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바다 한가운데
천천히 들어서며 주변을 둘러봤다.
정확히는, 둘러보는 척하는 중이었다.
“백운 님이 유물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다들 뜻밖이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옆에서 들리는 료코의 목소리에 약간 뜨끔했지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유물에 관심은 무척 많았다.
내가 가질 수 있을 만한 무기에 한해서 말이다.
그나저나 학자들이 화낼만했네.
괜히 반환 요청을 한 게 아니었다.
유물관엔 수많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한가득 모여있었다.
별로 관심을 쏟는 거 같지도 않구만.
이름이 명확하게 새겨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출처 미상으로 이름표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유물들.
유물 위로는 꽤 오래 묵은 듯한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유물의 가치 때문에 안 돌려주고 있는 건 아니란 거지.
잘은 몰라도 국가 간의 자존심이나 정세 등이 연관되어 있을 것 같았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유물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
료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총리님께 유물 반환 관련된 안을 올려볼 생각입니다. 과거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오…!”
계속 붙어 다녀서 실감이 안 나긴 하지만.
새삼스레 료코가 유력 장관 중 한 명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슬금슬금.
료코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유물관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발견했던 보랏빛.
이제 그 빛까지 몇 걸음 남지 않았다.
황금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애초에 유물관이 일본 어디에 있는지, 그곳에 단서가 있을 만한 유물이 있는지 등 아는 게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찾아봐야 하는 무기 리스트에도 포함하지 않았던 건데.
이렇게 우연하게 와서 흔적까지 발견하게 되었으니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백운 님이 어떤 유물을 가져가실지 기대되네요.”
료코의 장난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뭘 가져가든 료코는 어떻게든 곤란해질 게 분명한데.
자긴 걱정하지 말라며 일부러 건넨 말 같았다.
저벅.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보랏빛을 응시했다.
누군가의 투구였다.
바닷물에 닿았던 건지 부식이 많이 진행된 상태.
투구를 바라보며 료코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것도 안 가져갈 거예요.”
“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되묻는 료코에.
“가져가고 싶은 게 없네요.”
간단한 대답과 함께 싱긋 웃어 보이며, 투구로 손을 뻗었다.
* * *
쏴아아…!
시야가 돌아오기 전.
시원한 파도 소리와 함께 진한 바다 내음이 풍겨왔다.
거기다 피부를 스치는 산들바람까지.
밝아지기 시작한 시야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아아.
“오!!”
마침내 밝아진 시야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예상하던 대로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서는 아니었다.
바다는 바다인데.
예상과 정반대인 바다였다.
쏴아아아아아!!
시야가 트이기 전에 청력은 완벽하게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집채만 한 파도를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평화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파도 하나하나가 해일이라 봐도 될 정도로 바다는 무척 성난 상태였다.
콰르릉!!
굵은 천둥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그 사이로 폭우가 쏟아졌다.
뭐지, 세기말 같은 건가.
처음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른 배경이었다.
보랏빛을 띠던 게 투구인 만큼 전쟁터 한가운데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배경만 보면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존속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갸우뚱.
“오씨!”
왠지 모르게 포지셔닝이 무척 불안정했다.
쉴새 없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몸에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리자.
그제야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게 되었다.
시… 시발?
동동동.
배의 잔해인 것 같았다.
내 두 발 간신히 얹을 수 있는, 언제 바다로 처박혀도 이상하지 않은 나무판자 위.
내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보금자리였다.
미쳐버린 바다 한가운데에 나무판자 쪼가리라.
이건 좀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생각하는 순간.
콰아아아아---!
옆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 스윽.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오반데.
그냥 바다의 한가운데도 아니었다.
무려 성난 바다의 한가운데.
그 위에 있는 나한테만 파도가 안 덮쳐올 리가 없었다.
아까 봤던 것보다 훨씬 큰, 아파트만 한 파도가 덮쳐오고 있었다.
음.
파도를 바라보며 턱을 슥슥 문질렀다.
약간 가물가물해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내 몸으로 직접 들어온 보랏빛은 오랜만이었다.
악귀참도를 얻을 때도 보랏빛에 먼저 들어가긴 했지만.
그땐 민쿠가 배달하고 있는 검 중 하나였었다.
보자보자.
내 몸으로 직접 들어왔을 땐.
오싹.
영상만 보이는 가상 세계 같은 게 아니었다.
당시의 장소에 실제로 옮겨지는 것이기에.
바람이 불든 불이 번지든 나 역시 그 영향을 온전히 받았었다.
째자.
[이카로스 - 칼데아 윙]
귀여운 파도 수준이었으면 오랜만에 몸이나 적실 겸 맞아줬겠으나.
저건 적셔지는 수준의 파도가 아니었다.
파앙!
연기를 터뜨리며 어두운 세기말 하늘로 날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나무판자를 집어 삼켜버리는 파도.
오싹한 기분에 몸을 한 번 떨어주며 주변을 둘러봤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텐데.
엄한 곳에 떨어질 리는 없었다.
분명 무기와 연관된 상황일 터.
…!
쏟아지는 비를 연기로 막아내며 두리번거리고 있기를 한참, 솟구쳤던 파도가 지나가자.
데몬…?!
출렁이는 바다 위로 엄청난 수의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부터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크기의 데몬까지.
심하다 싶은 건 밀려오는 해일급 파도만큼이나 커다랗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데몬이라, 놀랍진 않은데…
피렌조를 시작으로 각성 시대 전에도 데몬이 존재했던 건 여러 번 봐왔었다.
그래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더럽게 많네.
놀라운 건 모여있는 데몬의 숫자였다.
파도가 닿지 않는 하늘까지 올라온 터라 꽤 넓은 시야가 보이고 있었다.
눈에 닿는 모든 바다를 채우고 있는 데몬 무리.
뭐 하고 있는 거지.
엄청난 수의 데몬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정지한 채로 한 곳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스윽.
천천히 데몬의 시선을 쫓아갔다.
사람… 이네.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갑옷이었다.
조선시대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볼 법한 갑옷.
갑옷과 함께 갖춰 입은 투구가 내가 조금 전 유물관에서 봤던 것 같았다.
저 정도 숫자의 데몬에.
모여있는 데몬들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단신이라.
정확히 한 명이었다.
누군가 더 있을 환경도 아니었으며 시야에 들어오는 배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서 있는 거지?
장수로 보이는 사람은 바다 위에 서 있었다.
판자 위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던 나완 달랐다.
장수는 약간의 흔들림도 없이 조용히 정면의 데몬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아아.
고도를 낮추며 눈을 찌푸렸다.
흐릿.
장수가 딛고 있는 바다 아래.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얼핏 보이는 그림자로 봤을 땐 앞에 있는 대왕 크기의 데몬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뭐가 솟아 나와 있네.
자세히 보니 장수의 발 주변으론 뾰족한 가시 같은 것들이 솟아 나와 있었다.
바다로 한 번 들어가 볼까.
아래로 방향을 틀려는 순간.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게냐.”
장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멈추게 만드는, 낮으면서도 묵직하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폭풍우 속이었지만 여기까지 들리는 걸로 보아 건너편에 있는 데몬에게도 분명히 전달되었을 터였다.
“무모하군, 혼자라니. 저번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건너편에서 가늘고 얍삽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간마다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장수를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데몬의 목소리.
다른 놈들보다 개성 있는 생김새를 보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높은 등급의 데몬 같았다.
“살아간다…?”
의아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스윽.
장수가 내리고 있던 팔을 들어 올렸다.
“난 한 번도 살고자 싸웠던 적이 없다.”
손엔 영롱한 바다색의 활이 들려있었다.
꽤 큰 키임에도 장수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활.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 죽고자 함이니.”
“!!”
장수가 활시위를 당기며.
“어디 한 번.”
주춤하며 동요하는 데몬 군대에 활을 겨누었다.
“살아남아 보거라.”
* * *
화아아악…!
살아남아 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공간이 흩어지며 원래 있던 유물관으로 돌아왔다.
이런.
순식간에 바뀐 공간에 미간을 찌푸렸다.
최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 오가는 대화에 집중했었는데.
정작 장수 아래에 있던 게 뭔지는 못 보고 돌아와 버렸다.
겁나 컸었는데.
잠수함…은 아니겠지.
데몬은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시대에 잠수함은 무리가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살아있는 거 같았고.
자세히는 못 봤어도 느낄 수 있었다.
바다 아래에서 장수와 함께 데몬을 마주 보고 있는 거대한 존재의 시선을 말이다.
흐음.
턱을 슥슥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몬 외에도 다른 존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킹냥이 리카르도가 있는 페샨 족이 그 증거였다.
바다에 잠수할 수 있는 거대한 녀석이라.
뭐가 있으려나.
“배… 백운 님…!!”
앗.
들어갔다 나온 공간 생각에 잠시 잊고 있었다.
턱 문지르기를 그만두고 호다닥 고개를 돌렸다.
엄청나게 커진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료코.
료코의 튀어나올 것 같은 눈에 그제야 내 꼬라지를 살필 수 있었다.
축축.
“….”
물에 빠진 생쥐가 적절한 표현일 것 같았다.
유물관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뽀송뽀송했었는데.
지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젖어버린 상태였다.
“괜…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일단 괜찮다고 대답을 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하지.
료코 입장에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야 성난 바다 정중앙에 있다 왔으니 젖는 게 당연했지만.
시간이 멈추고 다른 공간에 갔다 오는 걸 모르는 료코가 보기엔 기현상일 터였다.
투구로 손을 뻗기 무섭게 뽀송했던 사람이 폭삭 젖어서 나타났으니까.
“온몸이… 무슨 일이…!”
내 기준에서 아주 침착한 사람 중 한 명인 료코.
그런 료코마저 당황하게 해버린 현상을 뭐라고 설명할까 머리를 긁적이다.
“그러게요.”
나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괜히 손을 뻗어 빛이 사라진 투구를 쓰다듬었다.
투구를 만지기 무섭게 몸이 폭삭 젖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거짓말은 아니니까.
옆에서 여전히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료코를 뒤로 하고.
공간에서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장수가 데몬들을 향해 겨누었던 것은 분명.
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