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망자의 군대
천천히 거닐며 주변을 둘러봤다.
문이 닫히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찌저찌 도착한 토라소.
분위기 봐라.
걷고 있는 것 뿐인데도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땅이었다.
생명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듯한 땅.
오히려 있는 게 더 놀라울 것 같았다.
와삭!
한 명 있긴 있네.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앞장서 걸으며 사과를 와삭와삭 먹고 있는 노운.
가방 안에는 여러 과일이 있지만 유독 사과를 좋아하는 노운이었다.
아까는 뭐라 했던 거지.
장막을 찢고 들어온 직후, 노운은 내게 다가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었다.
위반자가 아니라 애초에 따를 필요가 없었다는 기묘한 말이었다.
- 여기라면 길을 열 수 있을 거야.
무슨 의미냐고 묻자 노운은 웃으며 말을 돌렸었다.
- 내 부탁 들어주는 거 잊으면 안 돼.
재차 약속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체 부탁이란 건 뭘까.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왠지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겠는 녀석이다.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땐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기도 하고.
착한 건 확실해.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되진 않았으나.
노운이 나쁜 놈이 아니란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내가 자거나 걷는 동안 등 뒤에 칼을 안 꽂은 것도 그렇고.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조금의 악의도 없는, 백치미에 가까운 순수함만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저벅.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노운을 바라봤다.
사과를 먹는 모습만 보면 여유롭지만 노운의 걸음걸이는 어째선지 빨라져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걸어? 뭐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바로 옆으로 다가가 묻자 노운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건넨 말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진짜였냐.
어쩌다 때려 맞춘 상황에 잠시 멍을 때리자.
노운이 계속 걸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장막은 자연적인 게 아니야, 알아차린 거지.”
“알아차리다니… 누가?”
“망자의 세계를 다스리는 자, 그리고.”
걸음을 멈춘 노운이 날 응시했다.
“널 쫓아오는 자.”
꼴깍.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망자의 세계를 다스린다길래 오 대단한 사람인데? 라고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날 쫓아오고 있다니.
좋은 일로 쫓아오는 건 아닐 것 같았다.
“그는 네가 토라소에 도착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장막을 내린 거고.”
내가 그걸 시원하게 찢어버렸구만.
쫓아오고 있는 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장막을 찢음으로써 아마 화를 한층 더 돋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세계를 다스리는 사람이 날 왜 쫓아오는 거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
“….”
“…?”
만난 이후 노운이 처음으로 보인 표정이었다.
뭐랄까.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황당하고 해야 할지.
어찌 됐든 얼탱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망자를 죽였잖아.”
아.
기억의 저편으로 옮겨져 잊어버리고 있었다.
도운을 구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뽐내며 내게 먼저 달려든 건 망자들이었으니까.
내가 먼저 가마에 올라가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큰일 날 일이었구나.”
이 세계에 널려 있는, 많고 많은 망자 중 일부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인간을 향해 먼저 달려드니 데몬과 비슷한 존재라 여겼기도 하고 말이다.
“망자는 죽어선 안 되는 존재야. 이곳은 다른 세계에서 죽거나 육신을 잃은 자들이 오는 곳이고, 망자들은 이곳의 규율이 깨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존재니까.”
- 망자는 다른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맨 처음 망자의 길에 들어왔을 때 로인이 해준 말이었다.
다른 법칙을 가지고 있기에 죽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단순히 망자 한 마리를 죽인 게 아니라.
이곳의 법칙을 위반했다는 건가.
아까 노운이 혼잣말로 위반자라 말한 게 이제야 이해가 갔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
난 로마의 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고, 그렇기에 법을 관장하는 자가 쫓아오고 있다.
나름 명분이 충분한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넌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는 거야?”
구덩이의 여우가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건 멍냥이가 알려줬다 치더라도.
토라소로 향해야 한다는 걸 노운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멍냥이가 알려주려는 대도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한 노운이었다.
거기다 망자를 다스리는 자의 이야기까지.
노운이 누구인지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만나 봤어.”
“!?”
“내가 이곳에 맨 처음으로 왔을 때… 정확히는 내가 온전히 떠오르는 기억의 시작에, 그가 있었어.”
한 번 뜸일 들인 노운이 입을 열었다.
“망자의 왕, 카사락.”
* * *
노운을 따라 토라소의 가장 높은 건축물로 올라왔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이였다.
찰칵… 찰컥.
건축물의 정중앙에서 노운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제사나 의식에나 쓸법하게 생긴 제단이었다.
- 엄청난 수의 망자를 거느리고 있었어.
망자의 왕 카사락.
노운 역시 그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다고 했다.
군세의 왕이며 망자의 세계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카사락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전부라고 설명했다.
- 가자, 시간이 없어.
여기까지 말한 후 노운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까 전보다 훨씬 더 빨라진 걸음이었고, 그렇게 걸어 도착한 곳이 이 건축물이었다.
대체 뭐가 살았던 거야.
건축물까지 오며 느낀 건 알 수 없는 웅장함과 낯섦이었다.
조금 과한가 싶지만 밖에서 말하는 코스믹 호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엄청 크네.
토라소에 있는 건물은 다 부숴졌지만 그 크기가 남달랐다.
한국에서 발견됐다면 외계인 혹은 거인이 살았을 거라 여겨질 정도였다.
거기다 건물 곳곳엔 다양한 벽화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듯한 그림.
누가 새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벽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단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약육강식.
벽화엔 선명히 나와 있었다.
커다란 존재가 작은 존재를 잡아먹고.
그 커다란 존재를 더 커다란 존재가 잡아먹는 듯한 내용이 말이다.
그래서 포식자의 고향이라 불리는 건가.
내가 느낀 벽화의 의미가 맞다면 이곳은 포식자들에게 고향임과 동시에 가장 치열한 전쟁터였다.
포식자로 태어났지만 다른 개체보다 약하다면 곧바로 잡아먹히고 마는 동족 포식의 현장.
그렇기에 구덩이의 여우는 도망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약하면 잡아먹히고 마는 이 미친 장소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철컥…!!
…!
무언가 정확히 들어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여기야, 여우 구슬 좀.
건축물에 올라오기 무섭게 구슬을 받아갔던 노운.
제단 여기저기를 조립하는 듯하던 노운이 구슬을 끼우는 데 성공하는 소리였다.
우우우우…!
아무 일도 없나 싶던 제단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색이라고 표현하긴 힘들지만 굳이 말하자면 분홍과 파랑이 섞인 오묘한 빛이었다.
“….”
그리고 왠지 모를 아련한 눈으로 빛을 바라보고 있는 노운.
“다 된 거야?”
무언가 일어나는 반응에 묻자 노운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빛은 길을 열 수 있다는 신호일 뿐이야.”
제단에 손을 올린 노운이 말을 이었다.
“토라소는 망자의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문이 열렸던 장소야. 그때 열렸던 문의 기운이 남아있기에 이곳으로 온 거고.”
무언가 기억이라도 난 걸까.
아까와는 노운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노운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그 문을 통해 왔어.”
“!!”
파지직.
뭔가를 더 물어보기도 전에.
노운의 손에서 붉은 스파크가 일어났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스파크였다.
“문을 열기 위해선 구슬에 담긴 힘과 토라소에 흩어져 있는 길의 기운을 합쳐야 해.”
파지지직…!
더욱 더 커져 건축물 전체로 퍼지는 스파크.
스파크가 퍼지자 토라소 여기저기에서 희미한 빛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여우 구슬과 노운의 스파크에 이끌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기다려보자.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 노운을 지켜보고 있을 때.
쿠구구구…!
진동이 느껴졌다.
“…?”
앞에서 일렁이는 스파크와 별개의 것이었다.
발아래로 느껴지는 무언가의 울림.
땅을 통해 건축물의 위까지 느껴질 정도로 울림은 거대했다.
“이런.”
스파크로 기운을 모으던 노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늦었구나.”
늦었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노운에게 묻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땅 전체를 덮으며 밀려들고 있는 서늘한 푸른빛의 무리가 말이다.
하… 무슨 해일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밀려드는 빛의 숫자는 엄청났다.
망자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 카사락.
군세를 이끈다길래 얼마나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있나 했는데.
지금 대충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내가 예상하던 숫자의 백 배는 되어 보였다.
“늦었지만, 괜찮지?”
뒤에서 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겁을 집어먹거나 주저앉기 마련인데.
노운은 주저앉긴커녕 여유로운 목소리로 괜찮냐 묻고 있었다.
“그럼.”
굳이 노운을 향해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그저 밀려드는 군세를 바라보며 몸을 풀었다.
뚜둑.
“괜찮고말고.”
“길은 걱정하지 마, 내가 내보내 줄게.”
괜찮다는 말에 노운의 확신에 찬 답이 돌아왔다.
내보내주겠다는 간단한 대답.
아무런 보증도 근거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 또한 확신이 들었다.
내가 나갈 수 있는 길을 노운이 열어 줄 거란 확신이 말이다.
저벅.
군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척준경 - 악귀참도]
세계의 룰을 어기게 해주었던 검을 꺼냈다.
“그아아아아---!”
카사락의 군세는 소름 끼치는 함성과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살벌하게 생겼네.
어느 정도 다가오자 녀석들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부터 보이던 푸른빛은 망자의 눈과 입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 수가 하도 많아 푸른빛의 물결로 보였던 것.
쿠구구…!
“…?”
그렇게 엄청난 기세로 몰려오던 망자의 군대.
끝까지 달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군대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나와 노운이 있는 건축물과 거리를 둔 채 완전히 멈춰선 망자의 군대.
다그닥… 다그닥.
해골마와 함께 거구의 망자가 걸어 나왔다.
저놈이군.
아직 자기소개를 한 건 아니었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머리에 씌워져 있는 왕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저 걸어오고 있는 게 다인데도 느껴지는 엄청난 위세.
수많은 망자들 중 대장이 있다면 저놈일 게 분명했다.
“규율을 어긴 자여, 어딜 가려 하는가.”
낮으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가 실려 귀로 명확하게 전달되는 목소리였다.
귀 시리네.
목소리에서 온도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시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는 차가웠다.
“보시다시피.”
카사락을 향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도망가려고 했지.”
가벼운 내 대답에도 카사락은 화를 내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있는 노운을 바라볼 뿐이었다.
“….”
그리고 잠시 후.
노운을 바라보던 카사락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연금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