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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7화 (37/473)

37화. 죽음의 경계에서

후웅.

눈앞으로 피렌조의 왼팔이 날아들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며 빙글빙글 피를 뿌려대는 녀석의 왼팔.

…!

왼팔에 들려있던 단검이 없었다.

쐐엑!

왼팔이 위로 비껴가고 그 뒤에 숨겨뒀던 단검이 얼굴 앞으로 날아들었다.

크!

빠르게 몸을 젖혔지만 이마를 베고 지나간 피렌조의 단검.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나왔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캉!

어느새 다가온 피렌조가 단검을 휘둘렀다.

부적의 기억에서 봤던 것보단 느린 건 확실했지만.

쇄엑.

그래도 너무 빠르다.

내가 그 단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니 느려진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빠른데 도윤이 받아냈던 건 대체 얼마나 빠르단 걸까.

챙! 챙! 쾅!

한 손임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단검을 휘둘러대는 피렌조.

힘은 부족하지 않다.

다행인 점은 피렌조의 파워 자체가 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기괴하게 꺾이며 날아드는 단검의 다채로운 궤도와 저 속도, 그리고….

스륵.

저 짐승 같은 반사신경이었다.

이건 유효타라고 확신하며 휘둘러지는 면도칼을 쳐다보지도 않고 피해내는 말도 안 되는 감각.

피렌조는 항상 간발의 차로 피해내고 있었지만, 그걸 보면서도 아깝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극한의 효율.

내 면도칼이 위협적이고 빨라서 간발의 차로 피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딱 필요한 정도로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정도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도 피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행동하는 것.

“디버프는 걸었어요! 조금만 있으면 느려질 거예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시간은 나의 편이란 소리.

지금도 받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긴장을 늦출 순 없지만 그렇다고 못 받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충분히 면도칼의 속도와 반응으로 따라갈 수 있는 수준.

이대로 받아내며 시간을 보내면 유연경의 능력으로 피렌조는 느려질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자.

* * *

캉! 캉! 캉! 캉!

어째서!

카앙!

어째서 안 느려지는 거야!

푸확.

왼쪽 어깨로 피렌조의 단검이 박혀 들었다.

“끄아….”

더럽게 아프다.

후웅.

휘둘러지는 면도칼을 피해 피렌조가 거리를 벌렸다.

“키킥!”

유연경이 능력으로 슬로우를 건지 10분.

시간이 지날수록 느려질 거란 기대와 달리, 오히려 피렌조는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당황한 건 능력을 사용한 유연경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능력이 들어갔음에도 적이 느려지긴커녕 더욱 빨라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살짝 절망스럽네.

이 싸움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 탕! 탕!

- 돌이여!

싸움의 초반까지는 틈을 보며 원거리에서 지원 공격을 날려줬던 헌터들.

지금은 그 지원 공격마저 나와 피렌조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사실상 유연경의 디버프를 제외하곤 피렌조와 나의 일 대 일 싸움이 된 셈.

돌아오고 있는 건가.

왜 빨라지는지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유연경의 능력은 제대로 통하고 있지만, 피렌조의 몸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며 유연경의 능력을 웃도는 것.

느려지는 속도보다 빨라지는 속도가 더 큰 것이었다.

상체 반쪽이 날아갔는데도 저런 여유라니… 끔찍하네.

감각이 돌아왔다는 걸 알아서일까.

피렌조 역시 처음보다 더 여유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후우…!”

피렌조의 여유와 반비례해 내 몸엔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조금씩 피렌조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고 그 여파로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의 쓰라림이 내 행동에 더 제약을 걸고 있었다.

다쳐본 적이 없구나.

새삼스럽게 깨닫고 말았다.

크럭커를 피해 달리다 한두 군데 긁히긴 했지만, 처음 만난 데몬인 하운드를 시작으로 상처라고 할 만한 걸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대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며 실제로 부상을 당한 건 지금이 처음인 셈.

그래서인 것 같다.

몸이 낯선 상처의 고통에 반응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너무 쓰라렸고 이런 상처가 더 생기는 걸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

“키릭!”

잠시 여유를 즐기던 피렌조가 다시 쇄도해 들어왔다.

핏!

간발의 차로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

대체… 어떻게 휘두르는 거냐…!

오른쪽으로 휘둘러지는 단검.

단검을 피했다 생각하는 순간 여지없이 옆구리로 단검이 파고들었다.

기억을 통해 봤기에 알고는 있었다.

피렌조의 관절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이며 사각지대를 파고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푹!

다시 한번 왼쪽 어깨를 파고드는 단검.

알고 있는 거랑 직접 마주 보며 싸우는 건 천지 차이였다.

피렌조의 단검은 왼쪽인가 싶으면 오른쪽으로 날아들었고, 위인가 싶으면 아래에서 턱을 찔러 들어왔다.

면도칼이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다.

그나마 잭 더 리퍼의 반응속도 덕에 어찌어찌 치명상은 피하고 있었다.

공격을 해야 되는데….

카앙!

해야 되는데….

캉! 캉! 캉!

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할 틈이 주어 지지 않았다.

녀석의 단검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지?

왼쪽인가, 아니면 속이는 척 하면서 오른쪽?

다시 눈앞에 단검이 나타날 때까지 머릿속을 괴롭히는 끝 없는 질문이었다.

사악.

!!

다시 한번 시야에서 사라지는 피렌조의 단검.

어디냐…!

굽어져 있는 녀석의 관절을 따라 눈을 돌렸다.

아무리 관절을 꺾는다 한들 찌르고 들어올 곳은 오른쪽.

…!

관절을 따라 도달한 피렌조의 손끝.

없다.

없었다.

저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할 단검이.

그럼 단검은 어디….

쐐에엑.

아….

입에 단검을 물고 있는 피렌조.

피렌조의 머리가 내 목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스아아아아.

찰나의 순간.

몸으로 낯선 감각이 몰려들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죽음.

정확히는 느낄 일이 없었던 감각.

죽음이란 감각이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스걱.

단검의 날카로운 날이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주 찰나지만 알 수 있었다.

베였다.

단검이 지나가고 광산으로 짧은, 아주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

“배… 백운 님…?”

“으… 으어….”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을 뒤로 하고.

푸화아악!

목에서 터져 나온 피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 * *

끈적.

…?

손끝으로 불쾌한 끈적임이 느껴졌다.

이 느낌, 어디선가.

“오랜만이군.”

낯설지 않은 감각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쇠를 갈아 넣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

회귀한 뒤 처음으로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잭 더 리퍼.

천천히 눈을 뜨니 그 공간이었다.

잭 더 리퍼와 처음으로 만났던, 사방이 끈적이는 피와 피비린내로 뒤덮여 있는 장소.

여전히 시뻘겋네.

장소 뿐 만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피로 도색을 해놓은 잭 더 리퍼.

새빨간 피 속에서 보이는 건 잭의 하얀 눈동자와 이빨 뿐이었다.

“어떠냐, 죽은 소감은.”

“….”

다시 한번 느끼지만 역시 미친놈이다.

죽은 사람한테 죽은 소감을 묻다니.

그나저나, 나 죽은 건가.

“저 죽은 건가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잭이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을 예정이지. 모가지를 베였으니 아마… 과다출혈일 거고.”

참 무덤덤한 인간이다.

위로는 못 해줄망정 저렇게 사인을 읊고 있다니.

“다시 한번 묻지, 죽음의 소감은?”

진짜 미친놈이지만.

대답해주기로 한다.

어차피 죽었는데.

음…. 그런데 난 지금 어떤 소감일까.

죽으면 엄청 억울하고 슬플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 기분이다.

이 기분은 억울보다는 오히려….

“무섭네요.”

무서웠다.

“뭐가 무섭지? 너 뒤에 있던 헌터들이 앞으로 죽을 거라서? 밖에 있는 민간인들이 학살 당할까봐?”

“… 아뇨.”

역시 난 히어로가 되기엔 틀린 것 같다.

보통 영화나 만화에서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라며 각성하곤 하는데.

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여기서 끝이라는 게 무섭네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불변의 법칙인데 뭐가 무섭다는 거지?”

“끝…. 이번엔 제가 정할 생각이었거든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나왔다.

“그 근처도 가지 못했는데 이렇게 끝난다는 게 무섭네요.”

씨익.

무슨 의도로 물어본 걸까.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인지 잭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그려 보였다.

“피는 충분히 모였다.”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뭘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데몬을 베면 벨수록 면도칼에 무언가 쌓여 가는 듯했던 감각.

단순히 경험치 같은 거겠지 했는데 피가 쌓이는 거였나.

“하지만 넌 은연중에 거부하고 있더군.”

거부하다니?

“미치광이 연쇄 살인마의 광기를 받아들이는 걸 말이야.”

…!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오래되진 않은 듯하다.

면도칼을 사용해 데몬을 베어낼 때마다 몸 깊숙이 파고들려는 무언가를 느꼈었다.

그때마다 묘한 불쾌감이 느껴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면도칼을 해제해버렸었다.

“죽는 순간마저 무서운 그 끝이란 거, 안 만나게 해줄 수 있다면 어찌 하겠느냐.”

이러려고 물어봤구만.

처음 하운드에게 몰려 잭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 살기 위해서 그 칼을 잡은 거냐? 무고한 100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 그 면도칼을?

“당신의 광기를 받아들이면 살려주겠단 건가요?”

“살려주겠다… 는 좀 맞지 않는 거 같군.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거다.”

스윽.

가까이 피투성이 얼굴을 가져다 대는 잭.

“네가 면도칼을 통해 사용하는 힘이 온전히 나의 힘이라 생각하나?”

“…?”

당연히 나한테 이런 힘은 없었으니 잭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고개를 몇 번 저은 잭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난 살아있을 때 이 정도로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유명한 연쇄 살인마라 해도 결국엔 인간이었으니까.”

나도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반응속도와 감각.

잭은 인간인데도 어떻게 이런 힘을 낼 수 있었던 걸까.

“내가 너의 무기이기에, 네가 나의 사용자이기에.”

!!

어째서일까.

명쾌한 대답이 아닌데도 잭이 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내 무기가 잭 더 리퍼였기에, 내가 무기왕이었기에 모든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

내가 알아들은 듯 하자 잭이 멈췄던 말을 이어갔다.

“다시 한번 묻지. 끝을 안 만나게 해주마.”

스윽.

잭이 피로 물든 손을 내밀었다.

“잡겠느냐.”

“… 대가는요?”

씨이익!!

잭의 입이 좌우로 넓게 찢어졌다.

기대돼서 미치겠다는 웃음이었다.

“더 많은 피를, 더 맛있는 피를 뿌리게 해다오!!”

역시… 미쳤다.

스윽.

그리고, 나도 살 수만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덥썩.

미칠 예정이다.

* * *

탕! 탕! 탕!

“오… 오지마!!”

“으아아!”

사람들의 통하지 않는 발악과 절규가 들려왔다.

비척.

그런 사람들의 공포를 즐기며 걸어가고 있는 녀석의 발소리도 들렸다.

….

[잭 더 리퍼 - 동기화]

꿀렁.

목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을 적셨던 피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간에서 봤던 잭 더 리퍼의 모습처럼 조금씩 내 몸을 물들이는 붉은 피.

두근!!

동시에 온몸을 짜릿하게 만드는 감각이 퍼져나갔다.

죽이고 싶다.

“피렌조.”

멈칫.

누운 상태에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아 멈춘 듯하다.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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