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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194화 (194/473)

194화. 내가 사랑하는

뺨으로 닿는 따갑고 불쾌한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삭막하네.

되돌아온 데몬 세계에 대한 한 줄 평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공기와 함께였는데.

이젠 세상에서 가장 불쾌하고 더러운 공기와 함께라니.

인생 한순간이야.

새삼스레 인생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벅.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곧 닫힐지도 모르는 터널로 달려가야겠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지지직--!

조금 떨어진 절벽에서 미친 듯이 일렁이고 있는 균열.

균열 속에선 당장에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 가능하다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척준경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건넸었다.

내가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데 타임리밋이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기에 건넸을 말이었다.

- 균열이 열릴 때가 되었을 거야. 한 번만 막아주고 가지 않을래?

간단한 부탁이었다.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척준경의 전투.

수많은 데몬이 끝도 없이 밀려 나오는 균열이었다.

- 수백 년 만에 열리는 균열이라 좀 많이 나오긴 하겠지만, 한 번만 막아도 앞으로 백 년은 거뜬할 거야.

이전엔 하루가 멀다하고 열린 균열이었지만, 척준경에게 하도 썰려서인지 텀이 길어진 상태였다.

텀이 길어진 만큼 한 번 한 번에 쏟아지는 데몬은 많을 테지만 말이다.

- 균열은 그 녀석들의 진영과 이쪽 땅을 나누는 경계야. 마음 같아선 악귀참도로 균열을 가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때의 내 몸 상태로는 너무 큰 도박이었어.

데몬이 인간 세계로 뛰쳐나가지 못하게끔 절벽에 묶어 두고 있었던 척준경.

악귀참도로 균열을 찢고 들어가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면 베스트겠지만, 실패했을 때의 파장은 인간 세계에서의 끔찍한 학살극이었기에.

척준경은 안쪽의 전력이 얼마가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들어가기보단 균열 밖에서 일정한 주기로 나오는 데몬을 막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딱 봐도 심상치 않긴 해.

무지막지하게 큰 균열.

균열 안에는 항상 등장하던 녀석들만 있으란 법이 없었다.

원래는 안 나왔을 놈들까지 균열이 갈라지며 우수수 쏟아질 수도 있었다.

음.

팔짱을 낀 채 거의 다 갈라진 균열을 응시했다.

아마 회귀 전 금정산 사건도 이거 때문일 거 같았다.

산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수를 자랑했던 데몬의 군세.

마지막엔 소식을 들은 헌터들의 합세로 진압되긴 했지만, 진압까지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었다.

그나마 개방으로 헌터가 있는 지금 시대에 일어났으니 피해가 덜한 거겠지.

개방의 시대 전.

척준경이나 도윤 같은 능력자가 드문드문 데몬을 상대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 시대에 비하면 그 수가 턱없이 부족했을 터였다.

그런 시대에 금정산에 나타났던 만큼의 데몬이 등장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어쩌면 역사가 바뀌는 큰 사태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척준경 님 활약 진짜 머선 일이야, 이거.

단 한 명이 막아낸 것이었다.

막아낸 이는 많은 걸 희생하게 됐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번에 막아도 또 열린다는 거지.

척준경은 자신을 대신해 균열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고 외로운 싸움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흐음.

균열쉨, 괘씸한데.

척준경의 행복한 시절은 물론이고 민쿠와 척사율에게 아픈 기억을 남게 한 균열.

죄 많은 균열을 이대로 남기고 가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치지직---!!

열리기 시작한 균열을 바라보며.

음!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풀었다.

정했다.

* * *

백운이 나간 후의 숲속 집.

툇마루에 앉은 척준경이 조용히 정면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백운이 서 있던 장소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네.’

꽤 오랜 시간동안 백운에게 검을 알려준 척준경.

척준경은 검을 전수해주면서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을 느꼈었다.

‘괴물 같은 신체.’

척준경 역시 괴물이라 불렸던 사람이었기에.

그의 괴물이란 기준의 잣대는 무척이나 높았었다.

그런 잣대를 충족하고도 남았던 백운의 신체.

힘의 한계를 느끼기 위해 바위를 하나하나 얹어가면서도 도통 믿기지가 않았었다.

과연 이게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몸인지가 말이다.

‘전투 감각도 엄청나다.’

셀 수 없이 많은 전장과 적을 만났었다.

그 중엔 척준경에게 죽음의 경계를 보여 줄 정도로 강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운의 전투 감각엔 미치지 못했다.

‘공격 한 번 한 번에 속임수와 심리전이 담겨있다.’

백운이 휘두르는 공격을 보며 척준경은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르더라도 단순하고 정직하게 휘두르는 것이 아닌,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택과 갈등을 강요하는 공격.

지금 말로는 전투센스라 불리는 것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타고나지 않았다면 갈고 닦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것.

그런 걸 백운은 매 공격마다 본능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왼쪽인가 싶으면 아래에서, 위인가 싶으면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공격.’

그야말로 예측을 불허케 하는 공격이었다.

속임수와 심리전의 천재라고 불러도 될 수준.

‘단순히 감각이 뛰어난 것 때문만은 아니겠지.’

공격을 예측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백운과 대련하며 척준경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었다.

상대는 백운 한 명임에도 마치 여러 명의 적과 싸우는 듯한 느낌.

물론 한 명 한 명이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적이었고 말이다.

‘배우는 속도 역시 발군.’

얼마 전부터 척준경은 깨닫게 되었다.

베이스는 자신의 검술이지만, 백운이 휘두르는 검엔 다른 무언가가 더 있었다.

척준경의 검술을 녹여내 자신만의 최적화된 검으로 만들어내는 능력.

어느 순간부터 백운의 검은 척준경의 검을 뛰어넘은 채 끝도 없이 위로 향하게 되었다.

싱긋.

‘그 덕에 별걱정 없이 말할 수 있었지만.’

척준경은 백운에게 균열의 데몬을 한 번만 막아달라고 부탁했었다.

원래라면 정말 망설였을 부탁이었다.

균열에서 나오는 데몬은 강력했고 또 그 수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지내며 백운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부탁을 하며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균열에서 뭐가 나오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원래도 괴물인 존재를 더 말도 안 되는 괴물로 만들어버렸군.’

스스로 잘한 행동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감당은 고사하고 가늠조차 안 되는 괴물이 되게끔 가속 패달을 선물해버렸다.

“하아.”

시원한 한숨과 함께 척준경이 고개를 들었다.

툇마루에서 바라보는 맑은 하늘.

백운이 떠난 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 하늘이었다.

“괴물의 검 스승이라.”

척준경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구나.”

* * *

갈라지기 시작한 균열 안.

모든 준비를 마친 픽탄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수백 년 기다림의 결말.

그 결말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다시 이 안으로 도망치는 일 따위는 없다.’

픽탄이 오랜 기다림을 떠올리며 균열 안을 둘러봤다.

본의 아니게 지겹도록 지내온 공간이었다.

패배와 힘의 비축을 반복하며 이제는 집처럼 포근한 공간이 되어버린 균열 속.

그런 균열 속이었지만.

픽탄이 하루라도 빨리 인간 세계로 나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있었다.

자유를 만끽하며 약한 존재들의 세계를 정복하고 싶다는 욕구 외의 이유.

꿈틀.

자신들 외에.

무언가가 또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또 얼마나 있는 건지는 픽탄 역시 알 수 없었지만.

거대한 균열 안의 공간엔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단지 출구와 가장 가까운 공간에 픽탄과 군세가 배치되었을 뿐이며, 시간이 지나면 다른 균열 안의 공간까지도 출구가 열릴 것이었다.

‘그 전에 나가 먼저 세계를 차지해야 한다.’

픽탄이 옆 공간의 데몬들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경계할 뿐이었다.

데몬 세계가 아닌 인간 세계를 지배하려는 이유.

그건 같은 데몬 중에 말도 안 되게 강한 개체들이 종종 존재했기 때문이다.

휙휙.

잠시 생각에 잠겼던 픽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

균열 밖의 척준경에게 막혀 번번이 진출이 실패했을 땐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급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지난 마지막의 전투로 척준경은 확실히 죽었기에.

더 이상 픽탄의 출정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나와 이 군세를 막을 것이냐!’

꽈악.

픽탄이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며 자신의 군세를 바라봤다.

모두가 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 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개체들이었다.

“시간이 됐다! 우리는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공포로 자리 잡을 것이다!”

“크라아아아!!”

“키아아아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우렁찬 함성을 들으며.

파지지직---!

이젠 완전히 갈라진 균열을 향하여 픽탄이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그렇게 몇 걸음 나가자 느껴지는 스산한 땅의 공기와.

새로운 세계로의 출정을 반겨주는 익숙한 풍경까지.

“하아아--!”

픽탄이 크게 호흡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깥 공기였다.

‘인간 세계로의 출구는 저쪽이겠지.’

그렇게 한시라도 빨리 인간 세계로 가려는 픽탄.

그런 픽탄의 귀로.

“스으으….”

누군가의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어두운 날씨의 절벽 앞이었다.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식별이 어려운 어두움.

‘…?’

그런 어둠 속으로.

누군가의 호흡으로 인한 입김이 내뿜어졌다.

* * *

어느새 완벽하게 열린 균열을 바라봤다.

균열 사이로 시끄럽게 울부짖으며 몰려나오는 데몬들.

신났네, 신났어.

안 그래도 어두운데 균열이 열리며 더 어두워져서일까.

균열에서 나온 데몬들은 아직까지 날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충 세어봐도 몇천이네.

당장 나온 녀석들만 해도 수 천이었다.

끝까지 다 나오면 만에 육박할 듯한 엄청난 숫자.

척준경 님은 이런 걸 상대로 싸워왔던 건가.

오랜 시간 동안 절벽 앞에서 홀로 싸워왔을 척준경이 떠올랐다.

가장 소중한 이를 밖에 남겨두고 온 죄책감과.

자신의 싸움을 위해 소중한 이의 친구에게 검을 보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까지.

척준경은 그런 여러 죄책감을 안고 이곳에서 검을 휘둘렀다.

“스으으…!”

척준경을 떠올리며 천천히 호흡을 뱉어냈다.

“누구냐!!”

그제야 날 발견한 건지 큰 소리로 물어오는 맨 앞의 데몬.

그러든 말든.

마지막 순간 척준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영웅이라고 말했던 것에 대한 척준경의 답변이었다.

- 난 영웅 같은 게 아니야. 인간을 위하여, 세상을 수호하기 위하여 같은 거창한 목적 때문에 이곳에서 싸운 게 아니거든.

척준경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후련한 미소와 함께.

- 내가 싸운 이유는 단 하나야.

사라져가는 나에게 고독한 싸움을 지속했던 이유를 말해줬었다.

그때 척준경이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고개를 들어 균열에서 나온 데몬을 응시했다.

“사랑하는 세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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