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사실 소환수들이 보기에 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딱히 이기적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주인이 잔뜩 심술이 났을 때 그런 소리를 잘못 했다가는 마법학교 본관 지하 17층으로 날아가 오지도 않는 침입자를 기다리며 백 년 정도 잡일을 하는 수가 있었다.
소환수들은 그저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이기적입니다.
-다른 학생들이 배울 기회를 뺏었군요. 주인님.
-아주 못된 놈입니다.
대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저렇게 가르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소환수들의 아부에도 불구하고 해골 교장은 화가 덜 풀렸는지 투덜거렸다.
해골 교장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한의 행동을 보면 해골 교장의 젊었을 적과 상당히 비슷했다.
영리하고, 배짱 있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자신을 숨길 줄 아는 놈.
그런데 대체 왜 다른 탑의 학생들을 도와준단 말인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습관이었다.
* * *
해골 교장이 매우 무례한 비교를 하고 있는 동안 이한은 온 정신을 다해 집중하고 있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경험은 사실 마법학교의 신입생이 굳이 겪어야 하나 싶은 경험이었다.
모험가나 용병도 아닌데 왜 그런 경험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빛이여!”
그러나 현장에 있는 학생들에게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한은 다른 친구들이 띄운 광원 마법이 사라지자 망설이지 않고 빛 마법을 시전했다.
아산은 기겁해서 외쳤다.
“워다나즈, 위험...”
아무리 이한의 마력이 많다지만 기숙사 안에서부터 계속 마법을 쓴데다가 지금 물 구슬들까지 띄워 놓은 상태였다.
저기에 빛 마법을 또 쓰는 건 아무리 이한이라도...
“빛이여, 빛이여, 빛이여! 열이여, 공기를 일그러뜨려라! 무슨 일이지, 아산?”
“...아무것도 아니야!”
내 친구지만 진짜 대단하다!
아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이한이 열기 섞인 환상을 불러내자 주변에 아지랑이 같은 분신들이 생겨났다.
스켈레톤 전사들은 그 환상 중 무엇이 진짜인지 몰라 순간 포위망이 어지러워졌다.
“이쪽으로!”
불사조 탑 학생들은 빛의 구체를 뒤에 띄우고 달려오는 이한의 모습에 아찔함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후광을 뿜어내는 모습이 마치 성인(聖人)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워다나즈 님!”
“달려!”
“워다나즈 님...!”
“달리라고!”
“워다나즈 님은 정말...”
딱!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러서 사제 한 명의 등짝을 때렸다.
“달리라고 이 자식아! 맞고 싶나?”
“죄, 죄송합니다.”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광에 취해서 정신줄을 놓고 있던 사제 학생은 맞고서 정신을 차렸다.
성인이 아니라 워다나즈 맞구나!
“안쪽으로 달려라! 바리케이드 안으로 피해!”
이한은 남아 있는 물 구슬들을 날려서 쫓아오는 스켈레톤 전사들을 고꾸라뜨렸다.
‘되겠다!’
흐트러진 언데드들의 모습을 보니, 충분히 여유롭게 사제들을 대피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산이 고꾸라졌다.
“컥...!”
“!”
이한은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마력의 파동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저주 마법!’
아산은 왼쪽 다리가 마비되었는지 붙잡고 버둥거렸다.
“쥐... 쥐가...”
“워다나즈, 어떻게 하지?!”
“아산은 내가 데리고 간다. 들어가!”
이한은 아산을 들어서 한쪽 어깨 위에 들어올렸다.
아산은 왼쪽 다리 마비 저주를 맞아서 괴로운 와중에도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워다나즈...!”
이런 상황에서 버리지 않고 챙겨주는 친구가 어디 있겠는가.
워다나즈는 진정 명예로운 친구였다.
쉭!
저주 마법이 한 번 더 날아왔다. 이한은 재빨리 아산을 앞에 세워서 막았다.
“컥! 워다나즈! 크학학학!”
아산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산을 든 상황에서 민첩하게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자신이 방패가 되어서 간지럼 태우는 저주를 맞고 나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너 왜 으하하하하하!”
“미안하다. 아산.”
아산의 희생 덕분에 이한은 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스켈레톤 전사 사이에 뼈 지팡이를 들고 있는, 언데드 특유의 음(陰)의 마력을 더 짙게 뿜어내는 놈이 있었다.
어둠 속인데다가 스켈레톤 전사들 사이에 섞여 있어서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이한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저주를 두 번 쓴 이상 잡아달라고 외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번쩍여라!”
이한의 주문이 터지고 스켈레톤 주술사를 향해 번개줄기가 쏘아져나갔다.
스켈레톤 주술사는 당황해서 삐걱거렸지만 다행히 주술사에게는 다른 전사들이 있었다.
팍!
스켈레톤 전사들이 불길함을 느끼고 몸으로 때웠다. 뼈다귀들이 튀고 공격이 막혔다.
‘젠장.’
전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마법사를 공략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직접 몸으로 겪게 될 줄이야.
스켈레톤 전사들을 뚫고 주술사한테 유효타를 넣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달그락!
이번에는 스켈레톤 전사들이 이한에게 달려들었다. 이한을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스켈레톤 주술사가 마법을 날리는 동안 이한이 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쉬익!
아까처럼 마력의 파동과 함께 저주 마법이 이한에게 작렬했다.
스켈레톤 전사들은 이한이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매우 좋아했다.
퍽!
“이런 귀찮은 자식들이...”
-?!
그러나 이한은 마비되어서 쓰러지는 대신 쌩쌩하게 스켈레톤 전사들을 마저 해치웠다.
놀랍게도 저주를 정통으로 맞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다.
압도적인 마력이 어지간한 저주는 침범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매직 미사일!”
“불타라!”
“워다나즈! 도우러 왔어!”
스켈레톤만 친구들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한도 친구가 있었다.
지친 불사조 탑 학생들이 바리케이드 안쪽으로 들어가고 여유가 생기자 남아 있던 친구들이 이한을 돕기 위해 추가로 몰려나온 것이다.
주먹크기만 한 마력의 구체가 쏘아져나가고 스켈레톤 위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중 불사조 탑 학생 한 명은 이한의 눈에 띌 정도로 잘 싸웠다.
“불이여 쏘아져라!”
2서클 마법인 <화염 발사>를 다루는 걸 보면 화염 마법에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화염 정령 혼혈인가?’
선대에 화염 정령과 계약한 사람이 있었는지 불사조 탑의 사제는 머리칼과 눈동자가 작게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벌써 2서클 화염 마법이라니...”
“으하하하! 잘 쏘네. 우하하하!”
“부럽군.”
“????”
아직도 저주 때문에 웃던 아산은 이한의 말에 웃다가 당황했다.
‘저걸 워다나즈 네가 왜 부러워하냐?’
저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법들을 여럿 사용하는 이한이 고작 불 좀 날리는 마법을 부러워한다니.
아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워다나즈 님. 고맙소. 덕분에 동료들이 다 들어갈 수 있었소.”
“내가 할 말이다. 덕분에 주술사를 쓰러뜨렸군.”
이한은 사제와 악수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사제가 손을 뒤로 당기기도 전에 이한은 상대의 손을 잡아버렸다.
“...!”
이한은 그제야 상대의 손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위험... 하지는 않군.’
깜짝 놀랐던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화염은 이한의 손을 다치게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겉으로만 타오를 뿐 안전한 불이었군.”
“...아, 아니오만...”
“?!”
이한은 당황해서 황급히 손을 뺐다. 그제야 좀 뜨거움이 느껴졌다.
‘뭐야?’
상대의 화염이 안전한 게 아니었다.
이한이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손바닥에 내뿜어서 화염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에 불타는 강아지를 껴안고 뒹굴었을 때처럼 보호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괜찮은 것 맞소? 다쳤다면...”
“아. 괜찮다. 미안하군. 섣불리 행동해서.”
“미안할 것 뭐가 있겠소.”
사제는 자신을 소개했다.
불을 숭배하는 아프하 교단의 사제, 니기소르.
이한의 예상대로 선조 대에 화염 정령과 계약해서 피가 섞인 사제였다.
“다시 한 번 도와줘서 고맙소.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시오.”
감사의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사제의 뒷모습을, 이한은 아주 높게 평가했다.
세상에는 흰 호랑... 아니, 도와줘도 이한을 탓하는 못된 사람들도 많은데 니기소르 사제 정도면 매우 예의바른 편이었던 것이다.
‘좋은 사람이군.’
* * *
“니기소르 사제님 말씀이십니까?”
“좋은 사람이던데.”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티질링 사제를 만난 이한은 니기소르의 이야기를 했다.
아까 화염 마법으로 도와준 것도 그렇고 은혜를 잊지 않는 것도 그렇고...
역시 사제들은 사람들이 다 좋은 걸까?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
이한은 티질링 사제의 말에 놀랐다.
티질링이 누구던가.
불사조 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인성 좋은 사제 아니던가.
그런 사제가 저렇게 말을 하다니.
“혹시 니기소르 사제가 탑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켰었나?”
“그건 아닙니다만...”
지친 사제들한테 회복 물약을 돌린 시아나 사제가 이한을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연금술의 통찰자이자 이해자이신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플레맹 교단의 눈부신 샛별 같은 인재인 시아나 사제! 볼 때마다 그 뛰어난 연금술 능력은 감탄만 나오는군.”
“......”
티질링은 황당하다는 듯이 둘의 공방을 쳐다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칭찬해주는 솜씨가 무슨 제국 사교 파티 못지않았다.
이한은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시아나 사제. 혹시 니기소르 사제가 탑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나?”
“그런 적은 없지요?”
“그렇군. 내가 아까 니기소르 사제한테 도움을 받았는데, 참 잘 싸우고 믿음직스럽더군.”
“그렇군요. 그런데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둘 다 이러자 이한은 당황했다.
‘티질링 사제는... 남 험담이라 안 말해줄 것 같고.’
이한은 시아나 사제한테 캐묻기로 했다.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인 시...”
“언데드들이 도망친다!!!”
“동이 트고 있어! 동이 트고 있다고!”
저 멀리 여명과 함께 바리케이드 너머로 스켈레톤 전사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탑에 상관없이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들 고생했어.”
“너도!”
곳곳에서 학생들은 서로 껴안고 악수하며 칭찬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마법학교에서 같은 전우로서 싸운 것이다.
가이난도는 가슴 벅차오르는 기분에 바리케이드 밖으로 뛰쳐나가서 외치려고 했다.
“우리가 이겼...”
“잠깐.”
“?!”
이한은 가이난도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샤르칸. 먼저 나가봐라.”
샤르칸은 한 번 짖더니 바리케이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바리케이드 앞에 바짝 붙어서 숨어 있던 스켈레톤 전사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도망쳤다.
“......”
“......”
학생들은 그 모습에 치를 떨었다.
마지막까지 저렇게 함정을 파다니.
진짜 더럽게 치사하다!
* * *
진짜 더럽게 치사하군.
해골 교장은 삐죽거리며 말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심계가 깊은 놈이었다.
정말 다음에는 따로 떼놓고 함정을 파든가 해야지...
태양은 야속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해골 교장은 한숨과 함께 말을 전했다.
만점이다.
“감사합니다.”
이한은 가장 앞에서 대표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역시 불사조 탑 학생들을 구해준 게 컸군.’
‘저 놈은 혼자 만점 받으면 받았지 왜 다른 놈들까지 도와주는지 모르겠군. 나를 도발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대담한 놈 같으니...’
스승과 제자는 훈훈하게 시험을 마무리 지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