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낭패감
쾅! 쾅! 쾅!
수리검으로 몇 번 내려찍은 후 몸을 일으켰다.
뚜둑.
“아고 허리야.”
뼈 소리 나는 허리를 돌려주며 주변을 둘러봤다.
산산조각이 나 널브러진 스무 마리 정도의 로봇.
한참 서늘하게 빛나던 안광은 사라졌으며 끼긱거리며 움직이던 손발도 동작을 멈춘 상태였다.
“흐음.”
몸을 수그리고 축 늘어진 로봇 하나를 바라봤다.
이게 로봇이라고?
외관 자체가 기계로 이루어졌으니 로봇이라 부르는 게 맞긴 하겠지만, 뭐랄까.
생명 없는 기계와 싸운다는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조금 오묘하긴 하지만 굳이 가까운 쪽을 고르라면 지금까지 지겹게 싸워온 데몬이었다.
드득.
요것 봐라.
놈들의 신체는 동작을 멈추며 기능을 상실했지만 아직 멀쩡한 게 하나 있었다.
심장 부근을 덮고 있던 검은색 얼음.
얼음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냉기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부서지지 않는 얼음이라.
조용히 검은 빛을 띠는 얼음을 응시했다.
정확히 말해서 부서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지 부서진 자리가 곧바로 복구되어 완전히 없앨 수 없는 것뿐이었다.
만약 아이리 님 말대로 이게 데몬의 힘이라면.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직 마주한 적은 없으나 까다롭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락.
“아직 남아있었나.”
도대체 뭐 하는 데몬쉨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처음과 마찬가지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약간의 냉기가 느껴졌다.
추가로 투입된 놈들이거나 부대를 나눠 아이리를 쫓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너무 휙휙 흘러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조금 헷갈렸지만.
일단 시작한 청소는 마무리 짓는 게 좋을 듯했다.
파앙!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 사이로 희미한 푸른 안광 몇 개가 지붕 위를 달리고 있었다.
“크르르르…!”
늑대 소리까지 녹음한 건가.
흡사 짐승 소리까지 내는 로보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처음으로 보인 녀석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크르!?”
녀석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뿐이었다.
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빠각!
연기의 형태를 바꿔 곧장 비틀어버린 후 다음 놈에게 향했다.
아주 상쾌하구만.
구시가지라 그런지 보는 눈도 없었다.
신경 쓸 것 없이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사냥하니 오랜만에 시원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까드득! 뿌득! 빠각!
차례차례 놈들을 사냥한 후.
마지막 남은 놈을 돌아봤다.
“…!!”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놈은 동족의 죽음을 눈치챈 상태였다.
내 쪽을 바라보며 푸른 안광을 일렁이고 있는 녀석.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놈의 안광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올 거면 빨리 와. 달라지는 거 없…!?”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잠시 날 응시하던 놈이 몸을 휙 돌려 반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망친다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보면 볼수록 로봇이란 게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AI가 발달했다고 해도 조금 전 놈이 보인 건 분명 강자를 마주한 먹이의 공포심이었다.
“….”
로컨이란 놈이 제대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놈은 지금 자신이 검은 얼음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이용당하고 있는 건 로컨일 수도 있었다.
이거 참 내 나라는 아니지만.
수리검을 든 손을 뒤로 크게 젖힌 후.
달아나고 있는 놈의 등으로 빠르게 던져냈다.
아일랜드의 미래가 걱정되는구만.
[비전]
* * *
타룬을 모니터링 중인 더블린 헌터 진영.
모니터를 살피고 있는 헌터가 불만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불편하네요. 카메라를 붙일 수 없어서 상황을 못 보니.”
“어쩔 수 없지. 냉기 때문에 카메라 자체는 물론 영상 신호가 제대로 안 쏴진다니까. 그나마 GPS 신호라도 잡히는 걸 다행으로 알자고.”
“GPS도 이렇게 희미하니 조금만 멀어지면 사라… 어?”
모니터를 살피던 헌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모니터에서 타룬 중 한 마리의 신호가 사라져서였다.
“뭐야? 어디 갔어.”
다시 세어 봐도 분명 한 마리가 부족했다.
유난히 멀리 떨어진 녀석도 아니었기에 더 이상했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고 천천히 찾아봐. 냉기 때문에 한두 마리는 그럴 수도 있…?”
선배 헌터의 말은 끝까지 매듭지어지지 못했다.
삑. 삑. 삑. 삑. 삑삑삑삑.
처음 소실된 타룬 근처에 있던 녀석들의 GPS가 모조리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턴 추가로 보냈던 타룬의 신호마저 차례대로 없어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야!!”
“모, 모르겠습니다.”
심각한 듯한 외침에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모두가 아주 간단한 작전이라 생각했기에 한껏 풀어진 마음으로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곱 마리 남았습니다! 여섯! 다섯! 셋…!”
입으로 세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타룬의 신호.
헌터가 카운트하는 걸 멈추고 멍한 얼굴로 텅 비어버린 모니터를 응시했다.
옆에 있던 동료들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괜한 모니터만 툭툭 건들며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GPS가 한 번에 맛탱이 갔을 리는… 없겠지?”
그러길 바란다는 듯한 물음에 기술 관련 헌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각자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GPS 수십 개가 한 번에 오동작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뭐야. 지금.”
책임자인 헌터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동작이 아니라면 GPS가 기능을 상실하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나가 있는 타룬이 다 기능 정지라도 했다는 거야?”
이번 질문에 대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간적접으로나마 타룬의 전투력을 봐온 이들이었다.
첨단 소재로 만들어져 웬만한 무기엔 상처조차 나지 않는 타룬.
이런 타룬 수십 기가 한순간에 몰살당했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타룬이 사라졌던 속도….”
자리에 있던 모든 헌터가 고개를 들어 구시가지 방향을 응시했다.
꽤 거리를 벌리고 이동하던 타룬들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사라졌었다.
“지금 저곳에 대체.”
눈살을 찌푸린 헌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뭐가 있는 거야.”
* * *
이놈이 마지막인 거 같고.
휙!
뽑아버린 머리를 내동댕이쳐버렸다.
냉동고에 들어 있다 나온 것처럼 온몸이 차가운 녀석들이라 오래 들고 있기가 힘들었다.
여름이었으면 조금 더 들고 있거나 옷 안에 넣고 다녔겠지만 말이다.
“음.”
고도를 높인 채 불빛이 반짝이는 방향을 응시했다.
딱히 뭐가 있을 곳이 아닌데도 차량 여러 대가 모여있었다.
아마 이놈들을 보낸 자식들일 것 같았다.
더블린 헌터청이겠지.
처음엔 바로 가서 때려 부술까 잠시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내 날 이용해 아이리에게 덮어씌우려는 로컨이란 작자를 떠올리고 접기로 했다.
저놈들은 잔챙이일 뿐이야.
박살낸다고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듯했다.
오히려 그 여우 같은 자식에게 무언가 더 빌미를 줄 것 같았다.
확실하게 하려면 한방에 머리를 뽀개야겠지.
그렇다고 당장 더블린 헌터청에 쳐들어가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무대뽀라도 무턱대고 쳐들어가 한국 헌터청과 날 여기까지 태워준 영국 왕실에 민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한 방에 보낼 타이밍을 노리자.
아이리 역시 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으니 분명 기회가 있을 터였다.
“아.”
그제야 생각난 아이리에 고개를 휙휙 돌렸다.
내가 신나게 로봇을 뽀개는 사이 이미 멀리까지 간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사람 비슷한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선 말이다.
어, 어디 갔어!
추격하는 놈들 좀 떨궈내려고 내가 일부러 아이리의 손을 놓은 거긴 했으나.
손을 놓으며 어떻게 찾아갈지를 생각해두지 않았었다.
- 일주일 뒤에 대통령이 연설을 맡은 행사가 있어요.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이며 위쪽 방향을 바라봤다.
아이리가 언제 나타날지는 대략 알고 있으니 그때까진 도끼의 행방이나 찾을 생각이었다.
자 일단 위쪽으로 가볼까.
이제 머무르기 불편해진 더블린을 뒤로하고 방향을 틀었다.
더블린보다 위에 속한 항구 도시로 가볼 생각이었다.
앗.
그렇게 날갯짓을 하기 직전.
호다닥!
빠르게 내려가 아까 내던졌던 로보트의 머리와 몸 조각을 주워왔다.
아이리 님 가져다줘야지.
행사에 가져갔을 때 증거로 도움이 되길 바라며.
“룰루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북쪽으로 날갯짓을 시작했다.
* * *
백운이 사냥을 마치고 다른 도시로 떠난 직후.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청장 로컨이 도착했다.
“허!”
헛웃음을 터뜨리는 로컨에 현장에 있던 헌터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마른침을 삼켰다.
로컨이 딱히 별말을 한 건 아니지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태에 대해 로컨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말이다.
“졸다가 잠꼬대하는 건 줄 알았는데.”
로컨이 산산조각이 난 타룬을 내려다봤다.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땐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자기가 잘못 듣고 있거나 보고 중인 놈이 잠꼬대를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아이리와 백운의 신호는?”
“사,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둘 다 눈치챈 모양입니다.”
“쯧! 정확히 어떻게 된 거야?”
모니터링 중이던 헌터가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타룬의 신호가 두 사람과 겹친 순간 함께 이동 중이던 아이리와 백운은 흩어졌으며.
주변에 있던 모든 타룬이 백운에게 달려들었었다고 말이다.
“그 후였습니다. 타룬의 신호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이어지는 보고에 로컨이 미간을 찌푸렸다.
신호가 잡히지 않은 제3자가 끼어든 상황을 제외한다면.
지금 이야기만 들어봤을 때 타룬을 제거한 건 백운일 확률이 높았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나.’
눈앞에 흩어진 타룬의 잔해.
당한 흔적은 모두 동일했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에 잡아 뜯긴 것이었다.
‘관절 부위를 노렸다곤 하나 강화 티타늄을 잡아 뜯는 인간이라니.’
총이나 웬만한 미사일에 맞아도 멀쩡한 게 바로 티타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했다는 건 상대가 규격 외라는 걸 의미했다.
“로, 로컨 님.”
안절부절 못하는 목소리에 로컨이 고개를 돌렸다.
부하의 손엔 마찬가지로 잡아 뜯겨 찌그러진 타룬의 팔 한쪽이 들려있었다.
“한 기가 사라졌습니다.”
“!!!”
이번엔 로컨의 동공도 확대됐다.
검은 얼음을 사용한 병기의 유출.
애써 아이리와 단체의 주장을 헛된 망상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지금,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가져가 버린 것 같습니다.”
쾅!!
로컨이 타고 온 차량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대로 튕겨 나가 벽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차량.
바짝 굳어 있는 헌터들의 귀로 분노한 로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새끼가 직접 가져갔든, 제3자가 끼어들어 가져갔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으드드득!
“당장 찾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