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붉은색으로 물들다
“한국놈들 시원하게 쏟아붓는구먼. 탄 아까운 줄 모르고 말이야. 안 그래?”
“그러게요. 퍼부어봐야 끝도 없을 텐데 말이죠.”
“야 빅토! 넌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원래라면 제일 말 많은 놈이.”
열차 지하 순찰 조장인 로토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스무 명씩 총 다섯 개 조로 이루어진 순찰팀.
자기 조보다 앞서갔을 빅토의 조가 오늘따라 조용했다.
“뭐야? 이 새끼들 또 어디 숨어 있는 거 아니야? 우리 놀래키려고.”
“그런가 본데요. 저번에 그렇게 욕먹었으면서도 또 혼나려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지. 얼른 쫓아가서 혼내 주자고.”
다시 야간 투시경을 쓴 로토프가 속도를 올렸다.
혹시나 객실로 빛이 새어 나갈까 사용하고 있는 야투경.
당장 다른 조가 안 보이는 걸로 보아 속도를 올려 앞서 나간 것 같았다.
“이번엔 아주 제대로 숨었나 본…?”
성큼성큼 걷던 로토프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세요? 조장님.”
발아래로 느껴지는 찰랑임에 로토프가 고개를 내렸다.
약간이지만 발바닥 일부분이 잠길 정도로 물이 퍼져 있었다.
종종 눈이 스며들어 물기가 생기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흥건해졌던 적은 없었다.
“뭐야 이거. 어디서 물이 이렇게 들어온 거야.”
몸을 낮춘 로토프가 물로 손을 뻗었다.
“야. 너 어디 구멍 난 거 없…!?”
말을 멈춘 로토프의 눈이 커졌다.
손을 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물이 아니었다.
흘러나온 지 얼마 안 된 건지 점성과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시, 시발… 뭐냐.”
야투경을 벗은 로토프가 들고 있던 핸드폰의 플래시를 켰다.
원래라면 금지된 행동이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플래시가 지하 통로를 밝히자 믿기 힘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바닥과 벽 할 것 없이 전부 말이다.
“야… 야! 당장 연락 돌려!”
기겁한 로토프가 명령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았기에 지원이 필요했다.
“야 이 새끼야! 대답 안 해!!”
아무 말도 없는 부하에 성질이 난 로토프가 몸을 휙 돌렸다.
로토프의 분노에도 부하는 여전히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었다.
“정신 안 차려!”
로토프가 부하의 멱살로 손을 뻗었다.
“정신…!?”
멱살을 잡은 로토프가 헛숨을 들이켰다.
손으로 뜨듯하면서도 축축한 감각이 느껴졌다.
로토프가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플래시를 비춰보았다.
방금 멱살을 잡은 부하뿐만이 아니었다.
뒤따라오던 모든 조원이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약속이라도 한 거처럼 모든 부대원의 몸이 동시에 무너졌다.
뭐에 당한 건지 몸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한순간에… 다 당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로토프가 주춤거렸다.
툭.
“!?”
뒷걸음질 치던 로토프의 등이 무언가와 부딪혔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로토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뒤에 있는 게 지금 이 참극을 만들어낸 범인이란 걸 말이다.
“너 이 새끼… 누, 누구냐.”
로토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선 무기를 꺼내 뒤에 선 놈에게 휘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잔뜩 겁에 질려 굳어버린 몸은 어떻게든 움직이라는 로토프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
다시 한번 로토프의 몸으로 소름이 밀려왔다.
누군지 모를 인간은 뭐가 재밌는지 웃고 있었다.
사방이 피로 물든 이 공간의 중심에서 말이다.
“저승사자.”
로토프가 다시 한번 헛숨을 들이켰다.
저것만 들어선 누군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뒤에 있는 건 지금 열차에 타고 있으면 안 되는 급의 존재였다.
‘아, 알려야 한다.’
로토프가 마른침을 삼켰다.
옥시나를 포함한 러시아 측은 저런 녀석의 존재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무기왕이 오지 않은 순간부터 수색대엔 손쉽게 죽일 놈들만 있다고 판단 중이었다.
로토프가 주머니에 든 긴급 호출 버튼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메시지를 남겨야 했다.
‘천천히 손을…?’
간신히 힘을 줬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푸확!!
움직이려던 팔에서 피가 뿜어졌다.
* * *
마지막 한 놈까지 쓰러뜨린 후.
면도칼을 집어넣고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쓰러뜨린 놈에게 물어봤었다.
어째서 데몬이 한국 인원들만 노리는 건지 말이다.
“이거였단 말이지.”
열차 한쪽에 멈춘 뒤 플래시를 비춰보았다.
벽면엔 커다란 크기의 데몬 하나가 붙어 있었다.
밖에서 달려들고 있는 놈들과 같은 생김새.
러시아 놈들은 이걸 서리 구울의 성체라고 말했었다.
이 서리 구울의 성체가 한국 측 인원들이 탄 칸의 지하에 하나씩 달려있었다.
“진짜 별짓을 다 하는구나.”
성체를 훔쳐 데몬을 유인한 것이었다.
여러 번 실험했던 건지 다른 칸엔 별 피해가 없다는 것까지 계산 안에 있었고 말이다.
혀가 내둘러지는 건 서리 구울의 성체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낀 것처럼 열차는 실제로 살아있었다.
지하의 벽과 천장은 정체불명의 피부 조직과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리 구울의 성체 역시 벽에 사로잡혀 잡아먹히는 중이었다.
모른다고 했었지.
순찰 중인 녀석들도 정확히 이 열차가 뭔지는 모르고 있었다.
단지 러시아 정부가 어디선가 만들어 가져왔다는 것만 아는 상태였다.
일단 손을 뻗어 서리 구울의 성체를 뜯어냈다.
희미하게 숨은 붙어있었지만 생명이라도 흡수당한 건지 삐쩍 말라 있었다.
벽에 붙은 개체를 다 떼어낸 뒤 열차의 맨 끝으로 가 밖으로 던져버렸다.
열차는 일단 가만히 둬야겠지.
마음 같아선 이 열차도 박살 내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떤 일이 생길지 가늠이 안됐기에 이후를 기약하기로 했다.
적어도 한국 인원들은 다 내린 후에 해야 했다.
“후우웁.”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으로 폐를 한 번 씻어낸 뒤.
처음에 뺏어 입었던 옷을 집어 던졌다.
대충 손이랑 얼굴만 잘 씻으면 될 것 같았다.
“올라가 볼까.”
문밖으로 나가 김정윤과 대산 인원이 타고 있는 칸으로 기어 올라갔다.
안쪽에 러시아 놈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창문을 넘었다.
대산 인원들도 전부 데몬이 달려오던 반대편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데몬이 더 안 쫓아오는 거 같아요!”
“진짜요! 갑자기 왜 저러죠?”
성체를 내다버린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구만 생각하며 물티슈로 얼굴과 손을 슥슥 닦았다.
다른 녀석 옷을 입고 있었다곤 하나 피가 하나도 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더 안 쫓아오는 거 같아요! 잘 됐… 흐읍!”
“왜 그러… 허업!!”
잘됐다며 고개를 돌리던 대산 인원들이 입을 막으며 헛숨을 들이켰다.
이럴까봐 호다닥 피부터 닦은 건데 좀 늦어버리고 말았다.
“왜 맨발… 이세요?”
머리나 얼굴에 묻은 피는 무슨 일이 있겠거니 여긴 듯하지만.
이 엄동설한에 맨발로 서 있는 건 궁금한 모양이었다.
“밖에 버리고 왔거든요. 잠시만요. 화장실 좀.”
“아… 네!”
대산 인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척하며 칸과 칸을 잇는 곳으로 가 문을 가렸다.
당장 다가오는 러시아 인원은 없지만 혹시나 누가 볼까 가려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수건과 옷을 챙겨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옥시나를 포함한 러시아 인원이 탄 1호실.
“어떻게 된 거죠?”
인상을 찌푸린 옥시나가 창밖을 살폈다.
아직 서리 구울의 영역을 벗어나려면 한참 남았음에도.
서리 구울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고 뒤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애초에 목표로 했던 걸 손에 넣었다는 듯이 말이다.
“영역 안에선 성체를 끝까지 쫓아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성체가 모두 목숨이 다한 게 아닌 이상 계속 쫓아오는 게 정상인데….”
“그래야 하는데 왜 안 쫓아오냐고요.”
“화, 확인해보겠습니다.”
당황한 기관장이 무전기를 드는 사이.
옥시나가 짜증 섞인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서리 구울은 한국 전력의 힘을 빼놓기 위해 준비한 녀석들이었다.
오이먀콘에 도착하면 수색대는 한국으로 1차 보고를 하게 될 터.
수색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력이 바닥났음을 알리면 뒤늦게라도 한국이 무기왕을 보내오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걸었었다.
서리 구울이 워낙 빨리 물러난 탓에 전력을 바닥내긴커녕 탄도 제대로 소비시키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하 순찰 조 대답하라! 여기는 기관장.”
목소리가 높아지는 기관장에 옥시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기관장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애꿎은 무전기에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설마….’
묘한 불안감을 느낀 옥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시나를 따라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러시아 측 헌터들.
벙쪄 있는 기관장에 옥시나가 입을 열었다.
“뭐 하세요? 빨리 지하 문 안 열고.”
“아 예! 알겠습니다!”
급히 달려가는 기관장을 따라 옥시나가 걸음을 옮겼다.
지금 피어오르는 불안감이 부디 기우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럼 열겠습니다. 냄새가 심할 겁니다.”
기관장이 한차례 주의를 준 후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솟구치는 악취에 옥시나를 포함한 인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관장과 몇 명의 헌터가 먼저 아래로 내려간 후 옥시나도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이전에도 와보긴 했지만 꿈틀거리는 바닥은 언제 밟아도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불을 밝히겠습니다.”
기관좡의 짤막한 말과 동시에 어두컴컴했던 지하로 빛이 밝혀졌다.
“으아…!”
“!!!”
기겁한 기관장이 뒷걸음질치다 엉덩방아를 찧고.
함께 내려온 헌터들이 옥시나를 감싸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사이에서 옥시나가 커진 눈으로 정면을 살폈다.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 꽉 깨물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전부 죽었습니다.”
앞을 훑고 온 헌터가 고개를 저었다.
저 앞도 지금 보고 있는 광경과 다를 것 없다는 것이었다.
“에, 엔진실은 무사합니다! 안쪽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거 같습니다!”
살점과 근육으로 교묘하게 가려져 침입자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기관장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말했지만 이 말은 옥시나의 귀에 들리지 않고 있었다.
미세하게 손을 떨며 눈앞의 참극을 바라보는 옥시나.
서리 구울의 성체가 있던 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러시아의 의도를 알아채고 성체를 뜯어 밖으로 버린 것이었다.
“모두 예리한 것에 베인 상처가 있습니다. 정확히 주요 혈관만 끊어졌고요.”
시체를 살피던 헌터가 마른침을 삼키며 옥시나를 응시했다.
“보통 놈이 아닙니다. 여기 있던 전원이 무기 한 번 휘두르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당했습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옥시나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옥시나는 인정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쩌면 날카로운 이빨이 준비된 입안으로 들어온 건.
저들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