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스이카
스이카를 꺼낸 순간 주변으로 원형의 푸른 경계가 그려졌다.
그리고 검을 뽑기 위해 오른손에 힘을 준 순간.
찌릿.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집에서 뽑히기 전 검에 압축되기 시작한 힘.
스이카의 발도는 검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힘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뽑는다.
허리춤에서 귀를 찢는 비명이 터져 나오며 백색의 검기가 주변을 갈랐다.
스이카를 꺼내 검을 휘두르기까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나타난 암살자들이 발을 딛지도 못한 상태.
후두둑!
잠시 후, 바닥에 발을 디딘 건 발이 아닌 다른 부위들이었다.
옆과 정면에서 달려들던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검기에 갈라져 하나였던 게 둘이 되고, 둘이었던 게 넷이 되어버렸다.
“후우….”
참았던 숨을 뱉어내며 다시 검을 거둬들였다.
철컥.
무거운 정적만이 가득해진 방.
방 안엔 검집과 만난 검의 마찰음만이 울리고 있었다.
!!!
소름이 돋으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잠시 간과했던 게 있었다.
덜덜.
온몸을 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쩡.
모든 게 멀쩡하게 붙어있는 최리아가 보였다.
휴우우우우!
본능적으로 최리아를 적으로 간주해 베어 버렸을까 봐 식겁했다.
큰일 날 뻔했네.
안도감을 느끼며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유롭게 승리를 확신하며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던 나카지와 암살대들.
지금은 그 여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
내 물음에 정신을 차린 나카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쥐가 너무 쎄서 당황스럽나 보네.”
조롱하는 미소를 짓자 나카지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부하들 앞에서 조롱당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 분노한 느낌이었다.
“겨우 럭키 펀치 한 방으로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스윽.
내게 창을 겨눈 나카지가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잡았다.
사삭.
그런 나카지의 발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시전하는 암살대들.
나카지의 발아래로 묘한 기류가 중첩되기 시작했다.
버프 같은 건가.
나카지는 당장이라도 튀어 오를 듯한 자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날 간사이의 호랑이로 불리게 했던 기술이다.”
미친놈.
순간이지만 검을 놓칠 뻔했다.
지 입으로 저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손발이 뒤틀리는 느낌이다.
“넌 나의 모습조차 보지 못할 것이다.”
스포츠로 치면 나카지는 약쟁이 새끼였다.
지 스스로의 힘도 아니고 뒤에서 부하들이 걸어 주는 버프를 받는 프로 도핑러.
그러면서도 저렇게 기고만장한 모습이라니 혀가 내둘러졌다.
“나의 창은 속사의 창. 눈 깜짝할 사이 너의 심장을 꿰뚫는다.”
“거 말 더럽게 많네. 입 닥치고 빨리해.”
웬만하면 마지막 유언이다 하고 들어주려고 했는데.
더 이상 들어주는 건 불가능했다.
더 들었다간 손발이 오그라들어 검을 휘두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쿠웅.
준비를 마친 건지 나카지의 발아래로 기류가 터져 나왔다.
“받아라! 최고속의 창을!”
허 참.
스프링처럼 폭발해 내게 날아오는 나카지.
어이가 없었다.
최고속의 창이라니.
아마 자기 창이 세상에서 제일 빠른 줄 아는 것 같다.
“스으으….”
조금 전에 보고도 인정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저런 놈에겐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최고속이란 게 무엇인지를.
스릉!
비명과 함께 뿌려진 첫 번째 검기가 나카지의 다리를 갈랐다.
철컥. 스릉!
두 번째 검기가 나카지의 팔을 갈랐다.
멈칫.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걸까.
나카지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너의 창이 내게 닿을 시간이면.”
“…?”
푸슉.
“백 번은 휘두르고도 남는다.”
푸화아악!
“끄아아아아악!!”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 나카지의 몸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땅을 디뎠던 두 다리와 창을 들고 있던 두 팔을 뒤에 남겨둔 상체뿐이었다.
“!!!”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피.
“나… 나카지 님…!”
“잊지 마라.”
“?”
“그 선, 넘으면 죽는다.”
그렇게 믿고 있던 대장이 처참하게 당해서일까.
암살대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철컥.
주춤.
검을 거둬들이기 무섭게 경계보다 더 멀리 뒷걸음질 치는 녀석들.
그런 암살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불가능에 도전하지 마라. 쫓진 않을 테니.”
크으…!
내가 말해놓고도 취하는 느낌이었다.
만화 속 주인공이나 할 법한 대사.
“끄아아아! 끄아아악!!”
울려퍼지는 나카지의 비명과 비례하여 암살대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가고 있었다.
마치 귀신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후… 후퇴해라!”
목표 제거률 100%를 자랑하던 시노카 암살대.
가장 앞에 있던 암살자를 시작으로 암살대 전체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휴.
다행이다.
나 못 움직이는데.
스이카의 장점과 단점은 뚜렷했다.
사용 시간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었고, 두 발을 원래 있던 위치에서 떼는 순간 해제되는 게 단점이었다.
쿨타임도 긴 거 같고.
….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암살대는 확실히 내빼버린 것 같았다.
슥.
아고 쥐 나겠다.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자 스이카가 해제되어 사라졌다.
코지로는 어떻게 이 자세로 일주일 가까이 검을 휘두른 거지?
그 독함에 고개가 내저어졌다.
“….”
비명을 지르다 말고 기절해버린 나카지.
여전히 굳어 있는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놈 지혈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
“아직 죽으면 안 돼서요.”
* * *
다음 날 아침.
난리가 난 히메지 성으로 장군의 연락을 받은 성의 병력이 돌아왔다.
오래전부터 성을 지켜온 충신들로 이루어진 부대.
부대에 의해 난리가 났던 성의 현장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실장님, 괜찮으세요?”
중앙성 내부에 위치한 VIP 객실.
전수희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최리아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지만, 전수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수희 님은 어때요? 다친 데는 없나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전수희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한숨을 내쉰 최리아가 어제를 떠올렸다.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꺼내고 있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백운이 아니었다면 전부 속수무책으로 죽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죽을 뻔… 했구나.’
대산에 들어간 이후 모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최리아였다.
수많은 토벌전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며 많은 싸움을 봐왔고, 소속 헌터들의 죽음 역시 많이 봐왔었다.
하지만, 모두 모니터 너머에서 본 것들이었다.
‘이렇게… 다르구나.’
죽을 뻔했다는 것.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보는,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경험이었다.
대산의 높은 층에 앉아 있을 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어제의 최리아는 엄청난 무력감을 경험하고 말았다.
꿀꺽.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제.
최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백운만을 바라보며 응원하고 있었다.
백운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수희 님, 전 좀 쉴게요.”
“아… 네! 조금 이따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전수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나갔다.
찰칵.
방의 문이 닫히고.
벌떡!
자리에서 급히 일어난 최리아가 화장실로 향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변기를 열자마자 위액이 쏟아졌다.
“하아… 하아….”
백운에게 의지했기 때문에, 실제로 백운이 자신과 전수희를 구해줬기 때문에.
그래서 백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 부탁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백운은 조용히 최리아를 찾아왔다.
-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지금 향하는 곳은… 끔찍할 테니까요.
거절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구해준 걸 떠나서라도 백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우욱.
그렇게 도착한 히메지 성 외곽의 버려진 창고.
들어가마자 하마터면 토를 할 뻔했다.
코를 넘어 뇌까지 도달하는 끈적한 피비린내.
창고 안에는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넝마가 되어 목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나카지가 있었다.
- 암시를 걸어 주세요.
창고로 들어선 최리아에게 백운이 부탁한 것이었다.
- 저놈에게… 알아내야 할 게 있습니다.
“하아… 백운….”
화장실 벽에 몸을 기댄 최리아가 두 눈을 감았다.
백운을 토벌전으로 끌어들인 순간부터 광산, 그리고 70층에서 백운을 협박했던 일까지.
꿀꺽.
그 모든 일들이 몹시 무모한 행동이었다고 느껴졌다.
“귀신….”
창고에서 나카지의 피를 쓴 채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던 백운.
덜덜.
최리아의 몸으로 이제껏 느껴본 적 없었던, 공포란 감정이 또렷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 * *
고풍스러운 일본의 대저택.
엄청난 규모의 저택의 중심에 70대로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카지는 죽었다고?”
눅눅하고 끈적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 앞에서 몸을 한껏 낮추고 있는 복면의 남자.
히메지 성에서 도망쳐 나온 시노카 암살대 중 한 명이었다.
“예, 히무라 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죽었을 겁니다. 사지가 모두 잘렸었습니다.”
“흐음.”
시노카 암살대의 주인이자 한국 기업들과 협력해 회담을 망치려 했던 히무라.
“살아남은 암살대는?”
“총 700명으로 현재 이 저택에 모두 대기 중입니다.”
“알겠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히무라가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최악이라 가정했던 상황보다 훨씬 안 좋았다.
회담을 망치기는커녕 나카지마저 잃고 오다니.
‘한낱 사냥개일 뿐이지만 여기서 잃을 놈은 아니었는데.’
무언가를 생각하던 히무라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물을 게 있었다.
“다시 들어오거라.”
“….”
방금 전 시야에서 벗어난 암살대.
목소리가 닿는 가까운 곳에 있을 터였다.
“…? 다시 들어오…!!!”
텅.
데굴데굴.
무언가 히무라가 앉아 있는 앞으로 굴러들어왔다.
조금 전 나갔던 암살대원이었다.
저벅.
“…!!”
잠시 후, 열려있는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사람이 아니었다.
온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고 있는,
‘귀신…?!’
귀신이었다.
* * *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노인.
- 히… 히무라… 히무라다. 위치는.
최리아의 암시에 걸려 자신의 주인에 대해 술술 고백한 나카지.
나카지의 말을 따라 도달한 곳엔 도망쳤던 시노카 암살대가 있었다.
- 끄륵…!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대.
내가 지켜야 할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자유롭게 면도칼과 동기화를 할 수 있었다.
“너구나, 나카지를 죽였다는 게.”
“정확히는 시노카 암살대겠지.”
“…!”
약 3분 전부터 시노카 암살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내 다 들어줄 수 있는 힘이 있다. 권력이냐? 아니면 돈이냐?”
침착하게 말을 건네오는 노인을 뒤로 하고,
스윽.
고개를 들어 노인의 뒤를 바라봤다.
익숙한 모양의 톱니바퀴 검이 놓여져 있었다.
본 건 오래 전 단 한 번뿐이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천천히 노인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태연한 듯 앉아있지만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노인은 겁에 질려있다는 것을.
“너의 죽음이다.”
“어째서지? 날 죽인다고 해서 네가 얻는 건 없다. 그리고 난 너에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거늘.”
“맞아, 너가 나한테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럼 왜 이렇게까지…?”
스윽.
조금 더 가까이 가 노인의 두 눈을 노려봤다.
“이번 생엔 말이야.”
“뭐…?”
쐐엑!
노인이 인지하지 못할 속도로 면도칼을 휘둘렀다.
깔끔하게 노인의 목을 베고 지나간 면도칼.
“!?”
푸화아악!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가는 노인.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것.”
그런 노인을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것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