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옹달샘으로
솔직히 말하면 방금 전까지 의심했었다.
아무런 장비 없이 흙바닥에 앉아 먹을 갈다니.
21세기라고 사기도 이렇게 대놓고 치는 건가 싶었다.
안돼. 내 50만 원.
정확히는 497200원이 허공으로 흩어진 건가 절망에 빠지려는 순간.
우우웅.
덕문의 손에서 연초록색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빛이 보이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탁.
붓을 집어 든 덕문이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슥!
그냥 그리고 있다는 단어로는 부족한 현란한 손놀림.
내가 저렇게 휘둘렀으면 사방팔방으로 먹물이 튀며 개판이 났을 텐데.
도화지에선 구룡산으로 보이는 산을 기점으로 복잡한 길이 그려지고 있었다.
와우.
그야말로 신들린 붓질.
제대로 그리고 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신뢰도가 떡상하게 만드는 그림 실력이었다.
펄럭펄럭.
덕문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햇빛에 노출되고 있는 덕문이 덥지 않도록 열심히 부채질을 하는 것.
어르신 파이팅!
그렇게 부채질을 하는 팔이 아파오려는 찰나.
“후우!”
완성된 건지 덕문이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놨다.
“?”
뭐하고 있냐는 듯 바짝 붙어 있는 날 바라보는 덕문.
열심히 부채질 중이었습니다.
“크흠!”
이제 그만 절로 꺼지라는 신호를 보내며 덕문이 도화지를 내밀었다.
“내가 개방한 능력은 위치한 산의 길을 그리는 것. 요즘 시대에 돈이 안되는 능력이지.”
돈은 안되지만 내게는 무척이나 필요했던 능력.
제대로 찾아온 듯했다.
음.
덕문이 내민 도화지를 살폈다.
모르겠는데?
길 같은 게 그려져 있긴 한데 까막눈이라 그런지 아무리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윽.
산의 중앙을 짚는 덕문.
“나도 그리면서 안 건대 이 산, 좀 특이하군.”
“특이하다뇨?”
“지금 선으로 그려져 있는 것들이 전부 길이네. 수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수로일 걸세. 물이 흐르지 않았다면 이미 다 막혔을 거거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덕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길이라고 말한 선은 정말 많았다.
산의 중심을 시작으로 윗쪽을 제외하곤 사방으로 뻗어있는 수로.
“특이한 건 바로 이곳이야.”
덕문이 그림의 정중앙, 모든 물길이 시작되는 곳을 짚었다.
그림에서도 새까맣게 칠해져 있는 부분이었다.
“구룡산의 중앙인데, 커다란 공간이 있어.”
여기다.
덕문의 말을 들으며 확신이 들었다.
청룡의 비늘에서 봤던 동굴이었다.
“보통은 산 중앙에 이런 공간이 있을 수가 없거든. 무언가 가득 차 있지 않은 이상 말이야.”
“가령 물이라던가…?”
“그렇지.”
슥슥.
덕문이 여분의 도화지에 또 하나의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통의 산은 이런 모습이야. 이건 지하수가 지나다니는 길이고.”
구룡산과 달리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채워진 중앙.
빈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건 지하수가 다니는 좁디좁은 길들 뿐이었다.
다시 구룡산의 중앙으로 손을 올린 덕문이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게 대다수의 경우에 불가능하거든. 특히 구룡산의 경우는 위에서 이 중앙 공간으로 향하는 물길이 하나도 없잖아.”
당연한 말이지만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렇기에 보통의 산에 흐르는 지하수는 하늘에서 내린 비가 고여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룡산은 달랐다.
가운데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 향하는 물길은 제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지하수가 스며들 수 없는 공간이란 이야기다.
그런데도 공간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불가능한 상황에 덕문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알 것 같았다.
애초에 물의 시작은 용이었다.
물을 떠나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허허벌판의 고지.
그곳에서 물을 발생시켰던 건 하늘에서 떨어진 용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용에게서 솟아오른 물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면 이 공간 역시 설명이 가능했다.
“수로의 크기는 어떤가요?”
크기에 따라 선의 두께를 달리 해놓은 듯했지만 내가 알아보기는 무리가 있었다.
슥.
공간으로 향하는 길 중 가장 두꺼운 곳으로 덕문이 손을 올렸다.
“여기가 가장 넓은 길이야. 이 정도면 사람 너댓 명은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크기지.”
덕문이 짚은 길을 역으로 따라가 보았다.
산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였다.
“여긴 어딜까요?”
“아마 산속에 있는 작은 옹달샘 정도 되겠군. 공간까지의 거리는 음… 3km 정도 되겠군.”
3km라.
일반적인 길이었다면 별거 아닌 거리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하는 길은 물길.
물속에서 3km를 나아가야 했다.
심해 공포증인데.
사실 진짜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어두컴컴한 심해 사진을 보면 움츠러들었기에 공포증이라 예상만 해볼 뿐이었다.
설명을 마친 덕문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진짜 여기로 갈 생각인가?”
솔직히 말하면 안 가고 싶다.
왜냐하면.
무서우니까!
몸의 행동이 제약되는 물속에서 3km을 가야 한다니.
거기다 가던 중간에 문제가 생긴다면?
익사 확정.
사방이 막혀 있는 물길이기에 빠져나갈 길도 없었다.
“요즘 익서터림 스포츤가 뭔가 유행한다고 하더니. 목숨 귀한 줄 알아야 하네.”
어르신, 저도 익스트림 스포츠 안 좋아합니다.
걱정해주는 덕문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크흠! 뭐 더 말리지는 않겠네. 자네 목숨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럼.”
슥.
덕문이 손을 내밀었다.
잔금을 달라는 강력한 수신호였다.
하지만, 지금 줄 순 없다.
크럭커 처치 포상금이 들어오기 전까진 난 빈털터리니까.
“잔금은 갔다 온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뭐?”
인상을 팍 찡그렸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난 필요한 걸 전부 얻은 상황.
거래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었다.
“제대로 그려주신 건지는 실제로 가봐야 아니까요. 저 50만 원 떼먹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이유가 논리적으로 들려서일까.
끄응 소리를 내던 덕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기 치면 재미없을 줄 아시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한번 덕문을 안심시킨 뒤 도화지를 챙겼다.
옹달샘, 딱 기다려라!
* * *
띵동.
“어서 오세요!”
덕문의 지리소와는 달리 반갑게 맞이해주는 가게의 사장님.
사장님에게 쾌활하게 인사를 한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찾으시는 거 있나요?”
“저… 잠수 용품 좀 사려고 하는데요.”
찾아온 곳은 스킨 스쿠버 가게.
잠수할 때 필요한 각종 장비를 파는 곳이다.
안전 제일!
맨몸으로 3km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순 없었다.
내 최대 잠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100m도 못 가고 숨이 바닥날 터.
“이쪽으로 오세요.”
“저 혹시 보여 주시기 전에 잔액 확인 좀 할 수 있을까요?”
은행은 아니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대부분의 가게에는 존재했다.
지문 인식을 통해 계좌 잔고와 입금 내역을 확인하는 기계가 말이다.
“아 예, 여기에 손가락 올려 주세요.”
삐릭.
지문이 인식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국가님!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부디 포상금이 들어와 있기를.
내가 국가에 실망하지 않도록 빠르게 처리해줬기를.
띠링.
기계의 맑은 벨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맑은 소리에 잔고가 0원이면 킹 받을 거 같은데.
!?
걱정이 무색하게 선명히 찍혀있는 내역.
입금자: 헌터 중앙처
B급 데몬 크럭커 처치에 대한 포상금.
올라간 동영상의 후원금은 입금까지 2-3일 소요됨.
위의 설명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이것.
[잔고: 10,000,000.]
홀리….
예상외였다.
천만 원이라니.
크럭커가 낮은 등급의 데몬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거 한 마리 잡았다고 천만 원이라니.
다들 헌터 헌터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있었구만.
헌터. 싸릉한다.
유물관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직업 만족도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스윽.
잔고가 뜨기 전까지 쭈그려져 있던 어깨가 펴졌다.
펴졌다 뿐이겠는가.
몇 센치 차이겠지만 하늘을 향해 잔뜩 솟아올랐다.
“흠흠.”
작은 헛기침을 한 후, 여유로운 얼굴로 주인 아저씨를 응시했다.
난 더 이상 0원일지도 모르는 잔고를 걱정하던 쭈글이가 아니다.
!?
그리고, 달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잔고를 확인하겠다는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었던 주인 아저씨.
장사도 안 되는데 왠 거지가 왔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랬던 아저씨가.
방긋!
지금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띄우며 두 손을 비벼대고 있었다.
“뭘 찾으신다구요, 손님? 말씀만 하시죠. 지금 없더라도 어떻게든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잠수한 상태로 3km 정도를 가야 해서요.”
“잠수한 채로 쭉 3km나요? 빡세게 하시는 분이군요.”
아마 익스트림 스포츠 하드코어 유저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벅.
진열대로 간 아저씨가 이것저것 장비를 집어 들기 시작했다.
“계속 잠수를 하셔야 하니 슈트랑 오리발, 물안경, 산소통은 기본으로 필요할 거 같고요.”
산소통 하나를 가리킨 아저씨가 고개를 돌렸다.
“이거 하나면 3시간 정도 갑니다. 3km 정도 가시면 음… 두 개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그럼 네 개 주세요.”
“네?”
안전 제일!
충분만으론 부족하다.
만에 만에 만에 하나의 상황까지 고려해서 충분한 산소통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숨이 막혀 고통스럽게 죽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끄덕.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 알겠습니다.”
아저씨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잠시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물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도 부탁드립니다!”
* * *
“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신나는 쇼핑 시간을 마무리 한 뒤 두세 시간 만에 돌아온 구룡산 입구.
묵직.
등에 매달려 있는 배낭과 손에 달린 휴대용 구르마를 바라봤다.
- 짐이 많아서 구르마가 필요하실 거 같은데요.
구르마라니.
군대에서 사용했던 게 떠올라 망설여졌지만,
짜잔.
아저씨가 끌고 온 구르마는 내가 상상하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기술의 발전을 체감하게 만드는 최첨단 구르마.
끌고 다니기 편하게 손잡이까지 슈퍼 개량된 모습이었다.
철컥.
어깨에 걸려 있는 화기를 바라봤다.
스킨 스쿠버 가게에서 총이라니.
직접 사놓고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개방으로 인한 능력자가 속출하고 헌터란 직업까지 성행해버린 한국.
고심 끝에 국가는 화기 소지 및 판매 금지법을 풀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막아봐야 관련 능력자들이 암시장에서 무기를 만들어 팔아댔기에, 그럴 바엔 관리가 가능한 수면 위에서 판매하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좋았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
고개를 들어 구룡산 입구를 바라봤다.
1차 목적지는 공간까지 이어지는 옹달샘.
가자, 옹달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