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얼굴은 알았다
얼굴로 부딪혀 오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느끼며.
쿵!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해안가에 몸을 착지했다.
샤마크라에서 로튼과 칸이 걸어간 방향으로 오던 중 만난 시가지 마을.
마을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로튼에 대해 물었었다.
워낙 화려한 황금색을 하고 있으니 봤다면 기억에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화려한 금발을 가진 남자였어요. 해안가 쪽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해안가.
로튼과 헤어진 지 꽤 시간이 지난 뒤에 쫓아온 것이기에.
이제 와서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었다.
“후우우.”
그럼에도 막상 텅 비어있는 해안가를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제 가서 잡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속으론 제발 로튼과 칸이 있기를 바랐었기 때문이다.
빠득.
아쉬웠다.
미치도록 말이다.
그때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했어.
샤마크라 앞에서 우연히 만난 로튼.
그땐 로튼을 불사자 사냥꾼이라 확신할만한 어떠한 여지도 없었기에 지금 느껴지고 있는 아쉬움이 결과론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으…!”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있는 건 머리뿐이었다.
마음으로는 아쉬움이 짙게 남아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때 잡았다면.
힘으로라도 붙잡아 조금 더 깊게 캐물었다면.
마지못해 로튼도 정체를 드러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쉽게 가시지 않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얼굴은 나도 모르는 사이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샤마크라 앞에서 더 자세히 캐묻지 않은 스스로가 답답했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냅다 거짓말을 갈긴 로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갈겨주는 건 뒤로 미루고.
저벅.
쓸데없는 후회로 뜨거워진 머리.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바닷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걷다 보니 움푹 팬 모래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큰 게 떨어져 인위적으로 깊게 파인 모양새였다.
그리고 파인 구멍 주변으로 흩어져 있는 발자국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이었다.
슥.
몸을 굽혀 찍혀 있는 발자국을 살폈다.
이곳에 서 있었던 게 로튼과 칸인지는 확실친 않지만.
찍혀 있는 발자국의 주인은 두 명이 아니었다.
최소 넷에서 다섯의 발자국.
- 이곳은 치안이 잘 되어 있는 편이 아니라서요. 해가 지는 시간대에 해안가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가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시간대 해안가를 방문할만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두 개는 로튼이랑 칸의 발자국이라 치고.
나머지는 누구지?
붙어있는 거리를 봤을 때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까지 접근하는 일은 없을 터.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칸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었다.
동료가 더 있는 건가.
비행이 가능한 게 아니라면 해안가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많은 유동 인구가 있는 시가지를 거쳐야 하는 길.
로튼이 더 많은 수의 사람과 해안가를 빠져나왔다면 분명히 눈에 띄었을 것이다.
두 명이라 그랬어.
한 명은 칸이겠지.
들어갈 땐 두 명이었는데 들어간 장소에 찍힌 발자국은 네다섯 명인 상황.
거기다 들어간 사람만 있고 나온 사람은 없으니 도보가 아닌 다른 이동 수단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흐음.”
몸을 일으켜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다를 응시했다.
지금쯤 저 어딘가를 로튼과 칸이 날아가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녀석들을 막무가내로 칼데아를 꺼내 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스르르.
해가 떨어지고 시간이 꽤 지난 시점.
어느새 해를 대신해 자리를 잡은 달이 해안가로 빛을 뿌렸다.
반짝.
“…?”
조금 더 떨어진 위치.
달빛에 반사된 무언가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넓게 펼쳐져 해안가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황금빛.
뭐지?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기 위해 날개를 꺼냈다.
펄럭.
해안가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올라오고 나서야.
“…!!”
반사되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글자였다.
누구를 위해 남겨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빛을 새겨 남겨둔 듯한 메시지였다.
# Deus Lo Vult.
“데우스 로 울트.”
알고 있는 문장이었다.
언젠가 유물관에 처박혀 있던 시절 봤던 단어.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로튼이 심심해서 떠나기 전에 새겨놓은 글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과도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피식.
이곳으로 올 나를 위해 남겨둔 글자 같았다.
샤마크라부터 시원하게 속아 계속해서 뒤꽁무니를 쫓고 있는 날 위해서 말이다.
이 새끼 봐라.
명백한 도발로 느껴졌다.
내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하게 더 높은 곳에 있는 이가 원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스르….
잠시 뿜어내더니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 황금빛.
기록들을 쫓으며 무엇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거나 알아낸 건 없었지만.
그나마 한 가지 알게 된 건 있었다.
얼굴.
회귀 전의 정보로 알고 있던 게 기태랑이 죽는 장소와 날짜였다면.
이제 그런 짓을 할 용의자의 얼굴까지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적어도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는 알게 된 셈.
펄럭.
날개를 움직여 공항이 있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더 이상 쫓을 생각은 없었다.
기록을 쫓든 누군가를 쫓든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딱히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기다리자.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하려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가설대로 상대의 능력을 무효화시킬지도 모르는 로튼의 힘.
그런 사기적인 일이 실제로 가능할지라도, 애초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힘을 상대로 파훼법을 미리 찾거나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리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이것도 저것도 불명확한 상황이라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정면돌파뿐이었다.
“….”
지금 당장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펄럭!
공항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부딪혀 보이는 길을 만들어낼 뿐이다.
* * *
후우우우우웅---!
보라색의 구체가 어둠이 깔린 하늘을 가로질렀다.
“토롱의 구체는 승차감이 참 좋아.”
유리아가 흡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술사 토롱.
토롱은 특수한 힘을 가진 구체를 생성해 물건이나 사람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구체의 속도는 무게의 영향을 받지 않기에 담을 수만 있다면 몇 명이든 동일한 스피드로 옮길 수 있는 능력.
“토롱이 있으니 이동이 훨씬 수월해졌군요.”
유리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로튼이 미소를 머금었다.
로튼을 포함해 칸 역시 이동기를 지닌 건 아니었기에.
어딜 가든 항상 두 다리에 의지한 채 도보 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윽.
로튼이 고개를 내려 들고 있는 문서를 바라봤다.
‘한 명 남았군요.’
앞으로 한 명만 더 죽이면 로튼이 바랐던 심판은 이루어지게 된다.
그 이후로도 남은 일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로튼.”
조용히 문서를 바라보는 로튼의 귀로 마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그 인간들한테 집착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일 터인데.”
언제나 생각에 잠겨 있는 로튼.
마렉은 항상 답답했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로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칸과 갑자기 사라져버릴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나?”
어느 날 심판을 향해 인간 세계로 간다는 말만을 남긴 채 칸과 사라졌던 로튼.
물론 마렉이 지금까지 함께 해온 의리나 정 때문에 서운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궁금했었다.
대체 심판이 뭐길래 그리 급하게 인간 세계로 넘어갔는지가 말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로튼.
무언가를 생각하던 로튼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죠.”
* * *
오래전 어느 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축축한 동굴의 습기를 느끼며 찬란한 황금빛을 가진 데몬, 로튼이 몸을 일으켰다.
“크르…?”
로튼을 향해 어디 가냐는 듯 울음소리를 흘리는 칸.
그런 칸을 향해 옅게 웃어 보인 로튼이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속 각자의 위치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 마렉과 유리아, 토롱.
‘….’
로튼이 잠들어 있는 그들을 바라봤다.
오랜 시간을 혼자 했던 로튼에게 생긴 동행.
의리나 정으로 맺어진 친구라기보단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동맹이었다.
- 쓸만한 능력을 가졌군.
먼저 손을 내민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괴물 같은 신체와 그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도 안 되는 괴력.
순수한 무와 힘을 가진 마렉은 로튼의 능력을 마주한 후 먼저 동맹을 제안했었다.
- 귀찮은 힘을 쓰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자신이 제한 없이 날뛸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는 것.
그 판을 만들기 위해서 로튼의 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이었다.
- 좋습니다.
로튼 역시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중이었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힘이 필요하다곤 느낀 이유는 간단했다.
규격 외의 존재를 만났었기 때문이다.
- 꿇어라. 꿇어서 빌어라. 그럼 살려주마.
로튼의 능력이,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권능이 통하지 않았던 말도 안 되는 존재.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그 존재를 만났을 때의 무력함과 또 만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로튼은 힘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에 순수한 힘만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렉과 손을 잡았다.
비슷한 이유로 계속해서 손을 잡게 된 칸과 유리아, 토롱.
다섯이 동행하게 되며 적어도 인근 지역에서 이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데몬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저벅.
‘….’
자는 이들을 뒤로하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온 로튼.
빠드득!
밖을 응시하던 로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넘어가야 하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로튼이 존재하던 곳과 이어지게 된 인간의 세계.
들려오는 소식으로 인간들이 개방을 통해 능력과 수명의 법칙을 벗어나게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인간들 중에 강한 능력을 얻어 불사자라 불리는 이도 있다고 하더군.
- 퍼석!
로튼은 그 말을 전한 데몬을 순식간에 죽여버렸다.
불사자란 단어에 발끈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벌인 짓이었다.
‘진정한 불사자는 단 한 분뿐입니다.’
인간 따위가 조악한 잡기를 얻었다고 해서 칭할 수 있는 호칭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존재.
상대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든 무시해버릴 수 권능을 가진 존재.
그 존재만이 불사자라 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두근!
[불경한 이들을 죽여라.]
심장의 두근거림과 함께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고결한 소리였다.
‘이전에 만난 절대자는 그분이 내리신 시련이었겠죠.’
로튼은 자신의 권능이 통하지 않았던 존재를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그분이 내리신 시련이었다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넘어가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군요.’
당장에라도 넘어가 불사자를 사칭하는 이들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이전에 만난 절대자에게 묻혀놨던 로튼의 빛.
로튼은 빛을 통해 그 존재의 기운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있었다.
‘때가 된다면.’
아직 그 존재의 기운이 남아 있는 걸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해석하고 있었기에.
로튼은 기다리고 있었다.
빛을 통해 그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을 말이다.
‘제가 그분을 위한 심판자가 되겠습니다.’
* * *
과거를 회상하는 로튼의 귓가로 토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도… 착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