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뒤늦게 도착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시끌벅적한 휴게실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워다나즈가 흰 호랑이 탑을 습격해서 깃발을 뺏자고 했어!”
“...와아아아아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새로 오는 학생마다 상황을 듣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환이 낫지 않냐?”
가이난도는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한은 궁금해져서 물었다.
가이난도가 저런 식으로 의견을 내놓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교환하면 서로 위험 없이 안정적으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잖아.”
“그렇지. 그런데 흰 호랑이 탑 놈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안 되겠다고 결론이 났었잖아.”
“흰 호랑이 탑이 이번에는 믿을만해 보이던데.”
“어째서?”
“흰 호랑이 탑 애들이 나한테 빵하고 우유 주면서 친절하게 말하는 거 보니까...”
“......”
이한은 경악했다.
지금 같이 자기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에서 빵과 우유를 주는 건 절대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아무리 양보해도 빵 반 개 정도까지가 친절이었지, 그걸 넘으면 이제 시꺼먼 속셈이 있다고 봐야 했다.
‘가이난도를 매수하려고 했었나?’
하필이면 왜...?
‘하긴 생각해보니 가이난도가 제법 괜찮은 목표긴 하군.’
신분이 신분이라 발언권도 있어 보이고(물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푸른 용의 탑 내부 분위기까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적당히 허술해보여서 찔러 보기 좋아 보이고...
상황을 대충 파악한 이한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가이난도. 습격하기 전에 먼저 네 말대로 해보자.”
“어? 진짜?”
“응. 흰 호랑이 탑 놈들한테 가서 내가 생각을 바꿨다고 전해줘.”
“다른 애들한테는 말 안 해?”
가이난도는 의아해했다.
지금 습격으로 신이 난 친구들에게 계획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해줘야 하지 않나?
“쟤네들한테 네 훌륭한 계획을 말해봤자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말해보고 올게!”
가이난도는 자신만만하게 바로 출발했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네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한은 요네르의 걱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성질은 좀 더러워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이난도를 붙잡고 괴롭히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가이난도가 배신할까봐 걱정하고 있었어.”
“...가이난도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잖아. 배신 못하게 하는 물약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
이한은 요네르가 아주 살짝 무서워졌다.
그보다 가이난도는 네 사촌이잖아!
* * *
“다 됐어?”
“다 됐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멋들어진 깃발의 모습에 만족했다.
놀랍게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나름 진지하게 깃발을 교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짜 깃발이지만!
가짜 깃발로 상대방의 진짜 깃발을 가져오는 건 꽤나 기발한 생각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눈썰미 좋은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을 모두 속여야 했으니까.
덕분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검은 거북이 탑 암시장에 가서 주말 동안 잡은 귀한 토끼 고기를 천과 염료로 바꿔왔다.
모두 배고픈 와중에 뼈아픈 출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라디! 됐어! 황자 놈이 넘어왔어! 교환할 시간과 장소를 정하래! 정한 대로 내일 해가 머리 위로 왔을 때 본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가이난도를 만나러 간 흰 호랑이 탑의 염소 수인족 학생, 앙라고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역시! 앙라고, 잘했어!”
“그렇게 귀한 음식을 처먹였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다들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고 있었지만 지젤은 여전히 찜찜한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드워프 학생, 듀크마가 물었다.
“왜 그래, 모라디? 무슨 문제라도 있어?”
“난 여전히 그 황자가 쓸만한지 잘 모르겠는데...”
지젤이 찜찜해하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어떤 집단이든 간에, 그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두머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집단 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으면 티가 날 수밖에 없는데...
...가이난도란 황자는 이상하게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라디. 앙라고의 눈을 믿어. 그 황자는 분명 쓸만한 지렛대가 되어줄 거라고.”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듀크마가 앙라고의 편을 들자 다른 학생들도 모두 가세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감만 있는 새끼가 뭐라는 거야?’
물론 지젤은 그런 친구들의 우정에 넘어가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앙라고는 그렇게 능력 있는 편이 아니었다.
능력이 있었다면 세 명이 워다나즈를 상대하러 갔을 때 엉엉 울며 도망치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지젤이 흰 호랑이 탑에서 우두머리처럼 굴고 있었지만,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으니까.
지젤의 능력과 가문을 믿고 밑에서 명령을 따르는 친구들도 사람인 이상 감정이 있고 불만이 있었다.
너무 멋대로 지젤의 명령만 강요했다가는 엇나갈 수 있었다.
어떨 때는 친구들의 말을 지젤이 귀담아듣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기사들이라 그런지 다들 이런 긍지에 매우 예민했다.
“알겠어. 앙라고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맞겠지.”
“헤헤.”
앙라고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차피 실패한다 하더라도 가짜 깃발이니까.’
만약 거래가 실패하거나, 상대방이 함정을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이쪽이 입을 피해는 없다고 봐야 했다.
혹시 실패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쓸 곳도 없는 가짜 깃발을 잃어버리는 것 정도일 테니까.
지젤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다들 해산. 내일 교환해보자고.”
“알겠어!”
* * *
모두가 잠든 밤.
이한과 친구들은 어둠을 틈타 탑 밖을 나와 움직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푸른 용의 탑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도 한 명 섞여 있었다.
그건 바로 도둑질의 프로, 랫포드였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한 혼자 돌아다니는 게 아닌 만큼 프로 도둑놈의 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행히 랫포드는 이한의 부탁에 흔쾌히 응해줬다.
“헉.”
요네르가 숨을 들이쉬며 놀란 소리를 냈다. 이한도 따라서 긴장했다.
뭐지?
“왜?”
“...닐리아도 불렀어야 했는데...!”
“!!!”
이한도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물론 도둑질하러 가는데 닐리아의 능력까지는 필요 없긴 했지만, 나중에 듣게 되면 닐리아는 분명...
“랫포드. 나중에 닐리아가 물어보면 난 너 부른 적 없는 거다.”
“알겠습니다?”
“...아니다. 어떻게든 귀에 들어가긴 하겠군.”
사람이 많아서 나중에 닐리아의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어 보였다.
‘나중에 해명하자.’
“저기가 흰 호랑이 탑입니다.”
어둠 속에서 달빛만이 고고하게 서있는 탑을 비췄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접근했다.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만큼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다들 계획은 기억하고 있지? 계획대로 행동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한과 랫포드가 먼저 흰 호랑이 탑 안으로 진입한다.
다른 친구들은 근처에 숨어 있다가 이한이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기다리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되는 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법.
특히 다들 제국 대가문 출신인 만큼 이런 한밤의 습격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랫... 랫포드 씨. 소리 안 나게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있을까요? 소설 보니까 그러던데.”
“따로 순찰 도는 사람도 없는데다가 숫자 적어서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랫포드 씨. 소리 안 나게 하려고 신발을 천으로 감쌌습니다!”
“밤에는 미끄러질 수 있으니까 푸는 게 낫겠습니다.”
덕분에 어쩌다보니 랫포드가 일일도둑질강사를 하고 있었다. 이한은 랫포드에게 손짓했다.
“가자.”
“예.”
이한과 랫포드는 흰 호랑이 탑 문 앞에 섰다. 마치 자기 탑에 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뒤에서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꽉 쥐고 있던 아산은 문득 의아해졌다.
‘랫포드야 그렇다 치더라도 워다나즈는 왜 이렇게 익숙...?’
이한은 숨을 참고 탑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이 탑 안에 깃든 마법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
순간 이한은 쓰러질 뻔했다.
너무나도 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한 번에 머리로 받아들이려고 했을 때 사람은 아득함을 느꼈다.
지금 이한이 느낀 것도 비슷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들이 이 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한의 마나 감지력이 뛰어난 탓도 컸다.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기껏해야 근처에 걸린 단순한 마법 한두개만 눈치를 챘겠지만, 이한은 그 위의 위까지 감지해버리는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랫포드는 이한이 식은땀을 흘리는 걸 보고 기겁해서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 과연 만만치 않군.”
“마법사의 탑은 원래 들어가기 쉬운 곳이 아닙니다. 힘드시다면...”
“아니야. 해보자고.”
이한은 탑 전체를 읽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어차피 뚫어야 하는 건 입구를 막고 있는 마법뿐!
우우우우우웅-
“...!”
거대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비교적 둔감한 랫포드도 마력이 모이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괜찮...나?’
랫포드는 걱정이 됐다.
저 정도 되는 마력이라면 실수할 경우 이한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아니다. 워다나즈 님이라면...’
꽝!!!!!!
“!!”
“!!!!”
뒤에 있던 푸른 용의 탑 학생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한은 외쳤다.
“문 뚫렸다! 모두 들어와!!”
“가... 가자!”
* * *
-주인님. 흰 호랑이 탑의 마법이 멈췄습니다.
반마법주의자 놈들이 설마 또?! 어떻게 성벽을 넘은 거지?
깊은 지하 공방에서 마법을 연구하고 있던 해골 교장은 오랜만에 깜짝 놀랐다.
-신입생들이 멈춘 모양인데요.
아. 그런 거라면야. 그럴 수도 있지. 다들 내가 내준 과제를 하나보군. 미리미리 할것이지.
해골 교장은 빠르게 침착을 되찾았다.
잠깐. 신입생 수준으로는 탑의 마법을 속일 수 없을 텐데... 아티팩트를 구했나? 어떤 칠칠맞은 놈들이 아티팩트를 흘린 거야? 아. 아니군. 다른 방법이 있었어.
중얼거리던 해골 교장은 빠르게 정답을 찾아냈다.
신입생들 중에서 탑의 마법을 일시적으로 멈출 수 있는 놈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힘으로 후려쳤나? 무식하긴... 그런데 그런 방법을 어디서 배운 거지?
해골 교장은 살짝 의아해했다.
저런 무식한 방법은 실질적으로 쓸 일이 없는데다가 위험하기까지 한 만큼 책은 물론이고 학교의 교수들도 잘 가르쳐주지 않았다.
마법을 해제하려면 구조를 파악하고 틈을 찾아내야지 어떤 무식한 놈이 힘으로 냅다 후려갈긴단 말인가.
-찾아내야 합니까?
아니. 이 멍청한 해골아. 너한테 한 말 아니다. 그보다 입구를 뚫었어도 침입자들을 막는 다른 마법들이 있을 텐데? 그건 어떻게 됐지?
흰 호랑이 탑의 마법은 입구에만 걸려 있는 게 아니었다.
탑 안에도 온갖 침입 방지 마법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다른 방어 마법들도 대부분 멈췄습니다.
......
해골 교장은 다시 멈칫했다.
입구만 뚫은 게 아니라 다른 마법들도 멈췄다고?
‘아니 이런 무식한 놈이...!’
대체 얼마나 세게 후려쳤길래 다른 마법들도 멈췄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