연령대 어린이들은 이런 워 크북을 거의 낙서장처럼 활용하니 말이다.
“유통망 자체도 좀 달라. 일반 서점에도 들어가긴 하지만, 교 재용 총판 쪽에서도 같이 팔리는 만큼.”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정말로 연금처럼 꾸준히 수익이 난다는 설명에 네드가 살짝 움찔한 순간, 나는 기세를 몰아 녀석을 더 몰아붙였다.
“그뿐이 아냐. 아까 니가 말한 대로, 캐릭터 상품까지 개발한 다?”
뭐 이거야 해즈브로 측이랑 논의해봐야 알겠지만, 척 봐도 분위기가 좋은 걸 보면 호의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나.
“그러면 뭐, 앞으로의 생활비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씩 상기되기 시작하는 네드의 얼굴을 보던 내가 덧붙였 다.
“차.”
“차···?”
“집에서 통학하든 기숙사에서 살든, 대학 가면 차가 필요하 지 않겠어?”
“그으렇···지.”
수없이 흔들리는 녀석의 눈동자를 보며 쐐기를 박았다.
“무슨 차를 살지 고민하면서 그려보면, 26마리의 캐릭터야 금방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처음만 해도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던 네드였지만.
“좋아 좋아, 자본주의의 힘으로 이겨내보지!”
···이제는 투지로 두 눈을 빛냈다.
그렇게 대화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을 때.
똑똑-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 렸다.
“오빠들~ 엄마가 좀 이따 내려오래애~”
그것은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들이민 클로이.
한 살 더 먹더니 요즘 들어 키가 부쩍 자랐다.
“클로이 왔어?”
“웅, 엄마가 팬케익 굽고 이쪄.”
“오,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난다 했더니.”
“둘이 무슨 얘기해애?”
자연스레 침대에 올라와 내 옆에 앉은 동생을 돌아보며 대답 했다.
“베니 얘기하고 있었지.”
베니라는 단어에 눈을 반짝이며 묻는 클로이.
“진짜? 3권 맞지? 3권은 무슨 얘기야? 전에 오빠가 들려줬던 거?”
“아 그건 아니고.”
동생의 말대로, 사실 내게는 예전에 클로이에게 들려줬던 이 야기들이 제법 있다.
그것들을 3권에서 활용하는 방안도 사실 생각해봤지만-
‘이미 1권과 2권에서 진행된 내용이 있다 보니.’
클로이에게 들려줬던 것과는 방향이 조금 달라진 상황.
그러니 그 이야기들은 잘 정리해뒀다가 나중에 외전처럼 활 용하고, 3권에서는 일종의 메인스토리를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내, 내가 구상해둔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들려주자-
“우와, 재밌게따아~ 그럼 동생도 모험을 떠난 거야?”
“응, 그렇지.”
“나도, 나도 모험 떠나고 시퍼.”
“그건 안 되는데.”
“왜 안 돼?”
“클로이는 아직 어린이잖아.”
내 말에 뾰로통하니 입술을 내미는 클로이.
“언제부터 모험할 수 있어? 언니가 되면 할 수 있어?”
“언니?”
“응응, 선생님이 그랬어~ 큰 언니 오빠가 되면 뭐든 할 수 있 다고.”
그 말에 나와 네드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질문을 던지는 네드.
“빨리 크고 싶어요 우리 클로이?”
“응, 얼른 어른되고 시퍼!”
“흐흐, 어린애들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고 싶어 하는 걸까. 뭐,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지만.”
네드가 낄낄거리며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가 불쑥 말했다.
“그러게. ···지금 와 돌이켜보면 어릴 때야말로 다시는 돌아오 지 않을 좋은 시절인데.”
그러자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유진, 너 방금 그 말 너무 아재 같은-”
“나도! 나도 얼른 오빠처럼 커지고 싶어~”
어이없어하며 네드가 꺼낸 말을 클로이가 시기적절하게 자 르더니.
“근데 말야 오빠, 토끼 남작 3권에서 말야~”
베니가 엄청 걱정할 것 같다, 라고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응? 걱정한다고?”
“동생을 잃어버렸쟈나. 나도, 나도 전에 베니 잃어버리고 엄 청 걱정해쪄.”
그 말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예전 기억.
클로이가 네 살 때였나, 갓난아기 때부터 안고 자던 베니 인 형이 없어져서 한참을 찾은 적이 있다.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지.’
없어지면 안 된다고 눈물을 줄줄 쏟으며 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 요기··· 있네?’
클로이가 유치원 가서 갖고 놀겠다고 가방 속에 넣어놓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게 아닌가.
“그래, 너 그때 유치원 가방에 넣어놓고 깜박 잊었지.”
“헤헤, 마쟈.”
“아구 귀여워.”
“아 진짜! 볼 당기지 마 네드 오빠아~”
네드가 동생의 통통한 볼을 당기며 좋아하던 그때.
‘그래, 그것도 재밌겠네. 가방 속에 들어 있었던 베니 인형처 럼···.’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아이디어에, 나 또한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갔다.
*
아이오와시티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원더테일 빌딩의 2층 미팅룸.
오늘의 미팅 상대를 기다리는 한편, <토끼 남작의 모험> 담 당 편집자 대니얼 앤더슨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설마, 저자 쪽에서 그런 아이디어를 내줄 줄은 생각도 못했 는데 말이지.’
<토끼 남작>의 글작가 권유진은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오전 이 되자마자 그에게 연락을 해왔는데.
‘···알파벳 학습용 워크북이라고? 그거 너무 좋은 생각이구나!’
유진이 내놓은 아이디어가 너무도 마음에 쏙 든 나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동용 학습서 부서 쪽에 연락해 그쪽 담당자와 미팅을 잡은 터였다.
그리고 잠시 후.
“어서 오시죠.”
대니얼은 미팅룸에 들어선 학습서 담당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야, 이거 <토끼 남작> 워크북이라니. 생각만 해도 벌써 기대가 되는데요?”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학습서 담당 부서 쪽에서도 이번 제안 을 매우 반기는 상황.
덕분에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흐흐, 알파벳 학습서 내는 김에 아예 숫자 공부나 그 외의 시리즈도 함께 기획하는 건 어떨까요?”
학습서 담당자가 신이 나서 꺼낸 말에 대니얼은 난색을 표했 다.
“으음, 그 부분은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알파 벳 학습서는 다른 것보다도 <토끼 남작>의 기본 캐릭터 컨셉 에 잘 맞아서 진행하는 거라서.”
그가 유진의 이번 제안을 반겼던 가장 큰 이유.
그것은 이 워크북이, <토끼 남작> 캐릭터의 매력을 떨어뜨 리거나 단순 소비해버리는 아이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베니와 그 동생들 캐릭터의 매력을 강화해주는 편에 가깝겠지.’
사실, 이제 막 신규 캐릭터가 정립돼가는 상황에서 이런 유 의 2차 상품화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를 꼽자면.
‘노출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탓에, 캐릭터의 매력이 반감되 고 식상해지는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베니의 형제 자매들로 알파벳 26글자를 소개하는 이 워크북 은, 기존의 <토끼 남작> 독자들에게 하나의 선물처럼 느껴지 지 않을까?
그 사실을 확인해보고자.
이 자리에 오기 전, 대니얼 앤더슨은 본인의 딸 마리사와 이 런 대화를 나눈 바 있다.
‘음, 마리사. 너 알파벳 공부 싫다고 했지?’
‘웅, 재미없쪄. 따라쓰기만 하는 거 싫단 말이야~’
‘그럼 말이야, 만약에···.’
이내 제 아빠가 들려준 설명에 마리사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진짜? 베니 동생들? 완전 재밌겠다~’
‘그래? 그러면 마리사는, 알파벳 공부 열심히 할 것 같아?’
‘당연하지이!’
···그래.
우리 마리사처럼 연필을 잡고 하는 공부라면 질색하는 아이 도, <토끼 남작> 캐릭터로는 좀 더 재밌게 배울 수 있지 않을 까?
게다가.
“저희 학습서 쪽 유통망이 상당한 거 잘 아시죠? 기존의 <토 끼 남작> 독자들도 워크북을 사보겠지만···.”
오히려 이 워크북을 통해 <토끼 남작> 책으로 유입되는 독 자도 상당하지 않겠냐, 라는 학습서 담당자의 설명.
“하하,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셈이로군요.”
대니얼은 기분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
<캐슬>의 오디오북 발매로 인터넷이 한창 난리가 난 지 조 금 후에야 나는 오디오북을 듣게 되었는데.
한동안은 <토끼 남작> 신작 구상에 집중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친.”
그리고 첫 문단을 듣자마자 감탄하고 말았다.
-성은 살아 있었다. 그것은 주민 모두가 공유하는, 돌처럼 단 단하고도 강력한 믿음이었다···.
헤드셋에서 내 귓전으로 흘러들어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일 순 숨이 턱 막혔으니.
아주 오래된 친구가 내 이야기를 본인의 목소리로 다시금 들 려주는 듯한 기분 속, 아니-
-성 요하임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신 의 소명을 부여받기 마련이라고.
책 속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내게 직접 말을 건네는 듯한 기 분 좋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본인의 곡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을 지켜보는 작곡가의 심정 이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둠에 휩싸여 있던 고성. 오래된 태 피스트리와 비밀문, 숨겨진 패널과 통로, 비밀 도서관···.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만들어낸 <캐슬>의 세상 속, 롤랜드 블랙우드가 펼친 마법에 사로잡힌 팬이 된 채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
그로부터 2주가 흘러 어느덧 6월 첫 주.
우리 가족은 다같이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도착했다.
“우와아아~~~ 뱅기! 비행기야!!”
새어머니는 오늘을 위해 -주로 클로이를 위한- 만반의 준비 를 마친 상황.
“간식도 종류별로 챙겨왔고, 빨대컵에 물도 담아왔고··· 또 뭐 있지?”
“비염 스프레이랑 사탕은요?”
“어어, 가져왔어.”
기내 공기가 워낙 건조하니, 코의 건조함을 막기 위한 스프 레이.
비행기 이착륙시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탕 과 카라멜은 물론이고.
‘애들은 지루한 걸 못 견디니.’
클로이가 좋아하는 <마샤와 곰>을 비롯, 다양한 어린이용 동영상을 태블릿에 저장해왔으며.
어린이책, 색칠공부, 색종이, 그 외에 자잘한 놀잇감도 빠짐 없이 가져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는 기내에 착석했다.
“베니, 이것 봐봐~~ 구름이야 구름! 솜사탕 같지?”
제일 중요한 거라며 챙겨온 베니를, 클로이는 기내에까지 데 리고 탔다.
참고로 이 베니는 <토끼 남작> 캐릭터 상품이 아니다.
클로이가 아기 때부터 안고 잔 탓에, 손때가 잔뜩 묻어 꼬질 꼬질한 진짜 베니.
“히히히, 하늘을 날아가~”
베니에게 창 밖을 구경시켜주겠다며 한동안 신이 나 있더니.
끝없이 이어지는 구름의 풍경이 조금 지겨워진 듯한 클로이 가 나를 돌아보았다.
“오빠.”
“응?”
“있짜나, 할아부지가 나도 좋아하실까?”
“···.”
···안 그래도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댁에 다 같이 들르기로 한 터.
한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클로이 보면 엄청 귀여워하실걸?”
“진짜 진짜?”
“그럼.”
우리 외할아버지와 클로이는 피 한 방울 섞인 사이이긴 하지 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세상에 우리 클로이를 귀여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어.”
세상 어떤 사람도 클로이의 앞에서는 무장 해제가 될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남도 아니고, 우리 외할아버지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 겠나.
“···.”
단호하게 말하는 내 옆얼굴을, 어쩐지 케이트가 묘한 눈빛으 로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지는 가운데.
클로이가 헤실헤실 웃으며 좋아한다.
“에헤헤, 그런가?”
“···커흠.”
그때,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새어머니가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클로이 버릇이 안 좋아질 것 같은데···.”
하지만 이건 지극히 논리적인 추론에 따른 결론일 뿐인걸.
나는 케이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