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53화 (53/687)

053화

“뭘 하고 있었지?”

“빵을 좀 모으고 있었습니다.”

“음. 빵을...”

“예. 빵은 여기서 동전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대충 빵 다섯 개면 깃펜 하나와 바꿀 수 있고, 열 개면 성냥갑만한 각설탕과 바꿀 수 있지요.”

“......”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한이 있어서 나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지만, 다른 탑의 학생들은 이한 같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처절하게 생존을 위해 투쟁 중이었다.

끼니 때가 되면 나오는 딱딱한 빵은 지금 대체화폐로 쓰이고 있었다.

각종 물자들을 구입할 수 있는 화폐!

“우와... 구경해도 괜찮아?”

“얼마든지 보십시오.”

요네르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암시장의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쓸만한 게 있으면 사려는 것 같았다.

이한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같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놀랐다.

‘아니. 의외로 쓸만한 게 많잖아?’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물자를 모아봤자 얼마나 모았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별의별 물건이 다 있었다.

물론 음식들은 풍족하지 않았다.

각종 통조림(아마 사제들이 왔을 때 풀린 물건 같았다)을 제외한다면 온갖 가짜 음식들로 그득했다.

가짜 치즈, 가짜 우유, 가짜 달걀, 가짜 훈제 고기, 가짜 생선 절임, 가짜 커피, 가짜 찻잎 등 ‘아니 이걸 가짜로 만드는 게 더 힘들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음식을 제외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쓸만한 것들이 많았다.

가방, 깃펜, 담요, 랜턴, 낚싯대, 삽과 곡괭이, 간이 텐트와 침낭, 로프와 분필, 활과 화살...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아티팩트들이 왜 이렇게 많아?’

평범해 보이는 천 망토나 가죽 벨트, 돌로 엮은 팔찌나 목걸이들.

흔한 잡동사니였지만 이한은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했다. 아티팩트였다.

‘아무리 이 학교가 아티팩트를 구하기 쉽다지만 이건 너무 놀라운데.’

밖에서는 아주 간단한 아티팩트 하나라도 매우 귀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숫자가 적어서 모험가들이나 용병들은 구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아티팩트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나는 노련한 모험가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장 <암흑 시야>가 걸린 아티팩트 하나만 있어도 어두운 던전이란 던전은 다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치유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는 위급한 상황에 제 2의 목숨이 되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학교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일단 아티팩트를 만들 줄 아는 사람들과 만들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 아닌가.

물론 아마추어들이 만드는 만큼 품질은 오락가락하고 믿을 수 없지만 일단 아티팩트 숫자 자체는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입생들이 이렇게 버려지는 아티팩트들을 알뜰히 찾아내서 갖고 올 줄이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의 실용정신과 실력에 감탄이 나왔다.

‘검은 거북이 탑에 들어갔다면 훨씬 더 말이 잘 통했겠군.’

이한이 만약 검은 거북이 탑에 있었다면 학생들과 함께 학교의 물자를 싹 긁어모았을 것이다.

“하나 사시려구요? 저도 확인해봤지만 쓸만한 건 별로 없었습니다.”

이한이 탐을 낸다고 생각했는지 랫포드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장사를 방해 받은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이 랫포드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지금 누구 장사를...!’

그러나 랫포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저 망토는 날붙이를 막아주는 방호의 망토라고 하지만, 실제로 실험해보면 두 번 중 한 번만 막아내더군요.”

“잠깐, 두 번 중 한 번이면 그래도 제법 쓸만한 것 아닌가?”

“과연... 훌륭하십니다. 컵에 물이 반밖에 남지 않은 것보다,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자세.”

“대충 아무 말이나 던진다고 칭찬이 되지는 않거든. 랫포드.”

이한은 아티팩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확실히 랫포드가 쓸만한 게 없다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태반이 효과를 모르거나 확인하기 힘든 아티팩트들이었고, 몇몇은 또 마력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걸린 마법이 영구적이지 않아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티팩트들 중에서 방금 나온 방호의 망토 정도면 크게 기대하기는 힘들어도 제법 쓸만한 편에 속했다.

문제는...

“혹시 외상도 받아주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외상은 안 됩니다. 워다나즈 씨.”

‘아니 왜 존댓말을...’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편하게 안 된다고 말해도 되는데!

하지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에게 이 외상 문제는 상당히 중요했다.

벌써 다른 탑 학생들이 와서 외상 거래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한이야 같은 탑 학생들이 돈 떼먹고 튈 경우 가문까지 찾아가서 지랄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제국 대가문에 찾아갈 수는 없었다.

때문에 절대 외상 거래는 허락할 수 없다!

설명을 들은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음... 물물교환이 된다고 해서 이것저것 갖고 오긴 했는데.”

이한은 바구니를 들어올렸다.

물물교환 시장이라는 설명에 이것저것 갖고 오긴 했는데, 지금 분위기를 보니 자신감이 사라졌다.

다시 돌아가서 통조림을 더 챙겨와야 하려나?

‘아티팩트는 팔리기 전에 사고 싶은데.’

“뭘 갖고 오셨는데요?”

“일단 갓 수확한 과일과 채소들, 달걀들을 좀 갖고 왔는데...”

“!”

“!!!”

주변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         *         *

놀랍게도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은 과일과 채소, 달걀에 환장했다.

아티팩트를 팔고 있는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걸 팔고 있는 학생들도 이한한테 달려와서 어떻게든 물물교환을 시도하려고 했다.

“이 곡괭이와 삽! 드워프 장인이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물건인데, 하나 장만해두면 언제든 쓸 일이 있을...”

“가짜 생선 절임과 가짜 커피와 가짜 찻잎, 거기 있는 달걀 하나에 바꿔줄게!”

“양파를 얻을 수 있다면 이 지팡이를 드리겠습니다.”

다들 줄을 서서 어떻게든 강매를 시도하는 와중에, 방호의 망토를 감자 2개에 팔아치운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은 감자를 불에 구우며 친구들을 비웃었다.

“멍청하기는. 좋은 걸 팔아야 이득이 남지, 나쁜 걸 팔면서 사정사정한다고 뭐가 남나?”

“넌 닥쳐! 운 좋게 망토 주운 놈이!”

“야. 감자 한 입 빵 몇 개에 팔래?”

“안 팔아. 그딴 빵 너나 먹어라.”

“요즘 감자가 생각보다 맛이 없다던데. 빵이 나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음해에도 불구하고 감자를 얻은 학생은 소중하게 불에 구웠다.

다 구운 감자의 껍질을 벗기자 따끈따끈한 흰 속살이 사르르 드러났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은 후후 불더니 그대로 입에 넣었다.

“...!!”

말로 하지 않아도 감자가 혀 위에서 녹아내리고 있다는 게 짐작이 갔다.

보고 있던 이한은 조금 당황했다.

‘얼마나 굶주린 거야?’

소금이나 버터를 쓰지 않고 그냥 굽기만 한 감자가 저렇게 술술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다들 잠깐 모여 봐라. 요리를 대접해 줄 테니까. 요네르. 좀 도와줄래?”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

‘이번만 돈 받지 말자.’

‘그래!’

어지간해서는 철저하게 돈을 받아내는 이한이었지만, 저 굶주린 모습을 보고서도 장부에 은화 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욕심도 있었다.

‘산맥에 들어가기 전에 요리를 대접해주면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의 환심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는 이미 영구 적대 관계였지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과는 아직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한은 갓 수확한 채소들을 칼로 잘라서 간단하게 간을 했다.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버무리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충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이한은 기름을 두르고 야채를 노릇해질 때까지 볶았다. 벌써 군침 도는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냄비 주변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하나둘씩 좀비처럼 모여들었다.

이한은 토마토 통조림을 하나 깠다. 숟가락으로 깡통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냄비에 붓고 야채를 차곡차곡 쌓은 다음 지글지글 익혔다.

대충 급하게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걸쭉한 토마토 채소 스튜 비스무리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이한은 완성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에게 한 그릇씩 듬뿍 퍼주었다.

그리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다들 숟가락으로 그릇 긁는 소리만 들렸다.

다 먹은 학생들의 얼굴에는 감사와 감동만이 가득했다.

아, 이게 바로 식사였구나!

우리는 한동안 무언가를 잊고 살았구나!

“자. 워다나즈 님에게 박수...”

“조용히 해라 제발.”

이한은 랫포드의 입에 감자를 쑤셔박았다.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치려고 하고 있었다.

*         *         *

이한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뭐라도 챙겨주기 위해 이한의 주머니에 각종 잡동사니를 쑤셔박았다.

덕분에 이한은 두 개의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한쪽에는 랜턴과 낚싯대를, 한쪽에는 삽과 곡괭이를 매단 채 걷게 되었다.

“너... 너무 멋있는데?”

요네르는 그 전위적인 패션에 감탄했다. 랫포드도 동의했다.

“노련한 탐험가 같으십니다.”

랫포드야 그렇다 쳐도 요네르는 놀리려는 건지 아니면 눈이 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한은 한숨을 쉬며 배낭을 하나 내려놓았다. 안에 든 체스 세트와 카드 세트, 주사위 세트가 달그락거렸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의 호감과 신뢰 말고도 얻은 건 있었다.

방호의 망토 말고도 제법 쓸만한 아티팩트들을 몇 개 구한 것이다.

하급 은밀의 부츠(신으면 신기하게도 소리를 줄여줬다), 연막의 분필(던지면 깨지면서 주변에 연기를 흩뿌렸다), 시야 감지의 팔찌(누군가 쳐다보면 일정 확률로 팔찌의 돌이 붉어졌다)...

‘아니. 근데 이거 분명히 고학년들이 만든 걸 텐데. 왜 이런 걸 만들었지?’

이한은 아티팩트 제작 강의를 듣는 선배들의 작품을 보며 그 의도를 의심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다 교수의 눈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

달그락달그락-

“?”

아티팩트를 확인하던 이한은 배낭 안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뼈로 된 손이 움직이면서 배낭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

이한은 순간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 중에는 이런 복잡한 방식으로 마법 함정을 팔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달그락!

뼈로 된 손이 날아오더니, 이한의 품속에 있던 모르툼 교수에게서 받은 정체불명의 뼈와 합체했다.

이제는 손에서 팔뚝까지 정도의 크기로 변한 뼈.

그 뼈는 공중으로 뜨더니 이한의 앞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아니. 아니. 아니.”

이한은 부정하려고 했지만 뼈는 다가오더니 이한의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어 피를 한 방울 가져갔다.

그러자 이 불완전한 뼈 소환수와 정신적으로 연결되는 게 느껴졌다.

“앉아.” “일어나.” “한 바퀴 돌아.” “가서 잡아.”

“......”

“......”

요네르와 랫포드는 복잡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친구가 뼈 소환수를 꺼내더니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면서 흑마법의 길로 가고 있는데, 기분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가 정말 이상한 걸 줬군. 하긴 교수가 멀쩡한 걸 줄 리가 없지.’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파다다닥!

요네르의 말에 뼈 소환수는 벌벌 떨며 이한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손과 팔뚝 뼈만 있는 소환수였지만 왠지 모르게 불쌍함이 느껴졌다.

“...아, 아니. 취소. 취소. 내가 미안해...”

요네르는 했던 말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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