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탈출 방법
덜그럭.
덜그럭.
“너 힘 세구나.”
앞서 걷던 노운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 키보다 큰 높이와 넓이의 꾸러미.
피난을 가도 이렇게는 안 가겠다 싶을 정도로 꾸러미는 거대했다.
“이거 열 개는 더 들 수 있어.”
안에 뭐가 들었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못 들면 수리검이나 비늘을 꺼내서라도 들면 되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오호.”
노운이 특유의 눈빛을 번뜩이며 날 이리저리 훑었다.
노운은 내가 처음 꾸러미를 들 때부터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도와줄게.
꾸러미를 들기 직전 노운이 한 말이었다.
솔직히 놀랐었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꾸러미를 들려고 하자 다가와서 손을 건넸던 노운.
아마도 꾸러미의 크기를 보고 내가 혼자 낑낑대며 들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힘내자고.”
살짝 웃어 보인 노운이 고개를 돌려 앞을 응시했다.
이런 곳에 은신처가 있다니.
신기하네.
먹을 걸 다 먹고 정적이 찾아오려는 찰나였다.
- 내 은신처가 있는데 거기로 가자.
안정된 장소에서 라면을 먹기 위해 나름 절벽 밑으로 파고 들었지만.
누군가 안정적인 장소가 맞느냐 묻는다면 1초의 고민도 없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뒤에 절벽을 끼고 있다 뿐이지 앞은 아무런 바람막이도 없이 뻥 뚫린 장소였다.
저벅.
걸음을 옮기며 앞에 있는 노운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때리려는 건 아니었다.
내 통수치려는 건 아니겠지.
단지 뭐랄까.
누군가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어서일까.
이대로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되려 내가 맞는 거 아닐까란 의심병이 도졌다.
아는 게 너무 없어.
이름이 노운이란 거 말곤 알고 있는 게 전혀 없었다.
애초에 뭘 물어보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니 방법이 없었다.
진짠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반응 자체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지만.
정말 기억상실증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구라치지마! 라고 강하게 밀고 나가기는 힘들었다.
어차피 따라가야 하니까.
의심은 들지만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 여기 나가는 방법, 아는데?
처음에 들었을 땐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잠시 고민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노운은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안다고 대답을 해왔다.
사과 하나 더 먹으면 쫓아내려고 했는데.
꾸러미에 식량은 썩어날 정도로 많았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소비할 순 없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이런 황폐한 땅에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존재하는지도 불투명했다.
다행이야.
내게 사과 하나만큼의 포용력이 더 있어서.
못 참고 이전 사과를 먹을 때 쫓아냈으면 저 대답을 못 들을 뻔했다.
얼마나 기가 차고 억울한 일이던가.
사과 하나를 못 내줘서 탈출 방법을 잃어버릴 뻔했으니 말이다.
- 방법은 알지만 쉽지 않아.
여기서 조금 신뢰가 생겼었다.
사기꾼이었다면 온갖 귀를 홀리는 말로 날 꼬드겼을 텐데.
노운은 턱을 문지르며 쉽지 않다고 말을 덧붙였었다.
- 방법은 알지만 필요한 것들이 몇 개 있거든.
퀘스트 깨는 느낌이네.
어렸을 적 했던 게임의 퀘스트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으나 필요한 재료는 내가 모아야 하는 상황.
- 여기 들어올 때 목걸이를 사용했다고 했지? 그런 신통한 바인딩 능력은 만들 수 없지만, 이 세계 밖으로 튕겨내는 건 만들 수 있어.
정확한 제작 방법이나 동작 방식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듣는다 한들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흠.
개발자나 과학자였으려나.
파편 같은 기억.
어떻게 그런 제작 방법은 기억하고 있냔 말에 노운은 대답했었다.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하나로 모을 순 없지만.
드문드문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고 말이다.
“노운, 망자의 세계는 전부 이렇게 황폐하기만 한 거야?”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노운이 있다면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
“아니,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이곳도 다른 세계와 같은 세계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럼 먹을 걸 구할 수도 있어?”
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떠돌이처럼 지내지만 집단을 이룬 이들도 많거든. 그런 곳엔 네가 먹을만한 것들이 있을 거야.”
몹시 다행이었다.
아직 식량이 가득하긴 하지만, 바닥 났을 때 보급의 가능 여부에 따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수도 있었다.
다행은 다행이고.
의외네.
첫 방문 때의 임팩트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있어 망자의 세계는 생명이라곤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불모지란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노운을 처음 만났을 때도 기겁을 하며 넘어갔었다.
한 명도 모자라 집단을 이룬 이들이 있다니.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지.
노운의 말대로 다른 이도 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모두가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을 잃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기억을 가지고 망자의 세계로 온 과정과 이유 등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척.
앞서 가던 노운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도착했다는 말에 고개를 들자.
역시 발명가였어.
란 생각이 절로 드는 공간이 나타났다.
지형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동굴 비스무리한 공간.
공간 속엔 엄청난 양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잡동사니… 라고 하면 실례니까.
잡동사니란 단어는 넣어두기로 하고 앞으로 걸어가 공간을 눈에 담았다.
“내 실험실이자 오락실, 오락실이자 연구실이야.”
평소 노운이 뭘 하고 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공간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때마다 호기심이 느껴지는 물건을 만지작거릴 듯한 느낌.
“뭐랄까, 이곳에 오기 전의 난 이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거 같긴 한데… 이곳은 생각만 하며 보내기엔 너무 심심하더라고.”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인 노운이 아무렇게나 물건을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 자리 피면 돼. 오늘은 좀 쉬고 내일 출발하자.”
덤덤이 말을 건네는 노운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준 뒤.
꾸러미에서 텐트를 꺼내 설치를 시작했다.
* * *
“여기 엄청 따듯하네.”
텐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뭐지.
내 텐트 안에 다른 사람이 있어.
잠시 눈을 끔뻑였다.
- 이걸 텐트라고 부르는 거야?
처음 구매하기도 했고 크기도 꽤 큰 걸 샀기에 조립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 과정을 시작부터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고 있던 노운.
노운은 텐트가 완성되기 무섭게 들어가서 누워봐도 되냐고 질문을 건네왔었다.
설치 지분을 인정해주긴 해야 하니까.
이것이 내 텐트를 노리고 있는 건가 의심도 들었지만.
그렇게 의심하기엔 설치하는 동안 노운의 활약이 컸다.
- 그건 그렇게 끼우면 안될 거 같은데.
텐트도 처음 보는 놈이!
라고 처음에 생각했지만 노운이 건넨 조언 중 틀린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설명서를 보면서 개삽질을 하는 것보다 노운이 한 번 스윽 훑어본 후 건네는 조언을 따라하는 게 더 빠르고 정확했다.
“여길 막아두는 구조라 온도가 유지될 수 있는 거구나.”
안에서 부시럭대며 텐트를 탐구하는 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못 보던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해서일까.
착각일 수도 있지만 처음보다 더 신난 듯한 목소리였다.
슥.
탐구에 푹 빠진 노운을 남겨둔 채.
오랫동안 지냈다는 노운의 은신처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폈다.
엄청 만지작거린 모양이네.
쭈그리고 앉아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각기 다른 생김새와 용도처럼 보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다 빛이 바랠 정도로 닳아 있단 것이었다.
흐음.
닳아버린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짠한 기분이 들었다.
온지 하루 밖에 안됐는데도 엄청난 황폐함과 적막함에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세계였다.
그런 세계에서 노운은 오랜 시간을 동굴의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며 홀로 보내왔다.
적막한 세계에 와서 그런가.
오늘 따라 어째서 이런 짠함이 느껴지는지는 의문이었다.
평소였다면 남의 일이라고 나름 재밌게 잘 살고 있네! 하고 넘겨버렸을 텐데.
이불도 없이 자는 건가.
망자의 세계에서 이불 생각을 하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어쨌든.
노운의 공간 어디에도 이불이나 덮고 잘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
쯧.
가만히 바라보다 혀를 한 번 찬 후.
아직도 부스럭대고 있는 텐트를 돌아봤다.
이불도 넉넉하겠다.
어차피 8인용 텐트니까.
“노운, 거기서 자볼래?”
질문이 건네지고 잠시 후.
“텐트란 것에서의 잠이라… 흥미로운 탐구가 되겠는데? 좋아.”
아직까진 추정이지만.
과학자다운 노운의 대답이 들려왔다.
* * *
“거의 다 왔어.”
오늘도 어김없이 눈에 보이는 건 노운의 뒤통수였다.
거의 다 왔다며 앞에서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노운.
은근 쿨하네.
떠나는 길에 노운이 챙긴 건 특이하게 생긴 망토 두 개가 다였다.
- 이걸 쓰고 있으면 망자가 날 알아보지 못하거든.
노운은 엄청난 발명가이자 과학자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이 든 부분이었다.
망자들은 조금만 다가가도 내 존재를 눈치채고 달려들었었다.
이런 살벌한 세계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건가 궁금했었는데 저런 사기적인 망토가 있었다니.
- 너도 하나 써.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망자를 만난 적은 없기에 효과가 검증되진 않았지만.
어찌 됐거나 쓰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해지는 망토였다.
그나저나.
무슨 부탁이려나.
하루종일 어두워 밤과 낮의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 기준상 어젯밤.
노운과 난 각각 넓직한 텐트의 구석탱이에 자리를 잡고 누웠었다.
- 이곳이 아쉬운 게 있다면 빛이 너무 적다는 거야. 눈부신 빛이 있어야 그 빛에 반사되는 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할 텐데 말이야.
누가 과학자 아니랄까봐.
노운은 잠 드는 순간까지 여러 과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꾸러미에서 테이프를 꺼내 입을 막아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로 말이다.
- 아 맞다. 내가 널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너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
올게 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무려 세계를 건너뛰게 해주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는 건 말이 안됐었다.
- 뭐… 뭔데?
약간 목소리가 떨렸던 것 같았다.
뭘 요구하려나 긴장한 탓이었다.
- 때가 되면 말해줄게.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모호한 말을 마친 뒤 노운은 잠에 들었었다.
말해 줄 생각이 아직은 없으니 되묻지 말라는 무언의 의사표현인 것 같았다.
“다 왔다.”
나중에 무슨 부탁을 하려나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도착했다는 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첫 번째 재료가 있는 곳이야.”
간단한 소개를 들으며 노운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또.
꼴깍.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