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피의 악마
여전히 한목소리 하는구만.
다른 이가 들으면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지만.
이미 충분히 단련이 된 상태였기에 반갑게 잭을 맞이했다.
이 배경만 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나타날 때마다 사방이 질척거리는 피로 물드는 배경.
이놈의 시뻘건 배경만큼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달콤한 향이 가득하다니, 황홀하군.”
배경만큼이나 뻘건 모습을 한 잭이 감미롭다는 듯 눈을 감았다.
역시 미쳤어.
한 배를 탄 전우였으나 여전히 그의 광기는 엄청났다.
주변에 가득하다는 달콤한 향은 고민할 것도 없이 혈향이었다.
피를 마치 달콤한 사탕 마냥 표현하는 잭 더 리퍼.
사탕의 범주가 무척이나 달랐기에 마주할 때마다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이해해줘야지.
피가 사탕이라 치면 지금 잭은 사탕 왕국의 한복판에 있는 거니까.
수많은 전투를 거쳐오긴 했으나 오늘만큼 피가 뿌려졌던 적은 없었으니.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잭을 이해하며 내젓던 고개를 멈추었다.
그나저나.
잭이 나타났다는 건.
악귀참도를 찾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게이지가 가득 찼었던 면도칼.
그 이후부터 면도칼을 사용해 피를 뿌릴 때마다 묘한 감각을 느꼈었다.
흩뿌려지는 피에 반응해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만큼의 피가 갖춰져야 발현되는 거였군.
“준비는?”
한참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잭이 날 내려다봤다.
준비라.
어떤 준비인지는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이미 쌓이고 쌓여 터지기 직전인 피의 광기.
잭은 광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사실 궁금하긴 했어.
동기화 때도 어느 정도의 광기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완벽히 내 자신을 내려놓은 건 아니었다.
동기화를 사용할 때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었기에.
혹여나 아군마저 썰어버리는 불상사를 대비해 열심히 정신 줄을 붙잡고 있었다.
“준비는 됐죠.”
“그럼 뭘 망설이지? 최적의 장소 아니던가.”
잭의 말대로였다.
나를 제외하고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장소.
정줄 놔보기에는 최상의 장소였다.
“제정신은 금방 돌아오겠죠?”
“걱정할 필요 없다. 피의 소모량이 엄청 날 테니. 피가 없으면 유지하고 싶어도 못하지.”
음!
만족스러운 잭의 대답을 들으며.
“그럼.”
뚜두둑.
“가볼까요.”
광기에 몸을 맡겼다.
* * *
온 세상이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몸으로 끝없이 흘러들어오는 피의 충만함.
비릿했던 피의 향기마저 지금은 달콤하게 느껴졌다.
몸에 달라붙어 끈적이던 피도 더 이상 찝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즐거움을 높여 주는 활력제 같았다.
그렇게 광기에 맡긴 채 멀어지는 정신을 느끼고 있을 때.
슈아아아아악--!
무언가 공기를 가르며 내게 날아들었다.
푸욱!
그대로 날아와 복부를 관통하는 데몬의 창.
“마… 맞았다! 몰아쳐라!”
스이카와 칼데아가 사라진 걸 반격의 기회라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처음으로 자신들의 공격이 통하자 신이 난 데몬들이 쉬지 않고 무기와 공격을 날려댔다.
푹푹푹푹푹…!!
셀 수 없이 많은 창과 검, 그리고 녀석들의 발톱과 이빨이 내 몸에 박혔다.
꼬챙이도 이런 꼬챙이가 없겠다 싶을 정도로.
수많은 적의 공격이 내 몸을 꿰뚫고 찢어나갔다.
찌릿.
하지만.
약간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키킥…!”
오히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적의 공격에 몸 사방이 꿰뚫렸음에도.
내 입에선 참을 수 없는 웃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죽어라!!”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서일까.
뒤에만 있던 뿔 데몬이 내게 달려들었다.
척준경에게 했던 대로 독이 담긴 뿔을 박아 넣는 뿔 녀석.
“크… 크하하하하!”
이겼다고 생각해서인지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뿔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 치명적인 독이 담겨있는 듯했다.
가소롭다.
이겼다고 착각하며 웃고 있는 녀석을 보니 너무 가소롭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백번 천번 피하고도 남았을 느린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맞아 준 이유는 하나였다.
굳이 피할 필요가 없으니까.
“크하하… 하…. 하…?”
나와 눈을 마주친 뿔 데몬.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꾸룩.
사방에 있던 피가 끊임없이 내 몸으로 몰려들었다.
툭… 툭 툭 툭.
마냥 몰려들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뚫린 상처를 메꾸며 날아들었던 적의 무기를 밀어내는 붉은 선혈.
죽지 않는다.
본능적인 확신이 들었다.
사방에 이렇게 많은 피가 있는 이상.
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무한한 수혈.
툭.
그렇게 몸을 꿰뚫었던 마지막 무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몸속에 응축되어 있던 광기를 터뜨렸다.
[잭 더 리퍼 - 블라드]
“키하아아아아아아!!”
* * *
비틀.
“쿨럭!”
픽탄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었다.
푸확!
푸직!
콰드득!
뒤에선 듣기만 해도 다리가 풀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군세가 피를 두른 악마에게 무참히 도륙당하는 소리였다.
‘도망가야 해.’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성급한 마음과 판단.
한 번의 판단으로 픽탄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다.
- 키하아아아아아!!
광기 섞인 웃음이 터지고.
정신 차렸을 때 자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인지하기도 전 양 다리가 날아간 채로 말이다.
‘못 이긴다.’
악마.
저걸 정의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양손에 피로 만들어진 검을 들고 있는 악마.
악마는 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주변의 데몬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대체 뭐냔 말이다!!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픽탄 역시 데몬의 세계에서 나름 오랜 시간을 보낸 개체였다.
그동안 강하다는 데몬은 수도 없이 봤지만.
저 정도로 공포를 집어삼키게 하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콰직! 쿠득!
악마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모든 피가 악마를 뒤따랐다.
마치 주인의 주변을 보필하며 따라다니는 모양새였다.
흩뿌려진 피가 워낙 많아서인지 흡사 피의 폭풍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짐승…!’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유연함과 민첩성.
양손의 검을 휘두르는가 싶더니 집어 던지고, 검으로 찌르는가 싶더니 이빨로 목을 물어뜯었다.
집어 던져진 검은 흩어져 사라졌지만 어느샌가 다시 손에 생성되어있는 피의 검.
목을 뜯을 때의 이빨도 피가 모여들어 거대한 이빨로 변한 상태였다.
푸욱!
그뿐만이 아니었다.
픽탄을 도망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불사신.’
눈앞의 악마는 죽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공격에 꿰뚫려도 약간의 경직조차 없었다.
계속해서 피를 몰고 다니며 학살을 즐길 뿐이었다.
파지직-- 지직.
악마가 학살에 눈이 먼 사이.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 모았던 부하들을 다 던져주며 간신히 균열 앞까지 기어 온 픽탄.
픽탄이 어금니를 깨물며 열려있는 균열을 바라봤다.
모든 군세를 잃은 채 이런 부상마저 안고 들어간다면.
균열이 언제 다시 열릴지는 정말 미지수였다.
으드드득!
미칠 듯한 분함에 픽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물어 잇몸에선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째서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인간이 가로막아 수백 년을 허비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쓰러뜨린 뒤 다시 힘을 모아 이번에야말로 밖을 향해 출정할 생각이었는데.
이번엔 아득한 경지의 괴물이 픽탄과 군대의 앞을 가로막다 못해 산산조각 내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아!!’
피의 짐승에게 들킬까 차마 밖으로 소리를 지르진 못한 픽탄이.
마음속으로 피를 토하며 울화 섞인 비명을 질렀다.
비척.
분함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기어 균열 안쪽으로 들어간 픽탄.
픽탄이 들어감과 동시에 균열이 닫히기 시작했다.
‘분하다!’
픽탄이 피눈물을 흘리며 닫혀 가는 균열 사이로 밖을 바라봤다.
마무리를 하려는 건지 악마의 몸으로 모인 피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악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픽탄이 쌓인 응어리를 뱉어냈다.
“꼭 다시…! 다시 돌아오리라!!”
쿵…!!
* * *
광기에 몸을 맡긴 채 시작한 학살.
학살이 어느 정도 지겨워졌을 때, 본능적으로 이만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여라.”
한 마디에 뿌려져 있던 모든 피가 모이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양에 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모여든 피.
모여든 피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우우우우웅…!!
빠르게 회전한 탓일까.
주변으로 피 안개가 짙게 끼어지고.
충분한 회전력을 얻었다고 생각이 든 순간.
“피의 폭발.”
모여들었던 피를 터뜨렸다.
푸화아아아아악!!
피는 수천 수만 개의 면도날이 되어 사방으로 뿜어졌고.
그나마 사지의 일부분만 날아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녀석들까지도 면도날의 폭풍에 집어 삼켜졌다.
….
조금 전까지 학살이 벌어졌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벽 앞 땅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스으으으…!
침묵과 함께 개이기 시작한 피의 안개.
눈앞을 뻘겋게 물들였던 피가 걷히며 정신이 맑아졌다.
“와…우.”
맑아진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본 첫 소감이었다.
미쳤네.
순간 꿰뚫렸던 감각을 떠올리며 몸을 살폈다.
말끔했다.
입고 있던 옷에 구멍이 나긴 했지만.
몸엔 작은 생채기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얼레.”
그렇게 몸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균열이 닫히고 있는 걸 발견했다.
틈 사이로 미세하게 보이는 픽탄의 모습.
뭐라고 울부짖는 걸 보니 복수를 다짐하는 것 같았다.
이 새끼는 끝까지 졸렬하네.
부하들은 다 던져놓고 혼자 균열 안으로 도망치다니.
아마 척준경과의 싸움에서 학습된 모양이었다.
호다닥.
빠르게 균열 앞으로 달려갔다.
시간에 쫓기고 있는 몸이기에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척준경 - 악귀참도]
균열은 딱 봐도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지체 없이 악귀참도를 꺼내 들었다.
사락.
둘둘 감긴 성해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악귀참도.
천천히 성해포를 푸는 동안 확신이 들었다.
눈앞의 균열을 벨 수 있다는 확신.
“후우.”
작은 심호흡을 한 뒤.
성해포가 풀린 악귀참도를 균열로 가져다 댔다.
서걱.
신기한 감각이었다.
분명 형체가 없는 균열임에도 살을 베듯 파고 드는 악귀참도.
검날에 닿은 균열의 감각을 느끼며.
사아악--!
악귀참도를 위로 휘둘렀다.
* * *
반으로 갈라진 균열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
들어가기 무섭게 벙찐 뿔 데몬의 얼굴이 보였다.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겁에 질리다 못해 얼굴이 허옇게 질린 녀석.
“크아아아아---!”
“키이이이이익!!”
그리고.
뿔 데몬이 있던 공간을 감싸고 있던 균열이 사라지며 새로운 데몬의 군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균열을 나서는 출구가 하나일 뿐 그 뒤엔 얼마만큼의 데몬이 더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던 척준경.
척준경의 추측대로였다.
흠.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은 몹시 즐거운 듯한 얼굴들이었다.
내 덕에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듯한 얼굴들.
신이 나 소리를 질러대는 데몬들과 내가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면 출구가 없는 광활한 균열 안 공간을 바라본 후.
“야 뿔쟁이.”
언어를 알고 있는 뿔 데몬을 불렀다.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녀석.
“너 불가마라고 아냐?”
겁에 집어 삼켜져 뇌가 정지한 탓일까.
뿔 데몬은 대답하지 못한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몰라도 돼.”
[유탈라스 - 동기화]
[전신 의태 - 갑주]
비늘로 온몸을 빠짐없이 둘러싼 뒤.
뿔쟁이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알게 될 테니까.”
[라 - 불꽃의 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