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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20화 (20/473)

20화. 그림 그리는 노인

“돈이요?”

노골적인 노인의 요구.

무릇 친한 사이에도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돈 이야기인데.

순간이지만 당황하고 말았다.

“없으면 가던 길 계속 가시고.”

노인이 가라며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생긴 거만 봐선 속세의 굴레를 벗어던진 도인의 느낌인데 돈이라니.

쉽지 않은 할아버지야.

손님이 왕이다! 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은 없었지만, 감안하고서라도 무척이나 불친절한 주인장이었다.

리뷰를 남길 수만 있다면 별점 0.1점을 남기고 싶은 가게.

물론 여기서 0.1점은 등록을 위한 최소한의 별점이다.

“돈 드리면 제가 원하는 거 그려 주실 수 있는 건가요?”

슈퍼 불친절한 가게.

에라이 똥 밟았네 하고 나가면 되는 일이지만, 어째서일까.

끌린다.

저 말도 안 되는 자신감.

돈만 주면 그대가 원하는 걸 당장에 줄 수 있다는 표정.

서비스는 최악이지만 너무 맛있어 발길이 향하게 되는 맛집 느낌이었다.

“구룡산? 두 시간이면 다 그려 줄 수 있지.”

“얼마 드리면 되나요?”

보통의 가게는 공급자가 수요자를 원하는 상황인데 지금은 반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아쉬운 건 나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용을 찾아 구룡산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저 높디높은 산을 곡괭이로 다 파헤칠 수도 없는 일.

길이 필요했다.

“정확히 원하는 게 뭔가?”

“물길이 필요합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용이 있던 공간을 제외하곤 오랜 시간 토지가 쌓아 올려지며 산이 되어버린 상태.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물길이라면?

용의 추락했을 때부터 계속해서 흐른 물길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 용이 떨어져 죽은 자리에 물이 생기면서 양재천이 됐다고 해요!

용도 떨어졌는데 양재천이라고 불가능하란 법은 없었다.

실제로 용을 중심으로 나온 물이 양재천을 만든 거라면, 토지가 쌓이는 와중에도 용에게서 발생한 물이 계속 흘렀다면.

그 물길은 여전히 열려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려 주실 수 있나요?”

다시 한번 노인에게 질문을 건넸다.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 끌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확신이 서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이름 있는 산들에 비하면 큰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산은 산.

노인이 내가 모르는 최첨단 탐사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산속에 숨겨져 있는 물길을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말했잖은가, 두 시간이면 그린다고.”

“좋습니다. 얼마 드리면 되나요?”

한 10만 원이면….

“100만 원.”

뭐?

입술을 안 깨물었다면 나이 많은 노인에게 반말이 튀어나갈 뻔했다.

100만 원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비싸다 생각하면 그대로 나가면 되는 일.”

내 놀란 얼굴 때문일까.

혀를 찬 노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꼭 필요하다면 찾는 이가 있을 테니.”

마지막 말도 잊지 않는 노인.

꼭 필요한 사람.

나였다.

물길이 아니면 들어갈 방법이 막막한 상황.

할아버지, 사기꾼 아니죠?

아니지.

저 정도 연기의 사기꾼이라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불하겠습니다.”

돈이라곤 일시불 카드에 남은 50만원 뿐이지만.

오늘 저녁도 사먹고 찜질방 비도 내야 하는 돈이지만.

일단 뱉고 본다.

“호오?”

“대신.”

손가락을 펼쳐 내밀어 보였다.

“선금 50만 원, 결과물 확인 후에 나머지 50만 원! 전 아직 사장님을 믿을 수 없으니까요.”

날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노인.

고민하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수다.”

얼떨결에 사기를 쳐버렸다.

50만원 밖에 없는데 100만원짜리 계약을 하다니.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뱉은 말은 아니었다.

크럭커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변종이니 50만 원은 들어오겠지란 판단.

노인의 내밀어진 손으로 내 피 같은 선불 카드를 건넸다.

나름 아껴 쓰던 건데 이렇게 한 방에 사라져 버리다니.

노인이 받아 간 카드를 기계로 넣었다.

삐빅.

“?”

노인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날 돌아봤다.

왜… 왜 저러지.

조심스럽게 다가가 내려다본 기계.

# 잔액: 497,200.

의심할 만하군.

100만 원을 내겠다고 한 놈이 50만 원밖에 없으니.

그마저도 온전치 않은 50만 원.

“제가 50만원도 없을 거 같습니까? 잔금 치를 때 2800원 더 드릴 테니 일단 그거 받으시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노인이 결제 버튼을 클릭했다.

휴, 뻥카 성공.

휙.

결제를 마치기 무섭게 노인이 카드를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목숨을 다 한 선불 카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스윽.

!?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난 모든 지리를 그릴 수 있는 지리소의 주인, 덕문이라네.”

“배… 백운입니다.”

“음! 좋은 이름이구만.”

70% 반말에서 100% 완전한 반말로 바뀌었지만.

입금 전의 모습에 비하면 덕문은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역시 돈이야.

새삼스레 돈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입금 전과 후의 모습이 이렇게 다르다니.

“그런데 구룡산의 물길은 왜 필요한 건가? 대답하기 힘들다면 안 해도 되네.”

“산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어서요.”

“산의 안쪽?”

원래라면 말하지 않았겠지만, 검증이 필요했다.

내가 세운 가설이 현실화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 말이다.

“어르신은 풍수나 지리에 전문가이실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길을 통해 산의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거.”

“미친 짓이지.”

!?

덕문이 망설임 없이 답변을 했다.

이럴 수가. 역시 허무맹랑한 가설이었단 말인가.

“미친 짓인데 불가능한 건 아닐세.”

오?

좌절하려는 순간 덕문의 희망 섞인 말이 들려왔다.

“물론 조건이 필요하지. 가려는 공간까지 물길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어야 하고, 사람이 통과할만한 크기여야 한다는 점.”

대부분의 산에는 지하수가 흐른다.

흐르지만, 그건 물이 흐를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

덕문의 말대로 구룡산의 물길이 내가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인지가 중요했다.

“어르신이 그리는 그림에서 그것도 알 수 있나요?”

“당연하지.”

주섬주섬 책상에서 도구를 챙기는 덕문.

특별하다고 할 만한 도구는 아니었다.

커다란 도화지와 먹물, 그리고 그림을 그릴 붓까지.

진짜 사기꾼 아닌가.

도구를 보니 다시 한번 의심이 올라왔지만, 어쨌든 돈은 이미 건넸으니.

믿어보기로 한다.

“나가지, 나라고 이 자리에서 바로 그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 * *

백운이 덕문과 구룡산으로 향하고 있는 시각, 한튜브 사이트를 관리하는 부서.

모니터링 하던 부서의 직원, 이한솔이 고개를 돌렸다.

“서… 선배님, 터졌는데요.”

“뭐!? 서버 터졌다고?”

“아뇨, 동영상요. 이거 좀 보세요.”

“깜짝 놀랐잖아, 임마. 주어 좀 뺴먹지마.”

부서의 선임 도민철이 투덜거리며 이한솔에게 다가갔다.

“무기왕? 뭐야 이 촌스러운 닉네임은.”

제일 먼저 닉네임을 확인한 도민철이 영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조회수.

“뭐야 이거.”

조회수: 10만.

유명 헌터들에 비하면 놀랄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하며 많은 영상을 올렸거나, 이미 이름이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는 헌터였다.

처음 올라온 동영상의 경우 조회수 1000 정도만 나와도 준수한 수치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10만이라니?

꿀꺽.

동영상을 튼 도민철이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폈다.

변종 미믹 크럭커에게 유한이란 팀장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

# 아뇨, 전 저분이 죽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아무리 말리셔도 전 갈 겁니다.

무기왕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영웅이다.

@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의인이야

@ 오지네요…. 너무 멋있네요.

그리고 크럭커와 무기왕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 와작!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크럭커의 입질 소리.

동영상을 보는 이마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생생한 소리였다.

@ 나였으면 포기했음.

@ 저도 이미 삶 포기했을 듯요.

저렇게 무서울 바엔 죽음을 택하겠다는 네티즌들의 댓글.

동영상을 보던 도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회수가 왜 터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현장에 있다고 느낄 정도의 긴박감과 생생한 리얼리티.

이것이 경쟁력이 되는 이유는 뻔했다.

‘그놈이 그놈이니까.’

이미 유명한 헌터들의 동영상 주제는 통일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했다.

사이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데몬을 썰어 보는 사람에게 시원한 청량감과 대리만족을 주는 것.

사이다는 호불호 없이 대부분의 네티즌이 좋아했기에 헌터들 역시 이런 니즈에 맞춰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이건 진짜 리얼인데….”

거기다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동영상 업로드를 목적으로 일부러 데몬을 찾아가 사냥하며 촬영하는 타 헌터들의 영상과 달리, 무기왕의 영상은 순도 100% 리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동영상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는 무기왕의 호흡과 쫓기고 있다는 공포감.

다른 동영상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 두두두두두두!

@ 어! 이거 개미굴 그 남자 아님?

@ 기자들 피해 도망갔던 남자? 맞는 거 같은데.

동영상의 조회수가 급속도로 퍼지는 이유는 알파 요인도 있었다.

며칠 전 전국구 방송을 타며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개미굴의 남자.

그 남자가 무기왕이었다.

어느덧 동영상의 마지막 부분.

# 아가리 벌려.

# 철컥.

# 탄 들어간다.

@ 미쳤다.

@ 와.

@ 바지 갈아입으러 갑니다.

@ 저도 갑니다.

그리고 완벽한 마무리 대사까지.

누군가 볼 걸 의식하고 뱉은 인위적인 대사와는 와닿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선배, 어떡하죠?”

“뭘 어떡해.”

동영상을 확인한 도민철이 몸을 일으켰다.

“당장 방송사로 연락해, 개미굴의 남자가 국가 소속 헌터라고.”

“네!”

후다닥 달려나가는 이한솔을 보며 도민철이 강한 확신을 느꼈다.

무기왕.

“이건 터진다.”

* * *

택시에서 덕문과 함께 내린 구룡산 입구.

입구엔 노란색 줄로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아마 어제의 사건을 수습하는 중인 듯했다.

“어쩌죠? 못 들어가는 거 같은데요.”

구룡산으로 가자는 덕문의 요청에 따라 왔는데 출입 금지라니.

덕문에게 그림을 받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상관없네.”

“!?”

산에 들어갈 수 없음에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는 덕문.

그대로 풀썩 바닥에 앉은 덕문이 가져온 도구들을 풀기 시작했다.

땅바닥에서 뭐하시려는 거지?

커다란 받침대 위에 도화지를 올려놓은 뒤 먹을 갈기 시작한 덕문.

탁.

필요한 만큼 다 갈았는지 먹에서 손을 뗀 덕문이 눈을 감았다.

가부좌를 틀고 편하게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는 덕문.

우우우웅.

!?

덕문의 손에서 초록색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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