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귀신의 이름
그렇게 붙잡은 테즈카의 손.
이름을 새기기 위해 붙잡은 손은 야차의 손이었다.
끼아아아아악---!
그 손을 잡은 뒤로 스이카의 비명이 멈춘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내가 무슨 손을 잡은 거냐.’
남자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역사에 새겨주겠다는 말에 혹해 덥썩 붙잡은 손이었는데.
끼아아아아악--!
‘이렇게 싸웠는데도 제대로 안 새겨주면.’
서걱!
‘바로 참수다!’
귀신이란 별명이 붙기까지 죽여왔던 사람보다 테즈카의 손을 잡은 뒤 죽인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만큼 테즈카가 걷는 길은 피가 가득한 수라의 길이었다.
“수고했다. 오늘 네 덕분에 고비를 넘겼구나.”
싸움을 끝내고 돌아오면 언제나 테즈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성의 장군, 조금 있으면 한 나라를 지휘할 수도 있는 테즈카가 친히 행차를 해주는 것이었다.
“한 전투에 한 페이지 씩. 내 이름 분량 확실하게 하라고.”
남자가 종종 하는 농담에 테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선 장군에게 반말을 한다며 남자를 안 좋게 보는 시선이 많았지만, 테즈카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예를 강요하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 수천의 적을 베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전투는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으니까요.”
반농담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테즈카는 언제나 진지하게 대답을 해줬다.
“….”
남자가 그런 테즈카를 조용히 응시했다.
싫지 않았다.
처음엔 각자의 목적을 위해 협력한 사이였지만.
지금쯤 되니 테즈카를 위해 검을 휘두르는 행위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별로 안 남은 건가?”
남자가 테즈카 옆에 놓여 있는 지도를 바라봤다.
전부 붉은 색이었던 각 지역의 성이 테즈카의 푸른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세상을 향한 테즈카의 도전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예, 이 산등성이의 성만 차지한다면 승기는 저희 쪽으로 기웁니다.”
테즈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만큼 이번엔 90% 이상의 병력을 전부 투입할 생각입니다.”
선택과 집중.
테즈카가 구사하고 있는 전술이었다.
보통은 아군 진지의 방어를 고려해 병력을 배분하지만, 테즈카는 그러지 않았다.
손에 넣어야 하는 성이 있다면 아군의 방어는 어느 정도 포기한 채 전 병력을 쏟아부었고, 실제로 그 전술은 유효히게 적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과감한 배분이군.”
테즈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남자를 응시했다.
‘귀신이여, 당신 덕분입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테즈카의 전술은 무모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테즈카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전술은 무모한 걸 넘어 도박에 가까운 전술이라는 것을.
하지만,
귀신이 같은 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도박에 가까웠던 확률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전력.
그것이 귀신이었다.
- 테즈카는 실패할 겁니다.
일본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테즈카는 아닐 거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병력이 부족했다.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전력.
이건 가진 것을 방어하며 전쟁을 치룰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감사를 표합니다, 귀신이여.’
귀신으로 인해 얻은 건 공격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 뿐만이 아니었다.
적들의 많은 시도가 있었다.
공격에 집중한 테즈카를 빈집털이하기 위한 시도.
- 끼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빈집털이의 성공을 확신하고 온 자들을 반긴 게 백발의 귀신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입은 적들.
테즈카는 그 덕에 공격을 더욱 쉽게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럼 난 이만 들어가지.”
테즈카가 몸을 돌린 남자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존재만으로도 너무 강력해 전술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남자.
‘계속… 계속 그렇게 저를 위해 싸워 주십시오. 제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죠.’
* * *
오래된 전쟁 속에서 승기는 테즈카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테즈카는 승리의 추를 확실하게 가져올 수 있는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고 그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 적 역시 히메지 성을 노리고 대군을 보내왔다.
“성을 함락시켜라!”
“히메지 성만 손에 들어온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평소보다 더 텅텅 비어버린 히메지 성을 함락시키고 적장인 테즈카를 잡기 위해 방어까지 포기해 가며 강수를 둔 것이었다.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진군하라!”
허술해도 너무 허술한 히메지 성의 방어.
공격을 온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승리를 확신했다.
안에 그 유명한 귀신이 있더라도 이건 한 사람이 막아낼 수 있는 군세가 아니었다.
쾅!
그렇게 확신과 함께 열어젖힌 히메지 성의 성문.
예상대로 백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두렵진 않았다.
뒤에 있는 건 수만의 군대였고, 세간에 퍼진 귀신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100% 믿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 명이 전부를 막아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 히메지 성을 지켜낸 백발의 남자.
도망친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든 병력이 죽어버렸다.
“가거라, 보내주마.”
다다다다…!
마지막 적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걸 보며 남자가 검을 내렸다.
“후우…!”
정말 긴 전투였다.
지금까지 치뤘던 어떤 전투보다도 길고 힘들었다.
으득.
“으.”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른 오른팔에서 뼈의 비명이 들려왔다.
너무 무리한 것 같았다.
몇 번만 더 휘둘렀다간 팔 자체가 박살 날 듯한 고통이었다.
비틀.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감각이 어색해진 다리까지.
남자가 간신히 다리를 끌며 성으로 몸을 돌렸다.
“…!”
그런 남자를 귀신 보듯 쳐다보고 있는 성의 사람들.
사람들 사이로 테즈카의 모습이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이 남자를 반겨주기 위해 나온 듯했다.
“오늘은 한 페이지가 아니라 열 페이지는 써줘야겠는데.”
지친 상태에서도 농담을 건네는 남자에 테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이번 전투로 승기는 확실하게 넘어왔으니까요.”
테즈카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도와드리지 않고 뭘 하느냐.”
“예!”
남자의 곁으로 붙는 여럿의 병사들.
“뭘 새삼스럽게 도와줘. 치우고 방에 따듯한 물이나 준비….”
푹.
“…?”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남자가 고개를 내렸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꽂히는 검들.
울컥!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
피를 토한 남자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뭐… 냐…?”
간신히 고개를 든 남자가 테즈카를 응시했다.
테즈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입니다.”
테즈카가 천천히 남자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가장 빛나야 하는 건 저고요.”
척.
테즈카가 남자를 향해 몸을 수그렸다.
“함께 이름이 쓰이기엔… 당신의 빛은 너무 강합니다.”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오랜 남자의 꿈이었다.
동시에 서서히 커져갔던 테즈카에 대한 신의.
꿈과 신의가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다.
“언제… 부터냐.”
“처음부터입니다.”
테즈카의 목소리가 차갑게 남자의 귀로 꽂혔다.
“빗속에서 손을 뻗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이름은 단 한 차례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
테즈카가 스이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좋은 검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안 남겠지만, 이 검은 제가 오래도록 남겨드리겠습니다.”
스이카를 가져간 테즈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사라져 주시길.”
한 번의 망설임 없이 조금씩 멀어지는 테즈카의 뒷모습.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피식.
남자의 등 뒤로 마지막 검이 내리꽂혔다.
* * *
….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망령은 사라진 뒤였다.
더듬.
조금 전 검이 지나갔던 몸을 만져봤다.
안 베였다…?
분명 상체 옆으로 서늘한 검기가 느껴졌는데 어떻게 된 걸까.
“베인 줄 알았나? 생각보다 겁이 많군.”
원래의 위치에서 남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철컥.
스이카를 집어넣은 남자가 나를 응시했다.
“경계 안에서 무얼 벨지 정하는 건 검을 쥐고 있는 나다. 잊지 말아라.”
내가 베이지 않은 이유를 말해주는 남자.
하지만, 내가 지금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거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 전 봤던 건 분명 남자의 과거였다.
그런 배신을 당했는데 어떻게?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
“내가 주저앉아서 절규에 찬 비명을 지르며 복수를 다짐하지 않아서?”
팔짱을 낀 남자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오래전의 이야기다.”
허.
끝이었다.
오래전의 이야기라서.
이 한 마디가 남자가 한 말의 전부였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후회하며 절규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리 말한 남자가 개운하단 얼굴로 날 응시했다.
“멈춰있는 과거를 돌아보기보단,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현명하겠지.”
스윽.
남자가 차고 있던 스이카를 건넸다.
“검을 가지러 온 거겠지? 가져가라.”
“….”
내밀어진 스이카를 한 번 본 후 다시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검을 받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빨리 물어봐라, 팔 아프니까.”
한 번 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싱긋 웃어 보인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귓가로 들린 이름을 되뇌며 머리에 새긴 뒤.
“제가 스이카를 받아 지키려는 사람 중에는 당신을 속이고 배신했던 자의 후손이 있습니다.”
바깥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
좀 걱정되긴 했다.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그런 배신을 당했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냐, 오래전의 일이라고.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꿈도 이루었다.”
“무슨…?”
저벅.
다가온 남자가 손을 들어 내 이마를 가리켰다.
“한 명이면 충분하다.”
“…!!”
덥썩.
손으로 남자가 쥐여 준 스이카가 느껴졌다.
스르륵.
스이카를 넘겨주기 무섭게 남자의 모습이 하얀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찌 충분하지 않을 수 있겠나,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남자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이 될 남자이거늘.”
“…!!”
스륵.
입자가 된 남자가 완벽히 사라지고, 손에 쥐어진 스이카의 감각을 느꼈다.
확실히… 새겼습니다.
당신의 이름.
* * *
쐐에엑!
“죽여라!”
“사방에서 덮치면 끝이다!”
복면의 암살자들이 정면과 옆, 천장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치지직.
왼발을 뒤로 빼며 자세를 낮추고,
“스으으….”
한 차례 호흡을 내쉬며 몸을 가라앉힌 뒤 두 눈을 감았다.
- 정하는 건 검을 쥐고 있는 나다. 잊지 말아라.
내가 베어야 할 것과 베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한 뒤.
깊숙이 새겨져 절대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떠올렸다.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철컥.
[발도]
끼아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