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우선순위
서울에 위치한 헌터 중앙청.
방에 앉은 강태황과 기태랑이 조용히 모니터를 바라봤다.
하루가 지났지만 여전히 뉴스의 메인은 훗카이도에서 나타나 활약한 무기왕이었다.
“신출귀몰 하구만.”
강태황의 혼잣말에 기태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요, 홍길동도 아니고.”
이미 몇 번째 보고 있는 건지 몰랐다.
이른 아침 료코 장관의 인터뷰로 알려지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대체 뭐로 베고 있는 거야?”
늦은 오후엔 멀리서 촬영된 듯한 영상까지 올라와 한바탕 더 불을 지폈었고.
강태황과 기태랑은 몇 번이나 같은 영상을 반복하며 멍하니 보는 중이었다.
여러 번 본다고 해서 저게 뭔지는 알 길이 없겠지만, 뭐랄까.
스케일이 너무 엄청나서 계속 반복해 돌려보게 되는 광경이었다.
“위에서 얘기가 들리더군. 오랫동안 교착 상태였던 유물 반환 협상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고.”
“무기왕 덕분인 거죠?”
“공식적으로 이유를 밝혀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봐야지.”
굳이 이유를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국 소속 헌터에게 훗카이도가 구해진 것.
한국도 아닌 일본에서 뜬금없이 협상 재개 운을 띄운 이유였다.
“개인적으론 감사한 마음이 담겨있겠으나, 일본으로선 자신들은 도움을 받고 입을 닦는 나라가 아니다! 라는 대외적인 홍보 효과도 있으니 손해 볼 건 없을 거야.”
“그렇죠, 지금까지 반환하지 않고 버텨왔던 약간의 자존심만 상할 뿐이겠죠.”
고개를 끄덕이던 강태황이 눈살을 찌푸렸다.
뉴스에 떠 있는 자막.
자막에선 무기왕을 한국 국가직 소속 10급 헌터로 소개하고 있었다.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아? 괴리감도 크고.”
강태황이 뭘 말하는지 알기에 기태랑도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든 말이 안 되는 급수였다.
저런 활약을 하는 헌터가 10급이라니.
세계 각국에서 한국의 급수 체제에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내용이었다.
“VIP도 이전부터 무기왕한테 관심이 많았던 거 알지? 정체를 알아보라는 요청도 여러 번 왔었고.”
“네, 알죠. 둘러대시느라 진땀 좀 빼셨잖아요.”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백운은 자신이 무기왕이란 사실이 알려지는 걸 꺼리고 있었다.
- 알려지면 어쩔 수 없죠 뭐!
절대 비밀까진 아니어도.
가능하다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인드.
강태황 역시 그걸 알기에 VIP의 요청이 올 때마다 보안이나 현재 사정 같은 이유들을 대며 불가능이란 답을 보냈었다.
“참 겸손한 친구야. 보통이면 내가 무기왕이다! 알리고 싶어서 환장했을 텐데 말이야. VIP께서 계속 요청하다 뜸해진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거든. 스스로를 감춰서 낮추려는 겸손한 사람을 강제로 밝히는 건 옳지 않은 거 같다고 말씀하셨었지.”
“네… 네.”
이번 말엔 약간이지만 기태랑이 말을 더듬었다.
‘아닌 거 같은데.’
기태랑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터였다.
기태랑과 마찬가지로 돌산에서 백운과 붙어 지냈던 비광.
비광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강태황의 말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같은데가 아니고 절대 아니지.’
이렇게 생각하는 건 단순히 지금까지 봐온 백운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태랑과 비광 역시 백운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정체를 숨기는 것이냐고 말이다.
- ….
백운은 뭐라고 뚜렷하게 대답하지 않고 얼버무렸으나.
두 사람은 순간 떠오른 백운의 표정을 잃었었다.
‘지저분한 이유일 거야.’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하는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노골적인 표정이었다.
“어쨌든 다시 급수 얘기로 돌아와서.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어. 헌터청 고유의 권한이라 지금까지 말을 못했었는데, 무기왕의 급수 조정이 좀 필요할 거 같다고.”
“많이 참은 거죠. 지금까지 아무 말 없었던 거 보면.”
강태황과 기태랑도 예전부터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
‘승급 신청은 헌터 본인의 권한이라 별말 안 했었지만.’
백운이 국내에서만 활동한다면 모를까, 해외에서도 유명인이 되어버린 이상.
이대로라면 한국의 헌터 급수 체계에 대한 의문이 항상 생겨날 터였다.
스윽.
강태황이 기태랑을 쳐다봤다.
“자기 급수를 올리려고 필사적인 게 보통이라 이런 선례가 없긴 했지만… 이번만 먼저 연락해보자고. 헌터청에 들려서 급수 시험을 다시 보라고 말이야. 정체는 지금처럼 잘 지켜준다 말하고.”
“알겠습니다.”
대답한 기태랑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볼일이 있는 건지 백운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훗카이도 본부에 머무르고 있었다.
“제가 연락을 남겨둘게요. 가능하다면 빠른 시일 내에 헌터청으로 오라고.”
* * *
“후우! 개운하구먼.”
끼익.
문을 열기 무섭게.
욕실을 가득 채웠던 수증기가 밖으로 뿜어졌다.
조선시대의 비와 바닷물로 폭삭 젖어버렸던 몸.
소금물이라 그런지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 투구에 뭔가 비밀이 있는 거 같아요…!
아까 유물관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기하느라 애먹었네.
옆에서 보고 있다 깜짝 놀란 료코에 나도 놀란 척 연기하느라 진땀을 흘렸었다.
신기하다고 되뇌며 애먼 투구만 수십 번 쓰다듬은 건 물론이었다.
그나저나.
털썩.
의자에 몸을 앉히며 바다에서 본 것들을 떠올렸다.
누구였을까.
조선시대 장수와 바다! 라고 했을 때 가장 떠오르는 인물이 있긴 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으음.”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까 본 것만으로 이순신 장군이라 단정짓는 건 무리가 있었다.
조선시대와 바다라는 걸 제외하면 딱히 매칭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장군님의 무기라 하면 쌍룡검인데.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이유였다.
보통 충무공 이순신의 무기! 하면 떠오르는 게 쌍룡검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완전 처음 보는 활이었어.
본 적이 있다면 잊을 수 없는 생김새였다.
거대한 활은 일반적인 재질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전체가 바다색으로 된 광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타탁탁.
봤던 걸 잊지 않도록.
생각을 정리하며 씻기 전에 열어뒀던 문서에 옮겨 적었다.
무슨 광물인지라도 알면 찾기 수월할 텐데.
# 광물 알아보기.
활을 찾을 때 시도해볼 만한 일도 기록해두었다.
# 조선시대 해군 장수 알아보기.
당장 떠오른 건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장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데몬과 싸운 장수… 로는 못 찾겠지.
톡… 톡.
기록해둔 문서를 보며 손가락을 두드리다.
탁.
문서를 덮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투구를 통해 갔던 바다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장수라면 한반도 근처의 바다일 확률이 높았다.
거리상으론 더 가까운데.
아까 본 장면들 말곤 단서가 없으니.
가깝다 해도 빨리 찾을 수 있다 보장할 순 없었다.
여러 가지 알아봐야 할 것도 많았고 말이다.
우두둑.
“끄어어…!”
쭈욱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먼저 찾던 거부터 찾아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서려는 사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백운 님, 미라코입니다!”
“네!”
대답하며 문을 열자.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한 미라코가 들고 있던 테블릿을 건넸다.
“이건…?”
“한국 헌터청에서 온 메시지에요. 백운 님께 전달해달라고 하셨어요.”
뭐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액션캠으로 찍은 게 있을 때 영상을 보내주고, 영상에 대한 후원금을 받는 것.
그리고 데몬 처치에 대한 보상금을 받는 것.
이것들 말고는 딱히 헌터청에서 먼저 연락이 오거나 한 적은 없었다.
스윽.
테블릿을 받아 메시지의 내용을 읽었다.
단순한 메시지는 아닌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 전달된 문서의 느낌이었다.
구구절절 여러 이야기가 적혀있긴 했지만, 한 줄로 요약이 가능했다.
“급수 시험을 다시 보라고?”
눈썹을 올리며 뭐지? 라는 표정을 짓자.
앞에 있던 미라코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의아하긴 했어요. 어떻게 백운 님이… 아니지, 무기왕의 급수가 10급인지요.”
“….”
미스테리라고 고개를 젓는 미라코를 보고 있자니.
급수 책정을 다시 받으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긴 했다.
“으음!”
콧등을 찡그리며 미간을 짚었다.
급수가 올라가면 확실히 유리한 점은 많았다.
챙김 받는 것과 대우의 차원이 달라지는 건 기본이요, 받는 돈 역시 지금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귀찮을 거 같은데.
일부러 낮은 급수로 지원했던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급수가 높을수록 책임져야 할 게 늘어나고 나라에서 찾는 일도 빈번해지는 게 보통이었다.
이런 걸 피해 자유롭고자 10급으로 했던 건데 재측정이라니.
“아! 그 파일 넘겨보시면 개인적으로 온 메시지도 하나 있어요. 기태랑이란 분께 온 거예요.”
설명을 들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오… 귀신 같단 말이야.
가끔 점쟁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기태랑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이랬다.
높은 급수를 책정받더라도 지금과 같은 생활을 보장해주겠단 것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부름은 물론 강제적인 명령도 절대 없을 거라는 내용.
# 마음에 안 들면 어차피 듣지도 않을 거란 건 알고 있다만, 강태황 장관님도 보장해주셨으니 그런 상황이 생길 일은 없을 거다.
마지막 줄을 보니 믿음이 갔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1급 헌터 기태랑과 헌터청 장관의 보장이라니.
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처럼 자유로울 수 있다면 걱정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만에 하나.
두 사람의 힘이 닿지 못하는 높은 곳에서 내 마음에 안 드는 명령이 내려온다 해도.
안 들으면 그만이잖아?
어차피 내 선택에 달린 일이었다.
날 잡으러 올 것도, 어디 가둘 것도 아닐 터였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난 순순히 잡아가세요! 하고 잡혀갈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좋아!
재측정을 결정하고 미라코에게 테블릿을 넘기려는 순간.
# 메시지를 확인했다면, 가능한 한 빨리 와주길 바람.
볼드체로 강조된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백운 님…? 왜 그러세요?”
테블릿을 잡은 채 입을 삐쭉 내밀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난 이제부터 런던에 갈 생각이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만났던 아이작의 장갑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장갑 찾으려고 활 찾기도 미뤘는데.
지금 내 우선순위는 무조건 아이작의 장갑이었다.
설령 발견하고 나니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없는 무기라 해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 너라면 또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드네.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전 아이작이 남긴 말이었다.
어째서인지 나도 그 말을 들을 때 아이작과 마찬가지로 확신했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당시 헤어짐을 크게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었다.
다시 만날 거니까.
“미라코 님.”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미라코가 눈을 크게 떴다.
“한 개 골라주실래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읽씹이 나을까요, 안읽씹이 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