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그라비티 디바이스
‘….’
에밀리아가 조용히 정면을 응시했다.
에밀리아는 런던 헌터청에서도 누구보다 뛰어나고 냉정하기로 소문이 난 헌터였다.
많은 경험에서 오는 판단력 또한 발군이라 어느 상황에 처해도 버벅거리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체… 뭐야.’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아닌가 싶은 일이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이나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일으키고 있는 건 단 한 명의 남자였다.
- 후우우웅…!
에밀리아가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처음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검격을 뿌렸던 델라르.
쏟아지는 공격을 보며 에밀리아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까 공격에도 지반과 건물이 박살 나며 큰 피해를 입었었는데.
저것들이 떨어졌을 땐 대체 얼마나 더 큰 데미지를 입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 카가가가가가!
이런 에밀리아의 걱정과 달리 델라르의 검격이 헌터들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펼쳐져 헌터와 하늘 사이를 가로막은 맑은 물색의 비늘.
아래로 떨어진 검격은 비늘을 뚫지 못하고 소멸해버렸었다.
- ….
비늘을 보면서도 에밀리아는 말을 잃었었다.
첫 번째 공격을 직접 받아낸 만큼 지금 떨어지고 있는 검격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검격을 한참 받아내고도 비늘은 부서지긴커녕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에밀리아 님!”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던 에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다급하게 에밀리아를 어깨를 잡은 이사벨이 눈에 들어왔다.
“더 물러나야 해요!”
오히려 약간 넋이 나간 에밀리아보다 이사벨 쪽이 정신은 더 또렷한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평소처럼 멀쩡한 건 아니었다.
이사벨의 눈동자엔 엄청난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
평소라면 그런 이사벨을 격려하며 다독였을 에밀리아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콰아아아아아---!!
떨어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말이다.
- 무릎을 꿇어라. 그럼 목숨은 살려 주마.
하늘에서 엄청난 기세를 자랑하며 등장했던 델라르와 그들의 섬, 포리페.
솔직히 에밀리아는 그들을 보며 아찔함을 느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힘의 격차.
머리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후우우웅!
실제로 그들은 하늘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어댔었다.
높은 하늘에 있는 델라르와 땅에 있는 헌터들.
마치 두 집단의 전력 차를 대변해 주는 듯한 거리감이었다.
‘절대 떨어뜨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푸른 비늘에 놀라 입이 벌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어스름한 빛을 띠는 정체불명의 장갑이 백운의 팔을 감싼 것은 말이다.
- 파지지지직!
백운이 땅에 손을 짚기 무섭게.
손 아래에서 시작된 붉은 스파크가 하늘로 솟아올랐었다.
순식간에 뻗어진 스파크는 델라르를 포함해 하늘에 떠 있던 포리페에게 도달했고.
- 내려와.
백운의 말을 마지막으로.
- 쿵! 쿵! 쿵! 쿵! 쿵!
하늘에 떠 있던 모든 사신이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사신들도 당황한 모습으로 어떻게든 스파크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듯했지만.
거스를 수 없는 힘인지 사신들은 속수무책으로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마치 그들에게만 훨씬 강한 중력이 적용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 쿠우웅!!
드락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던 만큼 고고하고 오만한 자태로 하늘에 떠 있던 드락스인데.
백운의 힘엔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가장 먼저 바닥에 내리꽂히고 말았다.
쿠구구구구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청난 위용을 뽐내며 런던 하늘에 나타났던 델라르의 섬, 포리페가.
스파크에 이끌려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 * *
파지직.
마지막 스파크를 뿜어내고.
스르르.
해제되며 데모닉이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은 한 번 사용이 최대였다.
음.
데모닉이 사라진 팔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스파크를 뿜어낼 수 있는 건 한 번뿐이지만, 충분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 번인 게 오히려 정상으로 느껴졌다.
미쳤다.
데모닉을 사용하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거만의 끝을 달리던 드락스를 포함해 사신 모두를 땅으로 처박아버린 데모닉.
그것도 모자라 하늘에 떠 있던 포리페까지 끌어내리고 말았다.
앗.
땅에 처박혀 산산조각이 난 포리페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휴.”
멀쩡하고.
그럼 그렇지란 생각으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모닉으로 시원하게 다 처박아버린 것까진 좋았는데.
떨어지는 포리페를 보면서는 약간 걱정이 됐었다.
저런 게 떨어졌다간 런던으로 엄청난 후폭풍이 일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이카로스 - 칼데아 윙]
포리페가 땅과 만나기 직전.
호다닥 칼데아를 꺼내 남아있는 연기를 모조리 뿜어냈었다.
지반과 포리페가 만나는 곳을 중심으로 둘러싸인 칼데아의 연기.
포리페가 박살나며 엄청난 굉음과 함께 후폭풍이 밀려오긴 했지만, 연기의 보호 덕에 런던은 멀쩡했다.
“….”
내가 한 짓이긴 하지만, 뭐랄까.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 전 데모닉을 사용하며 깨달은 게 있었다.
앞으로도 은이나 금 같은 걸 챙겨다닐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등가교환 법칙의 무시.
연금술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절대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지만, 난 이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아이작 또한 데모닉을 받아든 날 보며 이 사실을 깨달았었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라 생각했는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웃어 보이기만 했지만 말이다.
- 쿠우우웅---!
머리로 마지막 기억에서 봤던 운석을 떠올렸다.
등가교환의 법칙에 적용받진 않으나 그때처럼 강한 스파크가 발생하진 않았었다.
아마도 데모닉의 게이지를 채우고 동기화까지 해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벅.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왜 안 일어나.
엄청난 속도로 처박히긴 했어도 사신들은 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즉사하거나 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처박히기 전에 리볼버에 긁힌 게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투둑.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주춤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신들.
예상했던 대로 바로 죽진 않았으나 꽤 타격을 입은 모습이었다.
휘이이이…!
세차게 불어온 새벽바람이 주변을 뒤덮고 있던 모래 먼지를 날려 보냈다.
시야가 개이며 일어난 사신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주춤.
처음의 기세등등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날 발견한 사신 몇 명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사아아.
페샨의 눈이 발동된 걸로 보아 모습을 감추려 한 모양이었다.
“다 보이니까 헛짓거리 하지 마.”
“!!!”
마주친 사신이 놀라는 사이.
응?
푸욱!!
“끄어억…!”
뒷걸음질 치던 사신의 가슴으로 누군가의 낫이 파고들었다.
매정한 새끼네 저거.
드락스였다.
도망은 물론 한낱 인간에게 겁먹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투둑!
낫을 거두며 죽은 부하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드락스가.
“후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잠시 날 조용히 응시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한낱 인간 주제 사신에게 대적한 죄.”
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말투와 대사였다.
꽤 오래 살았을 텐데 중2병이 늦게 찾아온 듯한 오글거림이었다.
“사신의 땅을 추락시킨 죄.”
저벅.
피가 떨어지는 두 개의 낫을 들고.
드락스가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잭 더 리퍼 - 면도칼]
“사신의 왕을 앞에 두고도 고개를 조아리지 않은 죄.”
“병 걸렸어? 오글거리게.”
눈살을 찌푸리며 드락스를 응시하고 있기를 잠시.
“눈을 마주치면 안 돼!!”
응?
뒤에서 로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눈을 왜 마주치지 말라는 건지 의아한 순간.
“천 번 죽어 마땅하다.”
마지막 말을 끝으로.
!!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드락스가 정면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스아악!
드락스의 눈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 몹시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쓰러져라.”
* * *
“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백운에.
‘아… 안돼.’
로인의 얼굴로 낭패감이 번져나갔다.
사신의 왕, 드락스의 권능.
아무리 백운이라도 절대적인 왕의 권능엔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실수다.’
로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백운에게 미리 알려줬어야 했다.
조금 전 드락스의 읊조림을 듣기 전까진 로인 역시 눈을 통해 권능이 행해진다는 걸 몰랐지만.
그렇더라도 알려줬어야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권능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끄아아아아억!”
계속해서 이어지는 백운의 비명에 로인이 품에서 낫을 꺼내 들었다.
드락스를 상대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백운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게 해줘야 했다.
‘드락스…!’
로인이 드락스를 노려봤다.
델라르를 초토화 시켰던 백운이 쓰러져서일까.
드락스는 승리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늘로 고개를 든 채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 드락스.
‘지금뿐이다.’
드락스는 백운 이외의 사람은 완벽히 무시하고 있었다.
꽈악.
로인이 낫을 움켜쥐었다.
방심하고 있는 드락스로부터 백운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저벅.
걸음을 내디디며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
‘후우…!’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로인이 드락스를 향해 내달리려는 순간.
‘!!!’
척.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들고 있던 면도칼을 드락스의 눈으로 휘두르는 백운에.
로인은 도약하려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 *
“끄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이 들려왔다.
뒤로 거리를 벌리며 물러나는 드락스.
“드… 드락스 님!!”
주변에 있던 사신들이 드락스에게 몰려들었다.
“아깝네, 둘 다 날리려고 했는데.”
피가 쏟아지는 왼쪽 눈을 움켜쥔 채.
드락스가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 새끼가!!!”
흥분한 채로 고래고래 소리 지른 탓에 그 뒤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이겠지.
별 영양가 없는 말을 듣는 것 대신에.
뒤에 있는 로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인.”
로인은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굳어있었다.
“에밀리아 님한테 머어어얼찍이 좀 떨어져 있어 달라고 말해줘.”
“…!”
깜짝 놀란 듯 눈이 커졌던 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죽여버린다아아!”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심히 소리를 지르던 드락스가 손을 치켜들었다.
“포리페의 힘이여!! 내게 깃들어라!!”
추락하며 다 박살이 나긴 했지만.
아직 그곳엔 사신이 끌어 쓸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사방에서 솟아오른 검은색 기운이 드락스에게 깃들기 시작했다.
스윽.
주변을 둘러봤다.
데몬과 사신 할 것 없이 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흐르고 있는 엄청난 양의 피까지.
… 충분하네.
부족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피의 이름을 되뇌었다.
[잭 더 리퍼 - 블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