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강 위의 터널
우당탕!
이미 일이서 있었지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처… 척준경!?
앞으로 찰싹 달라붙어 민쿠와 말하고 있는 남자, 척준경을 바라봤다.
민쿠의 입에서 불린 이름에 너무 놀라버렸기에 뇌가 정지된 지는 오래였다.
이게 머선 일이고!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살아온 인생을 돌아봤을 때 행운의 신이 함께 했느냐를 물으면 대답은 무조건 아니오였다.
행운의 신이 함께하긴커녕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 느껴질 정도로 불행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척준경이라니.
참교육해주러 간 서태혁의 집에서 만난 보랏빛이 척준경에 관련된 기억이라니!
신이시여!!
앞에 행운의 신이 있었다면 지체 없이 달려가 감사의 절을 박았을 것이다.
토끼 님은 어떻게 척준경을 아는 거지.
어느새 토끼쉨에서 토끼 님으로 변경된 호칭.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지 말을 주고받는 둘 사이엔 깊은 유대감이 느껴졌다.
“네가 율이 곁에 있어주니 안심이구나.”
율이 누구지.
분명 사람의 이름일 터였다.
척준경과 민쿠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
말하는 뉘앙스를 봤을 때 율은 두 사람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율이도 겉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척준경 님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민쿠의 말에 척준경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비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 지경이군.”
민쿠 같은 토끼귀는 없지만 나름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비라는 걸 보아 두 사람이 언급하고 있는 율은 척준경의 자식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민쿠는 율의 친구 정도 될듯한 느낌.
“그런 말씀 마세요, 척준경 님이 누구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지는 율이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거지.
아니 애초에 고려의 무신이었던 사람이 왜 데몬의 세계에 있는 거야.
모든 게 의문이었다.
어디까지나 척준경은 개방의 날이 오기 전, 삼국시대의 사람.
무신이었던 만큼 전장에서 죽었을 확률은 있다 생각했지만, 그 전장이 아예 이세계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으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
이리저리 두뇌를 회전시키며 눈으로는 열심히 척준경의 몸을 훑었다.
악귀참도는 없네.
아무리 보랏빛의 기억일지라 해도 악귀참도가 있으면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지금 내가 탄 마차에 있는 검 중에도 악귀참도는 없는 상태.
당연히 척준경이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악귀참도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적 없는 무기였다.
단지 무신 척준경이 사용했을 거라 추정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고무적이다.
검날과 공명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악귀참도의 실존유무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랏빛이 존재한다는 건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무기가 존재한다는 증거였고.
기억에서 척준경이 나타난 순간 그 무기는 악귀참도일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검은 전부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호다닥 마차에서 검을 내려놓은 민쿠.
그런 민쿠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은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여기부터는 내가 가지고 가마.”
“예! 율이에게도 안부 전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거라, 요새 정체를 알 수 없는 데몬 5인조가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 하더구나.”
걱정하는 척준경을 향해 민쿠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무슨 종족인지는 몰라도 표현만큼은 인간 패치가 제대로 된 느낌이었다.
“걱정마십시오! 배달꾼 민쿠, 어떤 위협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거참 우렁찬 토끼구만.
척준경도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조심히 가거라.”
“예! 항상 몸조심하십시오!”
그렇게 서로에게 짤막한 인사만을 남긴 후.
민쿠와 척준경이 등을 돌렸다.
* * *
스륵.
기억에서 빠져나온 뒤.
눈을 떠 빛이 사라진 검날을 내려다봤다.
내가 본 건 민쿠가 아닌 마차에 실려있던 검날의 기억이었다.
검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헤어진 뒤에도 이어졌던 검날의 기억.
대체 정체가 뭐야.
뒤의 기억이 길진 않았다.
민쿠가 내려놓은 검들을 가지고 어떤 절벽 앞까지 걸어간 척준경.
엄청난 절벽이었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높이와 뭐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재질까지.
내가 태어나 본 절벽은 절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장했다.
- 우우웅.
그리고, 단순히 신기한 재질로 만들어진 거대한 절벽이 아니었다.
엄청난 크기로 갈라져 있는 절벽의 사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가 일렁였고.
- 크아아아악! 키아아악!
그 에너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데몬이 쏟아져 나왔었다.
최소 B급 이상이었어.
나약한 녀석들이 숫자만 채운 게 아니었다.
지금 한국에서의 분류 기준으로 봤을 때 모두가 B급 이상의 데몬.
데몬 수천수만 마리가 균열에서 계속 쏟아져 나왔고, 척준경은 그런 데몬들을 상대로 홀로 맞서고 있었다.
- 카앙!
어째서인지 척준경이 사용하는 검은 얼마 가지 않아 모두 부러지고 말았다.
검에 대한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검이 잘못 만들어지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봤을 땐 사용자인 척준경이 너무 강했다.
멀쩡한 검이지만 견뎌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설 만큼 척준경의 힘이 엄청났다.
스윽.
양 끝이 녹아내린 검날을 들어 올렸다.
기억의 마지막.
다른 검과 마찬가지로 검날이 있던 검도 부러졌었다.
부러지며 어떤 데몬에게 집어 삼켜져 버린 검날.
검날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으.
데몬의 침 때문에 녹았던 건가.
본의 아니게 녹아버린 이유까지 알아버렸다.
서태혁의 손에 들어간 건… 음.
검날을 집어삼킨 데몬이 어찌저찌 살아남아 인간계로 내려왔고.
누군가한테 죽임당하면서 검날을 뱉은 건가.
데몬의 세계에서 서태혁의 손까지.
검날이 전달된 경로를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 올렸다.
뭐, 이건 별로 안 중요하지.
검날이야 어쨌든 내게 기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할 바를 다한 뒤였다.
더 이상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휙.
빛이 사라져버린 검날을 돌더미로 던져버렸다.
“흐음.”
턱을 문지르며 조금 전 기억에서 본 상황을 떠올렸다.
율과 검 배달꾼 민쿠.
그리고 배달받은 검을 이용해 쏟아져 나오는 데몬들과 싸우던 척준경까지.
풀썩.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슥슥 관계도를 그렸다.
계속해서 검을 소모하며 싸우는 척준경과 그런 척준경의 검이 부족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배달하는 민쿠.
둘 사이에는 율이라는 척준경의 아들 혹은 딸이 있었다.
척준경은 율을 보러 가지 못하는 거에 대해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
척준경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본 건 아니었지만.
표정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끝도 없이 데몬이 쏟아져 나오고 척준경이 그것들을 막는 입장이라면.
보러 가지 않은 게 아니고 못 가는 상황인거고.
톡… 톡.
관계도를 보며 이틀 후에 받을 예정인 척사윤의 검을 떠올렸다.
척사윤이 기억에서 봤던 율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척사윤이 율이고 율이 검을 만드는 입장이라면.
민쿠가 둘 사이를 계속 오고 가는 게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생각해보자.
기억에서 본 민쿠를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애초에 난 검날에서 본 기억의 시간대를 알지 못했다.
척준경이 살아있는 걸 봤을 땐 분명 몇백 년 전의 일일 터.
아닐 가능성도 있긴 하지.
모두가 개방의 날 이후 등장했다던 데몬도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는 상황.
척준경도 이미 인과율을 벗어나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꽤 오래된 과거라 생각하면 민쿠를 찾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내가 민쿠에 대해 아는 건 토끼귀와 앳된 생김새뿐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다면 이미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다른 걸 중심으로 찾아야 해.
기억에서 봤던 이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지금.
내가 찾아볼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터널.
기억 속에서 인간 세계와 데몬 세계를 이어주었던 터널을 찾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며 어느 정도 지형이 바뀌었을지언정 비생명체인 터널을 찾는 게 현명했다.
기억에서 봤을 땐 구석탱이에 있어서 손을 덜 탈 거 같았고.
분명 인간 세계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곳은 한국일 가능성이 높았다.
단순히 척준경이 고려인이어서는 아니었다.
척준경과 율 사이를 오갔던 토깽이 민쿠.
데몬 세계로 넘어갈 때는 특수한 터널을 사용했지만, 터널까지는 마차로 일반적인 이동을 했었다.
계속 오고 가려면 말도 안 되는 거리를 가진 해외는 아닐 것 같았다.
방법은 아직 딱히 떠오르는 게 없지만.
툭 툭.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널부터 찾는다.
작은 소목적을 정한 후.
왜에에에엥--!
거의 다가온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백운이 검날의 기억 속에서 봤던 터널 앞.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터널은 여전히 건재했다.
시간이 흐르며 물이 차오르고 무언가에 의해 막힌 상태였지만 말이다.
첨벙.
터널이 있는 강으로 누군가 발을 들였다.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차림새.
스윽.
터널까지 와 망토를 벗자.
백운이 기억 속에서 봤던 토끼귀가 튀어나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완 달리 귀가 더 이상 쫑긋거리지 않고 있단 것이었다.
“….”
외관만 봤을 땐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생김새였다.
작은 키와 더불어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
기억에서의 생김새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민쿠가 조용히 터널을 응시했다.
‘어둡네.’
이제는 거대한 봉인석에 막혀 안쪽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었다.
그럼에도 민쿠는 느낄 수 있었다.
봉인석 뒤에 있는 깊고 깊은 터널의 길을 말이다.
질끈.
조용히 터널을 바라보던 민쿠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 때문이야.’
첨벙.
자책을 하며 민쿠가 강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심한 자책 때문인지 가슴을 움켜잡은 채였다.
‘내가 전부 망쳤어.’
민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후회와 자책, 미안함 등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는 눈물이었다.
“으윽… 흑.”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수천수만 번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실책과, 실책으로 인한 끔찍한 결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겁쟁이 새끼…! 그때 죽었어야 됐는데.”
퍽! 퍽!
자신의 머리를 몇 대 두들긴 민쿠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율아.”
율의 이름을 말하며 한참 울던 민쿠.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계속 흘리며.
“죄송합니다.”
민쿠가 닿을 리 없는 사죄를 건넸다.
“척준경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