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살육전
“누구냐!!”
뿔 달린 데몬 놈이 몇 번인가 누구냐고 물어왔지만.
물음에 대답하진 않았다.
당장 누구지도 모를 놈한테, 정확히는 이제 곧 뒤질 놈한테 굳이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런 뿔쟁이의 질문보단.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방금 꺼내든 스이카에 신경을 집중했다.
달라졌어.
스이카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스이카를 쥐고 있는 내가 달라졌다.
검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을 통해 전달되는 스이카의 기운.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기운이었다.
코지로가 혀를 찼겠는데.
이쯤되니 코지로의 인내심은 바다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검을 넘겨줬더니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지 팔이나 뿌개 먹었으니.
내가 코지로였다면 당장 뺨을 한 대 올려친 후 스이카를 도로 가져갔을 것이다.
후우.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스이카의 기운에 집중하며 검의 메커니즘을 떠올렸다.
검집에 힘을 응축시켰다 폭발적으로 뿌려내는 스이카의 발도.
이전까지는 무식하게 힘을 줘 검에 힘을 꾹꾹 눌러 담기만 했었다.
그러다 보니 뿌려냈을 때의 리바운드는 생각지도 못했고 말이다.
“감히!! 치워라!”
귓가로 조금 전 균열에서 기어 나온 데몬의 외침이 들려왔다.
몇 번이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자 단단히 뿔이 난 모양이었다.
원래도 뿔 난 새끼가 좀 참지 못하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키아아아---!”
“그르라아아--!!”
눈을 떠 나에게 달려오는 데몬들을 바라봤다.
숫자가 보통 많은 게 아니다 보니 발바닥 아래로 진동이 느껴졌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아는 가장 좋은 방법.
이전에 사용하던 걸 다시 한번 사용해보는 것이었다.
내 몸을 중심으로 백색 기운의 원형 경계가 그려진 후 그 안에 있는 모든 걸 베어내는 스이카의 발도.
스윽.
어느 정도 다가온 녀석들 바라보며.
철컥.
스이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자세를 낮췄다.
우우우웅---!!
…!
자세를 잡음과 동시에 내 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백색의 경계.
내가 펼쳐낸 경계였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팔이 부서지면서까지 움직이며 발도를 사용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경계의 범위가 닿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팔을 버려가면서까지 움직이며 발도를 뿌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려진 백색의 경계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넓어진 경계의 범위.
“허어.”
생각보다 더 극적인 변화였다.
데몬이 범위 안으로 들어오기 전 미리 펼쳐놓을 생각이었는데.
펼치고 나니 이미 꽤 많은 수의 데몬이 경계 안쪽에 발을 딛고 있었다.
“크르…?”
갑자기 자신을 포함 시킨 백색 경계에 잠시 당황하는 녀석들을 보며.
검집에서 나올 준비를 마친 스이카를 느꼈다.
“스으으.”
한차례 정돈한 호흡을 스이카에게 맞춘 후.
발도.
스이카의 흐름을 느끼며 검을 뽑아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여전히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뿌려지는 백색의 검기.
순식간에 뿜어진 검기가 경계 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몬의 우렁찬 함성이 가득했던 절벽 앞의 땅.
시끄러웠던 땅으로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경계 안에 있던 데몬들은 순식간에 자신을 지나친 무언가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후우.”
천천히 호흡을 뱉어내며 뿌렸던 검을 거둬들였다.
스릉… 철컥.
스이카가 다시 검집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푸화아아아악---!!
원형의 경계에서 붉은 선혈이 하늘로 솟구쳤다.
후두둑!
백색의 검기가 지나간 결대로 갈라져 떨어지는 데몬의 신체 부위들.
그제야 데몬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키아아악!!”
“키륵… 키르…!”
뭐가 자신을 죽인지도 모른 채 서서히 생명의 불씨를 꺼트리는 데몬들.
그런 녀석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가볍다.
미치도록 가벼웠다.
발을 딛고 스이카를 휘둘렀을 때도 팔에 무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응축되었던 힘을 뿌려내다 보니 그에 대한 반동은 전부 튼튼한 몸으로 버텨내고 있었던 것.
너무 가볍다.
지금은 달랐다.
이전보다 더 빠르고 넓은 검기를 뿌려냈음에도 부담은커녕 작은 찌릿함조차 없었다.
뿌리는 순간 묵직하게 느껴졌던 스이카도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씨익.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 전의 결과로 몸을 채워오는 엄청난 만족감.
돌산에서 내려온 뒤 사로카를 박살내며 느꼈던 희열이었다.
강해졌다.
아직 해볼 게 많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 한 번의 발도만으로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위로 도약하며 강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벅.
더 큰 만족감과 희열을 위해.
새까맣게 모여 있는 데몬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확신이 들었다.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채 발도를 사용해도 팔이 멀쩡할 거란 확신.
[이카로스 - 칼데아 윙]
화아아아---!
어두운 하늘 아래.
주변보다 더 어두운 연기가 나타나 등 뒤에서 일렁거렸다.
저벅… 저벅.
조금씩 걸음의 속도를 올리며.
날개의 연기를 터뜨릴 준비를 했다.
인지조차 불가능한 귀신의 백색 검기.
그런 검기를 보이지 않는 속도로 돌며 사방에서 뿌려 줄 생각이었다.
저벅.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디며.
간다.
날개의 연기를 터뜨렸다.
퍼엉!!
* * *
끼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아악---!
‘무… 무슨 일이냐!’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픽탄이 마른침을 삼켰다.
인간 세계의 정복을 꿈꾸며 호기롭게 나왔던 게 불과 5분 전이었다.
자신감과 기대감만이 가득했던 픽탄의 눈동자는 어느새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냐 대체!!’
균열을 나오며 누군가의 호흡을 발견했을 때.
픽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었었다.
마지막 전투 때 죽었다고 생각한 척준경이 살아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 척준경이 아니다.
호흡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에 익숙해진 눈.
눈에 들어온 사내의 모습에 픽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척준경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핏덩이 애송이였다.
- 척준경만 아니면 된다.
물론 그런 픽탄의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픽탄의 군대가 남자를 향해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때.
- 끼아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이 터지며 백색의 무언가가 흩뿌려졌다.
말도 안 되게 넓은 범위를 순식간에 채우며 군대를 훑은 검기.
몇 초간 픽탄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 푸화아아악--!
하늘로 부하들의 신체와 피가 솟구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예리하고 빠른 검기.
나름 강한 개체만 존재하는 픽탄의 부하들을 단 한 방에 베어버리는 엄청난 검기였다.
스멀.
부하들을 도륙한 게 검기라는 걸 알게 된 후.
픽탄의 안에서 정체불명의 불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몇 분간 안도하던 심장 역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인간이라 믿기지 않는 검을 보여줬던 척준경과 말도 안 되는 검기를 뿌리는 정체불명의 인간.
둘은 검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으득.
- 한꺼번에 달려들어라!!
계속해서 퍼지려는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픽탄이 부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막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
저런 검기를 뿌렸다면 사용자에게도 분명 리바운드가 있을 터였다.
- 다시 검을 뽑기 전에 죽여라!
남자가 회복해 다시 검기를 뿌리기 전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
여기까지가 몇 분 전의 픽탄이 내린 판단이었다.
픽탄의 명령이 내려지기 무섭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체불명의 검은 연기와 함께.
- 끼아아아아아아악--!
지옥이 펼쳐졌다.
계속 사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픽탄의 판단을 비웃듯.
쉴새 없이 사방에서 백색 검기가 뿌려졌다.
‘악… 악몽이다.’
잠깐으로 끝나지 않는 기나긴 악몽이었다.
이미 십 수 번의 검기가 뿌려지며 엄청난 수의 부하가 썰려 나갔음에도.
픽탄은 단 한 번도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검기가 뿌려지고 그곳으로 눈을 돌리면 이미 남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 검기를 뿌리고 있었다.
주춤.
본능적인 공포에 픽탄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척준경만 없으면 될 거라 생각했었던 픽탄.
주춤.
뒤로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서며 픽탄은 깨닫게 되었다.
그토록 두려워해 만전에 만전을 기하며 상대했었던 괴물, 척준경.
‘도… 도망… 가야 한다.’
지금 눈앞에서 자신의 부하를 빠르게 도륙하고 있는 건.
당시 척준경이란 괴물보다 더 끔찍하고 압도적인 악마라는 사실을 말이다.
끼아아아아악--!
* * *
“후우우우!”
스르륵…!
큰 호흡을 한 번 뱉어내며 서서히 사라지는 칼데아의 연기를 바라봤다.
정신없이 여기저기 이동하며 스이카를 휘두른 탓에 빠르게 소진되어버린 연기.
칼데아와 함께 들고 있던 스이카가 모습을 감추었다.
우득.
빳빳해진 목을 한 번 돌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휘유.
절로 휘파람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하는 군세였었다.
기세만으로는 누구든 씹어먹을 것 같았던 사기 충만한 군세.
그랬던 군세가 지금은 일부분만이 남아 사기는커녕 공포를 집어삼킨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안 베인 놈도 몇 마리 있네.
경계 안에는 있었지만 군데군데 단단한 갑주를 두른 녀석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운 좋게 갑주를 두른 부분에 검기가 닿아 목숨을 건진 것 같았다.
완전 지옥이 따로 없네.
내가 해놓고도 혀가 내둘러지는 광경이었다.
땅 한가득 신체가 굴러다니며 붉은 피가 넘쳐나고 있었다.
피가 넘쳐 흐르니.
쿨타임에 들어간 스이카와 칼데아.
이 둘을 대신하여 꺼낼 무기는 정해져 있었다.
[잭 더 리퍼 - 동기화]
조건은 이미 충분했기에.
기다릴 새도 없이 동기화를 해나갔다.
대부분 죽었다곤 하나 아직 꽤 많은 수의 데몬이 남아있는 상태.
다시 한번 살육전을 시작할 때였다.
스스스.
동기화와 함께 주변에 펼쳐져 있던 피가 몰려들었다.
“주… 죽여라!! 더 이상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
내가 더 이상 스이카를 사용할 수 없단 걸 알아차린 뿔 데몬.
주춤거리는 부하들을 한 번에 몰아넣으려는 것 같았다.
저 새끼는 뒤에서 아주 그냥.
거구인 덩치에 비해 몹시 겁이 많은 것 같았다.
아까부터 직접 나서긴커녕 서서히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 녀석.
넌 조금만 기다려라.
칼데아가 있을 때 죽일까 했지만.
척준경의 몸에 남았던 뿔 자국이 떠올라 잠시 남겨두기로 했다.
스르륵.
그렇게 평소의 동기화처럼 눈으로 붉은 피가 차올랐다.
응?
하지만.
잠시 후 깨달았다.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충분한 피와 광기가 몸과 정신을 감쌌지만.
스며들기 시작한 피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긴커녕 끝도 없이 내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
그리고 잠시 후.
온 세상이 붉은 피로 뒤덮이며.
“최적이다.”
쇠를 가는 듯한.
평소보다 훨씬 즐거워 보이는 듯한.
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