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곡성으로
날이 밝자마자 스님께 인사를 드린 뒤 하산을 시작했다.
다음 계획이 정해졌으니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곡성군.
다음 목적지였다.
스이카의 정보가 있을 것이라 특정되는 장소.
대기업의 정보치고는 좀 허술한데.
스이카에 대한 대산의 문서를 읽고 내린 결론이었다.
# 귀신의 검 스이카는 오랜 시간 동안 귀신의 비명에 벼려졌다고 알려진 검이다.
# 전라남도 곡성군에서는 귀신의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을 시작점으로 스이카를 찾아볼 것.
아무래도 선택을 잘못한 것 같았다.
정보의 양과 내용을 봤을 때 대산 역시 스이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건 최근인 듯한 느낌.
하긴, 대산이 스이카를 발견했다고 세상에 내놓은 건 거의 4년 뒤의 일이니까.
그로부터 4년 전인 지금.
대산이 스이카에 대한 정보를 모으지 못한 게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시간대였다.
그나저나 귀신의 비명에 벼려진 검이라니.
섬뜩한데.
설명만 들었을 땐 상당히 꺼려지는 검이었다.
왠지 사용자마저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뭔가 순탄치 않을 것 같단 말이야.
과거 대산이 스이카를 찾아냈을 때도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찾은 유물들 중 가장 힘든 과정을 거쳤었다고 말이다.
물론 찾았다는 사실을 더 뽐내기 위한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엄청 힘들어 보이긴 했었지.
유물의 발표 땐 항상 대산의 탐사팀이 함께 했었다.
밝은 표정의 다른 이들과는 달리 현장에서 구른 팀의 얼굴은 초췌 그 자체였다.
다른 유물 때보다 더 고생을 한 표정이 역력했었다.
그때 당시 어떻게 찾은 건지 장소나 과정 같은 걸 자세히 공유하지 않았으니… 무섭네.
공개라도 했다면 어떤 고생길이 열려있을지 미리 알기라도 했을 텐데.
개고생했다는 것만 알고 있으니 미지의 고생길에 더 무서울 따름이었다.
척.
사찰을 떠나고 얼마 후.
드디어 차가 지나다니는 대로에 도착했다.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있던 터라 크게 힘들거나 하진 않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가지.
현재 위치한 곳은 서울의 산 아래.
전라도로 가려면 KTX를 타든 고속버스를 타든 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터미널이나 기차역으로 갈만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면도칼을 들고 뛰어간다? 오바지.
현재 주어진 최선의 선택지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낮에 시뻘건 면도칼을 들고 대로를 달리다니.
가능하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슥.
고개를 들어 대로를 살폈다.
도심지가 아닌 만큼 차가 많이 지나다니지는 않지만.
한두 대씩은 꾸준히 차가 지나다니고 있었다.
끄덕.
마음을 다 잡은 후 대로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면도칼을 들고 달리지 않으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히치하이킹.
외국의 사막 길에서나 하는 거라고 들었지만.
장소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지금 내게 필요한데.
부우웅.
저 멀리서 다가오는 차량이 보였다.
“후우.”
작은 심호흡을 한 뒤 떨리는 가슴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척.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영화에서 봤던 히치하이킹을 완벽히 재현했다.
자.
부우우웅!
멈춰라!!
* * *
시발.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히치하이킹을 시작하고 다섯 시간.
한 대도 서지 않았다, 단 한 대도.
저벅. 저벅.
그냥 면도칼 들고 뛰어갈걸.
다섯 시간이나 손을 들고 있어서일까.
상당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대로에 가만히 서 있던 몸도 몸이었지만, 차가 지나갈 때마다 이번엔 세워주지 않을까란 쓸데없는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느라 마음이 무척이나 지친 상태.
너무 매정한 세상이야.
고개가 절레절레 내저어졌다.
어쩜 이렇게 차가울 수 있단 말인가.
한 명쯤은 차를 세우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줄만도 한데.
부우우우.
뒤에서 다가오는 차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안 해.
한 번 더 거절당하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그냥 심신의 기운을 회복시킨 다음에 면도칼 들고 뛰어가야지.
끼이이이.
!?
서서히 멈추는 차량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머선 일이고?
그렇게 세워달라고 손을 들 때는 안 서더니.
“총각, 위험하게 왜 차 길을 걷고 있어?”
내려진 창문으로 인심 좋게 생긴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시내로 가야 되는데 갈 방법이 없어서요. 그냥 치여 죽어야죠 뭐…. 어차피 가다가 굶어 죽을 텐데.”
최대한 처량한 얼굴로 비관적인 말을 읊어 나갔다.
비를 쫄딱 다 맞으며 박스에 앉아 있는 불쌍한 강아지처럼 말이다.
“아이구! 젊은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어여 타! 내가 태워다 줄게!”
지져스.
“가… 감사합니다!”
기쁜 마음에 호다닥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로 탑승했다.
푸우욱.
앉자마자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 주는 포근한 차 시트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거야.
바로 이것이다.
네 시간 전부터 내가 원했던 것은.
“아이고 얼굴 보니 오랫동안 서 있었구만.”
얼굴에서 지친 기색이 물씬 풍기고 있나 보다.
“네… 아무도 안 세워주더라고요. 아저씨가 처음이에요.”
“거기 서랍에 바나나 있으니까 그거라도 먹어.”
하느님, 천사가 여기에 계십니다.
다시 한번 90도로 고개를 숙인 뒤 조수석의 서랍을 열었다.
어?
바나나와 함께 놓여 있는 사진 한 장.
사진 속엔 운전 중인 아저씨와 딸로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가 찍혀 있었다.
“허허, 예쁘지? 내 딸이여, 하나밖에 없는 내 보물.”
“정말 보기 좋네요.”
가식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아저씨와 딸의 모습.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가 사진을 통해서 느껴지고 있었다.
“딸이 식물과 관련된 능력을 개방했거든. 뭐라고 했더라…. 식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었나. 어쨌든 다양한 식물들의 소리를 듣겠다며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고 있어.”
“식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뭔가 신비롭네요.”
“그치? 거의 없다시피한 능력을 개봉한 애비랑은 다르지, 허허!”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아저씨.
딸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시는 것 같았다.
“자네는 어디로 가려고 터미널에 가는가?”
우물거리던 바나나를 넘긴 뒤 입을 열었다.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가려는 중이에요. 거기에 볼일이 있어서요.”
“곡성. 곡성… 거기 같은데 말이야.”
“어? 아저씨 곡성 아세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던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딸이 이번에 간다고 했던 곳인 것 같거든.”
“… 용기가 엄청나시네요.”
곡성, 곡하는 소리.
물론 전라남도 곡성은 지역 이름일 뿐 이 곡성과는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개방과 데몬이 나타나면서 곡성으로 향하는 사람의 발길은 점점 끊기게 되었다.
- 귀신 소리가 들려요.
밤만 되면 귀신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목격담이 들려왔다.
그리고 소리와 함께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까지 퍼지며 겁에 질린 사람들이 가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 곡성을 홀로 가다니, 엄청난 용기였다.
“당돌한 아이여, 어렸을 때부터 겁이 없어서 귀신 나온다 해도 그냥 뛰어들어가고 그랬거든.”
“하하…. 곡성은 어떻다고 하던가요? 정말 귀신 울음소리가 들리나 궁금해서요.”
내 물음과 동시에 아저씨의 얼굴로 걱정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거시…. 곡성 도착했다고 한 뒤로 연락이 안 되더라고.”
“네…?”
“워낙 산간 지역이라 핸드폰이 안 터질 수도 있다곤 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있는디. 벌써 2주일 째라 걱정되더라고, 허허. 주책이지 주책이야. 어련히 잘 있으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아저씨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전파 터지는 곳으로 나오면 바로 전화하실 거예요.”
“그렇지? 나도 그러려니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네, 허허!”
웃음소리와는 반대로 여전히 걱정 가득한 아저씨의 얼굴.
음 곡성이면 어차피 내가 가는 곳이니까.
“어차피 잘 계시겠지만 제가 곡성 가는 김에 한 번 찾아가 볼까요?”
“아이고! 그래 줄 수 있겠어?”
내가 가본다는 소리에 아저씨의 얼굴이 급 밝아졌다.
괜찮다고는 말하지만 걱정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만나면 아저씨 걱정하고 계신다고 얼른 연락 드리라고 전해드릴게요.”
“고맙네, 고마워. 내가 귀인을 태웠구만! 사실 걱정이 많이 됐거든. 하루에 한 번씩 꼭 전화를 잊지 않던 아인데 2주일이나 안 되니까 말이야.”
그제야 솔직하게 걱정을 털어놓은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통화를 하던 딸이 2주일이나 연락이 없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겠는가.
“얼굴은 사진 봐서 아니까 이름만 알려주세요.”
나라고 곡성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스이카를 찾아가는 상태.
어차피 여기저기 뒤져봐야 했다.
겸사겸사 따님을 찾아 말도 전해드리면 오늘 태워 주신 거에 대한 감사 인사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이초희, 이초희라네. 잘 부탁혀.”
“이초희요, 알겠습니다!”
아저씨를 향해 자신감 넘치는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저만 믿으세요! 꼭 연락 드리라고 전해드릴 테니까요!”
* * *
곡성의 산자락.
“살려주세요!”
깊은 산 속에서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을 지르며 계속해서 산을 달리는 여자.
팍!
“꺅!”
돌멩이를 밟은 여자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아….”
피가 나고 있는 발바닥을 바라보며 여자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도망쳐야 돼.’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벗어나서 신고해야 했다.
지금도 갇혀 있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도.
[일어나!]
[힘내!]
귓가로 풀과 나무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포기하면 안돼!]
여자의 이름은 이초희.
개방을 통해 식물과 의사소통 할 수 있게 된 능력자였다.
“포기 안해! 으…!!”
이초희가 어금니를 깨문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 찢긴 발에서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견뎌내야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돼.’
사방이 캄캄해 길을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식물들의 안내를 받아 이곳까지 달려왔다.
조금만 더 가면 곧 대로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타닥.
몸을 일으킨 이초희가 계속해서 산 아래로 나아갔다.
번쩍.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차들의 불빛.
“아…!”
다 왔다는 생각에 이초희가 속도를 올렸다.
[빨리 가!]
[도움을 구헤!]
“고마워.”
식물들이 이끌어줬기에 늦은 밤 산속임에도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대로까지 도착한 이초희가 다가오는 차량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끼이익!
한밤중에 엉망진창이 된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어서일까.
차례차례 멈춘 차량들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살았어!’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포기할 수 없단 생각에 꾹 참고 있었지만 정말 무서웠었다.
[아니야!]
[도망쳐!]
[아니야!!]
“응…?”
울고 있는 이초희의 귓가로 식물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런 이초희에게 부부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다가왔다.
“아….”
다가온 사람들에 이초희가 절망에 찬 탄성을 내뱉었다.
얼굴 한가득 조소를 머금고 있는 사람들.
“이년 봐라?”
“아. 안돼….”
“뭘 안돼.”
스윽.
절망에 찬 이초희에게 악마의 손길이 뻗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