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다음은
“!”
가져가라는 스님의 말에 수리검에 손을 뻗었었다.
서서히 사라지며 모습을 감춘 수리검.
왜 공간으로 안 들어가지지?
다른 무기들과 달리 수리검과의 공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수리검이 조용히 무기고 안으로 들어왔을 뿐이었다.
설마 그 봉인에 집어 삼켜져서 그런가.
어째서 공명이 일어나지 않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추측해볼 수 있는 건 봉인으로 집어 삼켜지는 도윤을 보며 본능적으로 느껴졌던 기운이었다.
영혼의 소멸.
도윤과 다른 이들의 죽음은 달랐다.
도윤은 그냥 몸이 죽는 게 아닌 영혼 자체가 갈기갈기 소멸 되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공명에 필요한 공간을 형성하는데는 영혼이 필요하다… 인가.
그래서 영혼 자체가 소멸해버린 도윤에 대해선 공명이 발생하지 않은 듯했다.
주인 없는 무기라.
낯선 기분이었다.
주인을 잃은 채 그저 덩그러니 놓여 있던 무기라니.
“절 따라오시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옆에 서 있던 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눈앞에서 수리검이 사라지는 걸 봤음에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스님.
스님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지만 만물의 이치에 통달한 듯한 모습이었다.
저벅.
앞서가는 스님을 따라 어두컴컴한 통로를 거닐었다.
작은 촛불에 의해 밝혀져 있는 통로.
잘 보이지 않았기에 무서울 법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무서움보단 경건함이 더 느껴지는 통로였다.
끼익.
통로를 벗어나자 작은 생활 공간이 나타났다.
스님이 지내는 곳인 듯 했다.
“잠시 앉으시지요. 차를 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이 가리킨 방석에 앉은 뒤 방을 둘러봤다.
은은한 향 냄새와 함께 놓여 있는 작은 불상.
와.
얼마나 오랫동안 절을 올려야 앞이 저렇게 파일 수 있는 걸까.
불상 앞의 방바닥은 딱 사람이 서 있을 공간 정도만 자연스럽게 패여 있었다.
그 외에는 평범하네.
살아가는데 딱 필요한 정도만 놓여 있는 안락한 공간이었다.
딸각.
어느새 차를 내온 스님이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스님이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엉겁결에 두 사람이 불상을 바라보며 앉아 있게 되었다.
“저 스님, 조금 전에 자격이 있단 건 무슨 의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걸어오는 내내 궁금했었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자격은 무엇을 뜻하는 건지 말이다.
“이곳 사찰의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허허 웃어 보인 스님이 서랍에서 작은 그림을 꺼내 들었다.
피렌조.
그림에 그려져 있는 건 피렌조였다.
오래되어 흐릿흐릿한 그림이었지만 광산에서의 생김새와 완벽히 일치했기에 몰라볼 수가 없었다.
“사찰을 지은 스님들의 숙적. 강한 도사의 도움을 받고도 잡지 못해 결국엔 봉인에 그쳤다는 아주 강력한 마귀죠.”
“마귀…. 지금 데몬이라 불리는 놈들과 같은 건가요?”
스님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두 개가 같은 존재인지는 저로서도 알 수 없으니까요.”
스님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해서 데몬과 마귀가 똑같은 존재라는 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데몬은 능력의 개방과 함께 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두 개가 동일한 존재라면 이야기가 이상하게 된다.
“물어보신 자격은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저희가 처리하지 못한 원죄인 마귀를 잡아 주신 것.”
“어떻게 그걸 아신 거죠?”
스님은 천리안 비슷한 능력을 개방하신 걸까?
스윽.
천천히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키는 스님.
아.
스님이 가리킨 곳엔 오래된 TV가 놓여 있었다.
스님들은 속세를 떨쳐내려는 사람들이다 보니 당연히 TV 같은 건 안 볼 줄 알았다.
“TV… 보셔도 되는 거군요, 하하!”
“원래 보면 안 됩니다.”
“!?”
스님이 너털웃음 터뜨리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차피 조금 후면 늙어 바스라 질 몸. 부처께서도 용서해주시겠지요.”
슈퍼 긍정주의 스님이었다.
“스님은 개방하지 않으신 건가요?”
늙어 바스라 질 거라 말한 스님.
개방을 했다면 적어도 나이를 먹어 죽을 일은 없었다.
과거의 나처럼 스님도 개방의 조건을 찾지 못한 걸까.
“허허 글쎄요. 조건을 찾지도 않았지만, 찾았더라도 개방하지 않았을 겁니다.”
“네…?”
차를 홀짝이며 불상을 응시하고 있는 스님.
스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 이번 생의 영원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죽음과 윤회를 바랄 뿐이죠.”
부처님이다.
부처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모든 걸 통달한 얼굴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죽음에 있어서도 달관한 모습.
100명이면 99.9명은 나이를 먹지 않는 개방을 원할 텐데 스님은 아니었다.
“하하. 부끄러워지네요.”
개방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좌절하고 절망했던 과거.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살았었는데.
그런 개방에서조차 통달한 스님을 보고 있자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마다 원하는 욕망도, 이상도 다르니까요. 각자의 길이 있는 만큼 그 길에 최선을 다해 걸어가면 되는 것이지요.”
크으…!
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스님의 경지에 취해버리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스님.”
나도 모르게 좋은 말을 해준 스님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남겨뒀던 원죄를 없애 주셔서요.”
덩달아 고개를 숙이는 스님.
“하하.”
머쓱한 느낌에 뒷머리를 잠시 긁적였다.
그저 살기 위해서 피렌조를 죽였을 뿐인데 이런 감사를 받다니.
“스님, 혹시 마귀라 부르는 것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신가요?”
데몬과 다른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피렌조 같은 놈들이 과거에도 존재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흐음. 저도 아는 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저 마귀란 존재들은 아주 멋 옛날부터 존재해왔고, 시간이 흐르며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 밖에는요.”
설마 개방도 마찬가지인가.
부적의 기억에서 봤던 도윤을 떠올렸다.
이미 여기저기 부상을 당했음에도 도윤은 온전한 상태의 피렌조와 대등하게 싸웠었다.
도윤도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어.
피렌조와 싸워봤기에 드는 확신이었다.
아무리 무술을 단련했다고 해도 피렌조는 일반적인 사람이 맞서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저도 TV 속에서 저 마귀를 봤을 땐 정말 놀랐습니다. 사찰 곳곳에 기록이 되어 있다곤 하나 이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직도 살아 움직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스님도 놀라시긴 하는구나.
하긴, 수십 년 동안 그림과 기록 속에서만 본 존재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안 놀랄 수가 없을 듯했다.
“분명한 건 저들이 항상 존재해왔다는 겁니다. 어느 시대에선 귀신으로, 어느 시대에선 악귀로…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서요.”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도깨비나 귀신 혹은 요괴.
예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설이나 이야기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존재들이었다.
만약 이것들이 극적 효과를 위해 들어간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것들이라면.
그저 시대마다 불리는 이름만 달랐을 뿐, 데몬과 같은 존재일 가능성이 있었다.
열심히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을 때.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네?”
얼굴 한가득 인자한 미소를 지은 스님.
“싸움의 이유가 뭐가 됐든.”
스님이 조용히 내 눈을 응시했다.
“그것들과 맞서 싸운 사람들이요.”
* * *
밤이 깊은 산 속.
찌륵--- 찌륵---.
산의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구먼.”
풍경 소리와 함께 밝게 날 비추는 달빛까지.
고요한 마루에 앉아 이것들을 즐기고 있자니 이틀 전에 겪었던 광산에서의 일들이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 그러시지요.
갈 데가 없는데 하루만 묵어도 되겠냐는 말에 흔쾌히 방을 내준 스님.
좋은 스님이야.
스님은 저녁 시간이 되자 맛있는 나물 반찬과 밥까지 내주셨다.
꼬르륵.
물론 배를 가득 채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염치도 없이 스님 혼자 생활하시는 곳간을 더 축낼 수도 없는 노릇.
고기 먹고 싶….
짝!
나도 모르게 경을 칠 생각을 해버렸다.
유서 깊은 사찰 한 가운데에서 고기 생각이라니.
안될 말이었다.
엉금엉금.
조용히 기어가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안에 담겨 있는 두툼한 문서 더미.
- 다른 기업들 역시 그것들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문서를 내어주며 소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다른 기업의 일까지는 제가 어쩔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 약속드리겠습니다.
내가 달라고 한 유물에 한해서 대산은 깔끔히 포기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가로채거나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한 소피아.
음, 왜일까.
아직도 의문이었다.
내가 뭐라고 대기업의 회장이 그런 약속까지 하며 나에게 정보를 준 걸까.
- 저를 위해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다였다.
이 많은 것을 내어주며 소피아가 바란 것은 말이다.
소피아를 위해 싸워달라.
담긴 의미가 헷갈리긴 했다.
대산을 위해 싸워달라는 건지, 아니면 소피아 본인을 위해 싸워달라는 건지.
- 계약서 같은 건 안 써도 되나요…?
솔직히 계약서 같은 거라도 쓸 줄 알았다.
소피아와 난 처음 만난 사이.
먼저 정보를 내어주는 마당에 나의 뭘 믿고 구두 약속을 한단 말인가.
-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계약서를 백 장, 천 장 쓴다고 한들.
옅은 미소를 띠며 날 응시했던 소피아.
- 그때가 왔을 때 약속대로 절 도울지, 안 도울지는 전적으로 백운 님의 선택일 테니까요.
음.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겠단 말이야.
보통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상대방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는 법인데.
소피아는 아니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신비로움이 더욱 깊어지는 느낌.
“흐음. 모르겠다.”
어차피 고민해봐야 이 아리송함을 풀어낼 길은 없어 보였다.
“어쨌든 해피엔딩이니까.”
해피엔딩도 이런 해피엔딩이 있을까.
하고 싶은 만큼 최리아와 김대석의 코를 뭉개줬음에도 내게 돌아온 피해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돌아온 건 대산으로 접근한 목적이었던 무기의 정보들.
“범죄 영화에서나 보던 밀입국 할 뻔했는데, 다행이야.”
한편으론 스릴 넘치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찌 됐든 도망자가 되지 않았다는 건 다행인 점이었다.
“자. 그럼.”
소피아에게 받았던 문서를 마루에 늘어놓았다.
아무리 빨라도 이것들이 발견되는 시간은 4년 뒤.
여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찾을 생각은 없었다.
“이거부터 찾아볼까.”
가장 왼쪽에 있는 문서를 집어 들었다.
문서의 맨 앞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쓰인 무기의 명칭.
귀신의 검, 스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