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반-마법 무기.
마력을 흡수하거나 흩뜨리는 효과를 가진 무기.
이런 무기들은 보통 마법사를 상대하는 일이 많은 검사들이나, 혹은 제국 반마법주의자들이 쓰곤 했다.
적어도 마법학교 신입생이 쓸 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나한테 준 건, 이 학교의 교장이다.’
이한은 빠르게 자기합리화를 끝냈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크윽! 주인님은 왜 이딴 신입생을 학교에 받아서...! 이런 건방진 놈은 당장 쫓아내야 하는데...!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서 반박할 뻔했다.
‘네 주인이 날 이렇게 가르쳤다’고 따질 뻔한 것이다.
‘위험했다. 이 자식. 사람을 다루는 게 제법 능숙하군.’
과연 누구 소환수 아니랄까봐 적의 감정을 조종하는 데에 능숙했다.
콰드득!
새벽별에게 두 번이나 베인 언데드 소환수는 제법 마력을 잃어버렸다.
강력한 언데드 소환수라고 해서 불멸의 존재는 아니었다. 갖고 있는 마력을 전부 소모해버리면 역소환 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신입생치고는 매우 미친놈처럼 잘 싸운다는 걸 깨달은 언데드 소환수는 전략을 바꿨다.
모래를 불러내 자신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일종의 갑옷이었다.
더 이상 널 신입생으로 여기지 않겠다. 주인님에게 받은 명예로운 내 이름, 조르반 2세에 걸고 널 쓰러뜨리겠다!
‘이름까지 받았었나?’
보통 이름을 받았다는 건 그만큼 공을 들인 소환수라는 뜻.
이한은 조금 살살 팰 거 그랬나하고 살짝 후회했다.
모습을 드러내라, 마법사! 지금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이한은 당연히 무시하고 거리를 벌렸다.
조르반 2세는 앞발로 바닥을 후려쳤다. 그러자 모래로 된 원뿔들이 허공에 생성되기 시작했다.
경고했다!
“!”
조르반 2세의 전략은 단순했다.
주변에 탄막을 퍼부어 이한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한 대 맞으면 뼈가 부러질 위력이었지만 이미 조르반 2세는 상대를 신입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정을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모래 원뿔이 날아오며 주변의 수풀과 잔가지들을 박살내자 이한은 더욱 더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회복하기 전에 더 데미지를 넣어야 하는데.’
시간을 끌면 유리한 건 상대였다. 이한은 다시 한 번 전략을 고민했다.
쇠나 물의 구슬은 파괴력이 부족했고, 파괴력 있는 번개 마법은 상대가 모래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저번에 했던 것처럼 회전까지 부여시키는 건... 무리겠군. 기다려 줄 놈이 아니다.’
단단한 요새처럼 웅크린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어서 마법을 취소시키고 빈틈을 만들 방법.
그런 방법이 지금 이한에게 있나?
“......”
생각해보니 있었다.
교수부터 정령까지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경고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교수나 정령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타올라라!”
뭐하자는 짓...
뒤에서 상대가 1서클 발화 마법을 시전하자 조르반 2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촛불로 뭘 하겠다는 것인가?
......
그러나 고개를 돌렸을 때 조르반 2세 앞에 닥쳐온 화염은, 촛불보다는 좀 많이 컸다.
* * *
“쿨럭!”
앙라고와 듀크마는 모래가 섞인 기침을 해대며 모래사장 위를 기어갔다.
방금까지 어딘지 모르는 던전에 끌려가서 목 밑까지 파묻혀 있다가, 갑자기 다시 모래사장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 과정에 모래를 좀 먹었는지 입 안이 깔깔했다.
“어떻게 된... 워다나즈?”
저 멀리서 이한이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평소 워다나즈에게서 절대 볼 수 없는, 엉망이 된 모습이었다.
머리칼은 헝클어져있었고 한쪽 팔은 누구와 싸우다가 다쳤는지 부목을 댄 상태였다.
덕분에 평소에도 음영 짙었던 얼굴이 더욱 더 무표정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앙라고는 한밤중에 산에서 해골 교장이 나타났을 때보다 더 놀랐다.
대체 어떤 놈이 워다나즈를?!
‘무슨 방법을 써서 저렇게 데미지를 입힌 거지!?’
“워, 워다나즈! 괜찮냐!”
“다가오지 마라.”
이한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원래 약해져 있을 때 원수진 놈들을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다른 뜻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린 괜찮다.”
“아까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지금 도와주러 가겠다!”
“......”
모래사장 위를 허겁지겁 달려오는 놈들을 보며 이한은 먼저 칠까 고민했다.
‘아니다. 섬에 뭐가 남아있을지 모르는데 한 놈이라도 더 필요하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한은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가라앉는 모래사장에 대기하고 있었던 해골 교장이 소환해놨던 조르반 2세의 이야기를.
그러면서도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무기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 먼저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앙라고와 듀크마는 어리석게도 이런 절호의 기회에 복수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놈들이었다.
“워다나즈. 손을 치워봐라. 내가 이런 부분에는 전문가다.”
듀크마가 진지하게 말했다.
기사 가문 출신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응급처치나 접골을 할 줄 알았다.
그 중 듀크마는 특히 뛰어난 편이었다. 치유 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우려고 마법학교에 들어올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알아서 했으니 괜찮다.”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에서 나보다 뛰어난 놈은... 아니. 진짜 잘 했네.”
이한을 설득하려던 듀크마는 역으로 납득해버렸다.
정말로 깔끔하게 응급처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 자식은 워다나즈 가문인데 왜 이렇게 잘 해놨지?
기사 가문 출신도 아니면서...
“그래도 찾아보면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잠시 좀...”
“왜 그래, 듀크마? 이렇게 부목을 잘 댔는데 풀면 더 고생이지.”
앙라고는 듀크마를 말렸다. 듀크마는 어떻게든 뭔가 해보려고 질척거렸지만 결국 포기하고 밀려났다.
“크윽...!”
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듀크마를 쳐다보며 팔을 뒤로 뺐다.
역시 흰 호랑이 탑 놈들은 방심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워다나즈. 그 언데드 소환수는 설마... 네가 처리한 건가?”
“그래.”
“!”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이한이 소환수를 쓰러뜨렸을 줄이야.
해골 교장이 모래사장에 소환시켜 놓은 소환수를 신입생 혼자서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앙라고와 듀크마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팔이 왜 부러졌나 했더니...’
‘정말로 치열한 싸움이었구나.’
둘은 속으로 싸움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한쪽에는 고작 일학년인데도 온갖 흑마법의 비의를 깨달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한쪽에는 모래사장의 주인이자 해골 교장을 섬기는 사악한 뼈 거북이 조르반 2세.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흑마법들이 치열하게 오갔으리라.
실제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어찌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나무부터 수풀까지 완전히 엉망이었다.
솔직히 대단하다!
앙라고는 근처에 있는 불탄 흔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땅바닥에서부터 떨어진 나무까지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니, 그 범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설마 이것도 네가...?”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앙라고는 깜짝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대체 무슨 화염 마법을 써야 이 주변을 전부 이렇게 태워버릴 수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마 저 팔의 부상은 그런 화염 마법을 썼는데도 덤벼드는 언데드 소환수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기사 가문 출신 중에서도 그런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흰 호랑이 탑 친구들 중에서는 워다나즈가 가진 사악하고 천재적인 마법 실력에만 주목하는 놈들이 많았지만...
앙라고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워다나즈의 용기는 흰 호랑이 탑에서도 보기 드문 용기였다.
‘대단하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싸움은 앙라고의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 * *
무슨 이런 무식한 놈이!
이한이 주변을 뒤덮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화염을 불러오자 조르반 2세는 기겁했다.
사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반응했다면 이한의 공격은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다.
거대한 화염이긴 했지만 정교한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조르반 2세가 부릴 수 있는 모래의 양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갑옷을 더 단단하게 굳히고 버티면 됐다.
그러나 당황한 조르반 2세는 실수를 저질렀다. 급한 탓에 몸을 감싸고 있던 모래갑옷을 풀고 화염을 조기진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 틈을 이한은 놓치지 않았다.
알라르롱에게 배운 검술, 벽암검이 검끝에서 펼쳐져나오고 거대한 바위 같은 일격이 조르반 2세에게 작렬했다.
아까처럼 다리 부분만 날려버린 일격이 아니었다. 조르반 2세의 전신을 강타한 일격이 남아 있는 마력을 전부 흡수해버리고 역소환으로 이끌었다.
조르반 2세는 분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두고 보자, 신입생. 네놈의 이름을 기억해두겠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나는 모라디 가문의 지젤이다.”
두고 보자, 모라디! 다음에 만날 때는 신입생이라고 절대 봐주지 않을 테니!
“......”
이한은 흩어져가는 조르반 2세를 방심을 풀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 탓에 뒤에서 나무 하나가 부러져 떨어질 때 반응이 늦었다.
아까 발사된 모래 원뿔을 맞은 데다가 불까지 붙어서 타버리자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
이한은 뒤늦게 반응했지만 한쪽 팔을 강하게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 * *
욱신거리는 통증에 이한은 조르반 2세를 속으로 욕했다.
‘젠장. 언데드 소환수 놈 때문에... 얌전히 죽을 것이지.’
“워다나즈. 그냥 포기했어도 됐을 텐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운 거냐?”
앙라고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포기하고 모래사장 밑으로 끌려와도 됐을 텐데 대체 어째서?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야...”
이한은 ‘니들하고 같이 시련 도전하기 싫어서’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상황에서 기사 두 놈을 도발하는 건 영리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게 포기하는 건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다.”
이한은 명예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쓰기 좋은 단어라는 걸 요즘 들어서 느끼고 있었다.
-워다나즈, 아무리 찾아도 그 구절을 책에서 찾을 수 없는데 그냥 포기하면 안 되나?
-그건 명예롭지 않은 행동이다.
-워다나즈, 매번 너한테 대접받아서 미안한데 그냥 어떻게든 해결해볼게.
-그건 명예롭지 않은 행동이다.
-이한, 이거 도저히 못 풀겠는데 그냥 베끼면 안 되나?
-한 대 맞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풀도록.
-왜 나한테만...!
대충 대답하기 애매할 때 ‘명예’ 붙여서 말하면 상대는 알아서 좋은 뜻으로 해석해주곤 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그랬다.
“...그렇군...!”
“워다나즈 가문의 명예...”
앙라고와 듀크마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워다나즈 가문은 무자비하고 냉혹했지만, 그만큼 가문의 명예 또한 무게가 있었다.
그 가문의 명예를 짊어진 워다나즈에게 저런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흰 호랑이 탑의 적이지만 저런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기사들의 적이지만 저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워다나즈. 그 팔이 낫는 동안 우리가 네 팔이 되어주겠다!”
“자, 배낭을 줘라! 들어주겠다!”
“내 배낭에 손대는 순간 뼈 부러질 줄 알아라.”
“......”
“......”
“농담이었다.”
이한이 농담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었다.
무슨 농담을 저렇게 살벌하게 한단 말인가.
“그, 그렇지? 농담이었지?”
“그런 얼굴로 농담을 하다니... 하하. 하하하.”
“무슨 얼굴을 말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워다나즈!”
듀크마는 허겁지겁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모습에 이한은 앙라고에게 물었다.
“저 친구가 길을 알았나?”
“...듀크마! 어디 가냐!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