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그냥 순수한 학술적 호기심입니다.”
이한은 교수를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제국의 가장 유명한 탐험가 중 한 사람인 번개걸음 교수였지만, 설마 이한이 학교를 탈출하기 위해 날아다니는 탈것을 찾고 있다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구할 수야... 있겠지.”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이 눈치챘는지 확인하기 위해 표정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다행히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모르는 것 같았다.
신입생들이 돌보는 마구간의 말들 중 하나가 그리폰이라는 것은!
“이 학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넓으니까.”
“따뜻한 식사나 생필품, 학생을 위한 배려는 없잖습니까.”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산이나 호수, 지하 던전 등 없는 게 없는데 찾아보면 날아다니는 놈들이 없을 리 없지.”
“제가 찾게 되면 길들일 수 있을까요?”
“그건 힘들 것 같군. 야생의 몬스터, 그것도 날아다니는 놈들을 길들이는 건 몇 년 동안 배운 조련사들도 어려워하는 일이거든.”
번개걸음 교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길들이는 게 그렇게 쉬웠다면 사람들이 밖에서 몬스터를 만났을 때 굳이 싸움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날아다닐 줄 아는 놈들은 대부분 성질이 까다롭고 거칠었다.
신입생 정도의 끈기와 지식으로는 다루기 힘들었다.
“우선 상대가 어떤 놈인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보통 지식으로는 안 된다. 놈이 가진 습성을 꿰고 있다면 그걸로 조금씩 친해지며 특성을 파악하게 될 텐데... 말은 간단하게 들려도 이 과정에서 수십 번도 넘게 실패할 거다.”
“교수님. 가능하시다면 남는 시간에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지금 당장 무모한 시도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거짓말이었다.
이한은 할 수 있겠다고 판단이 서는 순간부터 바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훗날 제가 몬스터를 길들일 기회가 생긴다면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한의 눈빛은 타오르듯이 이글거렸다. 가식 하나 없는 진심 어린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를 보자 번개걸음 교수는 갑자기 의욕이 생겼다.
제자가 저렇게 관심을 보이는데 스승으로서 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좋다! 남는 시간에 가르쳐주도록 하지. 후회하지 마라. 보통 어려운 공부가 아니니까.”
이 인근에서 나올 법한 몬스터들에 대한 두꺼운 책들을 달달 외우고 다음에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게 되는 어려운 공부였지만, 번개걸음 교수는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정도 흥미와 열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비행이나 탐험에 관심이 많나보군. 녀석...’
‘가장 가능성 높은 짐승을 찾아내서 길들인 다음 탈출한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끝나고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이 작업을 마친 텃밭을 구경하러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놀랐다.
‘아니 뭐가 이렇게...?’
이한이 우레걸음 교수한테 받은 텃밭은 엄청나게 넓지도, 엄청나게 좁지도 않은 적당한 넓이였다.
우레걸음 교수도 이한이 적당히 채소 몇 개 심어서 가져갈 거라고 생각하고 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한의 텃밭은 지금 조금의 자투리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당근, 양파, 감자, 고구마, 양배추 등 각종 식용채소들은 물론이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캐모마일이나 바질, 로즈마리 같은 약으로 쓸 수 있는 풀들까지 있었다.
...농장 차리려고?!
번개걸음 교수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이한은 괜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도 처음에는 걱정했습니다.”
“...뭘?”
“이렇게 좁게 길러도 될까 말입니다. 하지만 나무 정령의 지팡이 덕분에 별 문제 없이 잘 자라는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 아닙니까?”
번개걸음 교수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우유가 담긴 항아리를 쳐다보았다.
이한이 돌아갈 때 쥐어주려고 챙겨 놓은 항아리였다.
지금 일하는 걸 보니 저걸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기다려봐라. 뭐라도 좀 먹으면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
“??”
* * *
이한은 나무 꼬챙이에 꽂은 구운 감자를 한 입 베어 물면서 기숙사로 향했다.
마법학교 안이라는 사실만 잊는다면 낭만적인 저녁이었다.
한쪽 팔에는 이번에 수확한 것들이 담겨 있는 광주리가 걸려 있고 다른 한쪽 팔에는 갓 구운, 소금을 친 햇감자 꼬치가 들려 있고...
마치 넉넉하게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가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은퇴하게 되면 이렇게 살아도 좋을 것 같군.’
분위기 때문인지 햇감자는 정말 맛있었다. 그냥 굽고 소금만 쳤는데도, 한 입 먹으면 따끈따끈한 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번개걸음 교수가 왜 굳이 구워서 손에 쥐어줬는지 이해가 되는 맛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 드시기 아쉬웠던 건가? 자랑하고 싶으셨던 걸지도...’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가 손수 구워준 감자가 자기 텃밭에서 나온 감자라는 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황녀 전하. 도서관에서 자료를 정리해서 갖고 왔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저도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서 과제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왔습니다!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제가 이번에 찾은 책이 있는데...”
‘뭐지?’
그건 황녀와 추종자들이었다.
탑을 가리지 않고 모인 신입생들이 황녀가 듣는 강의에 도움이 되기 위해 이것저것 헌신을 아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은 감자를 우물거리며 놀라워했다.
‘저런 방법이 있었나!’
마음 같아서는 교수들에게 ‘황녀가 부당한 권력으로 급우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라고 신고하고 싶을 정도로 부러운 방법이었다.
이한은 친구들하고 밤새 도서관에서 책 찾아 헤매도 모자란데 황녀는 가만히 숨만 쉬어도 저렇게 정보가 굴러들어오다니.
‘황족의 피 때문인가? 하지만 그런 거라면 가이난도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추종자가 생기는 것인가?’
이한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황녀는 추종자들한테 감사 인사를 한 다음 같이 걸어 올라왔다.
계단 위에서 감자를 우물거리며 구경하고 있던 이한은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다.
“좋은 저녁이군.”
이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황녀의 추종자들은 이한의 얼굴을 알아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푸른 용의 탑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 아닌가.
만약 그들이 잘못 보이기라도 하면 푸른 용의 탑에서 지내는 황녀의 생활이 고달파질수도 있으니,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워다나즈 님을 뵙습니다!”
누군가 한 명이 그렇게 외치자, 다른 학생들은 당황하면서 그 친구를 쳐다보았다.
우리도 따라 외쳐야 하나?
“워다나즈 님을 뵙습니다!”
“워... 워다나즈 님을 뵙습니다!”
“......”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보는 눈이 없었다.
‘누가 보면 잘못도 없는데 징벌방 가겠군.’
추종자들이 왜 이한을 엿먹이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이한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들 만나서 반갑다. 황녀 전하와 이야기를 나눴나보군.”
“네!”
“언제나 황녀 전하께 충심을 다해 헌신하시는 워다나즈 님의 노고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자식들 안 챙겨주면 습격하는 거 아니야?’
광신적인 지지자들은 언제나 무서운 법. 게다가 황녀의 지지자들은 마법학교 밖에도 있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사회생활 할 걸 생각하면 저들의 부당한 압박에도 참아야 했다.
“물론이지. 걱정하지 마라.”
이한은 황녀를 챙겨주는 만큼 은화를 더 받는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군.’
황녀를 챙기는 이야기가 길어지면 이한의 부당이익이 화두에 올라올 수 있었다. 이한은 화제를 바꿨다.
“다들 저녁도 못 먹었을 텐데 좀 먹겠나?”
“...?”
황녀의 추종자들은 그제야 이한이 무언가 바리바리 싸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중에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는 것도.
그건 구운 감자였다.
조각 같은 얼굴을 가진 차가운 인상의 소년이 갓 구운 감자를 꼬치에 꽂아서 내미는 모습은 학생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귀족적인... 농담인가?’
‘먹어도 되는 거 맞아?’
‘시험 아니야?’
“안 먹나?”
“잘, 잘 먹겠습니다?”
학생 중 한 명이 배가 고팠는지 손을 뻗어서 구운 감자를 받아들었다.
이한은 그 위에 손수 소금을 뿌려줬다. 학생은 순간 소금이 아니라 마법약 가루인 줄 알고 긴장했다.
‘아. 소금이구나.’
“괜찮나?”
“맛... 맛있습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 갓 구운 햇감자는 정말 객관적으로 맛있었다.
감자를 받은 학생은 우걱우걱 먹다가 입천장을 데고 목이 메여 컥컥댔다.
“여기 우유도 좀 마시고.”
“감... 감사합니다.”
뜨끈뜨끈한 감자를 뱃속에 집어넣은 학생은 갑자기 이한의 차가운 인상이 부드럽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마법의 감자인가?
“저희도 혹시...?”
“그래. 먹어도 된다.”
주저하던 추종자들은 천천히 손을 뻗어 구운 감자를 집어 들었다.
따뜻한 저녁 햇살 아래, 마법학교의 신입생들은 구운 감자를 먹으며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다.
“황녀 전하도 드리자!”
“무슨 말도 안 되는 무례를... 황녀 전하께서 진노하시면 어떡하려고!”
학생 한 명이 감자를 황녀한테 바치려고 하다가 다른 친구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손을 내렸다.
이한은 무뚝뚝하게 서있던 황녀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시무룩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배고픈 가이난도처럼...
‘너무 심한 비유였군.’
이한은 반성했다.
생각해보니 황녀는 오늘 아침도 먹지 못했었다.
이한은 구운 감자를 챙겨서 남들이 보지 못하게 슬쩍 내밀었다.
“남을 것 같은데 조금 맛이라도 보시는 게...”
학생들은 등을 돌리고 있어서 보지 못했지만, 이한은 황녀가 껍질을 벗겨낸 갓 구운 햇감자를 자르지도 않고 한 입에 넣으려는 걸 분명히 보았다.
“잘라서! 잘라서 드십시오!”
“......”
황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감자를 내린 다음 잘라서 입에 오물오물 넣었다.
학생들은 이한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고 의아해했다.
“뭘 잘라서 드십니까?”
“감자는 잘라서 먹으라고.”
“하하. 워다나즈 님. 저희가 아무리 배고파도 그냥 삼키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잘라서 먹지요.”
“......”
이한은 황녀를 한 번 보고 학생을 한 번 본 다음 생각했다.
‘저 녀석은 출세 못 하겠군...’
* * *
다음 날 아침.
이한은 마구간에서 일을 끝내고 가르시아 교수의 <기초 마법의 이해>를 들으러 친구들과 발을 맞춰 걸어갔다.
이한은 하품을 했다. 유독 피곤해보이는 표정에 요네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졸려 보이는데 괜찮아? 잠을 설쳤어?”
“잠은 제대로 잤는데 악몽을 꿔서...”
“무슨 꿈을 꿨는데?”
“교수가 나오는 꿈.”
요네르는 이한의 정신건강을 위해 굳이 더 묻지 않았다.
볼라디 교수의 수업이 인상에 남았는지, 이한의 꿈에는 볼라디 교수가 나왔다.
꿈속의 볼라디 교수는 이한에게 미쳐 날뛰는 그리폰 위에 올라타서 불타는 원을 통과하며 물 구슬을 조종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교수님!”
가르시아 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이한은 마음이 푸근해졌다.
트롤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마음 편안한 일이라는 건 입학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저번 주에는 흑마법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모르툼 교수님이 오셨었죠?”
곳곳에서 ‘헉’소리가 나왔다.
설마 또 흑마법이냐는 두려움 섞인 반응이었다.
“이번 주에는 소환마법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다른 교수님이 오셨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이한은 자리에 있지도 않은 모르툼 교수가 갑자기 불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