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내가 볼라디 교수한테 배워왔던 건, 지금 같은 순간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군.’
이한은 <물 구슬 피하기>란 글자를 읽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학점 때문이라지만 볼라디 교수한테 공격받다 보면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하고 근본적인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물 구슬 피하기>라는 글자를 보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 공부는 삶에 도움이 되니까 하는 거구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축제를 좋아하나보군.”
“...예. 뭐.”
이한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볼라디 교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축제를 좋아하다니 이렇게 데리고 오기를 잘했다고.
뛰어난 마법사에게는 휴식 또한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 * *
흰 호랑이 탑의 학생, 알파 가문의 앙라고는 처음으로 마법‘학교’에 들어온 기분을 느꼈다.
떠들썩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
다양한 천막들과 점포들.
이게 바로 축제였다.
“흰 호랑이 탑의 학생인가요?”
“예. 사제님.”
“이거 좀 먹어보고 가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앙라고는 사제가 손수 구운 감자를 감사히 받아들었다.
마법학교에 들어온 뒤로부터 편식이 사라지고 모든 식사에 대해 감사하게 된 앙라고였다.
지금 사제가 내밀어 준 감자는 앙라고에게 같은 무게의 황금처럼 느껴졌다.
‘이런 걸 주시다니. 사제님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다.’
없던 신앙심도 뭉클 생겨나는 걸 느끼며 앙라고는 감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었다.
포실포실하고 따끈한 게 입을 꽉 채우고, 살짝 단맛까지 느껴지는 걸 보니 비싼 품종으로 귀하게 기른 놈이 분명했다.
분명 맛있었는데...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앙라고는 허겁지겁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워다나즈 놈이 구웠던 게 더 맛있었던 것 같은데...???’
앙라고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에 당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앙라고. 저기 봐. 교수님들도 계셔.”
“!”
친구들의 말에 앙라고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었다.
사제들만 있는 게 아니라 평소 본 적 있는 교수들도 다른 복장을 입고 천막 아래에 서있었다.
“학생 불러서 준비한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로 하시네.”
“모라디도 가더라.”
“소문에 교장 선생님도 뭔가 준비하신다던데 정말이야?”
“에이... 소름끼치는 소리 하지 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정색하고 친구의 말에 반박했다.
다른 기숙사 탑 학생들도 해골 교장을 무서워하긴 했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공포는 좀 더 심한 편이었다.
밤에 산을 달려서 도망치려다가 해골 교장이 어둠 속에서 시퍼런 안광을 흩뿌리며 나타나는 걸 목격한 신입생은 트라우마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번 가볼까?”
“저기 한 번 가보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호기심에 차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당황했다.
“......”
“......”
두 명의 사제(師弟)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는 모습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볼라디 교수도,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도 가만히 서있는 겉모습만으로도 상대를 위압하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물... 물 구슬 피하기 맞습니까?”
볼라디 교수의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는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들어오는 학생을 패서 쫓아낸다고...
‘아니. 워다나즈 놈은 왜 저런 강의를 듣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분했지만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이번 신입생들 중 가장 영리한 편에 속했다.
그런 녀석이 <기초 춤과 사교>나 <기초 제국 명작과 걸작의 이해> 같은 강의에는 안 보이면서 왜 저런 강의를...?
혹시 그런 강의들은 너무 잘 알아서 재미가 없는 건가?
‘그럴지도 몰라.’
워다나즈 놈은 대가문 출신인 만큼 저런 귀족식 예절을 질릴 정도로 익혔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지겨운 나머지 그런 것들을 뺀 나머지 강의를 듣는 걸지도...
볼라디 교수 옆에 서있는 이한의 조각 같은 얼굴을 보자 방금 떠올린 가설에 묘하게 설득력이 실렸다.
“물 구슬 피하기가 맞다.”
“혹, 혹시 저희가 워다나즈 녀석한테 물 구슬을 날리는 건가요?”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묘하게 열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하긴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 이한에게 물 구슬 던질 기회를 주면 달려올 놈들이 많긴 했다.
나중에 정말 급전이 필요하면 그런 장사를 해도 될지도...
“아니다.”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닌가요?”
“워다나즈가 날리면 너희들이 피한다.”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정색했다.
아무리 봐도 볼라디 교수가 ‘축제’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축제가 뭔지 모르시나?
“그 피하는 게... 그게...”
학생들은 교수한테 ‘축제가 뭔지 몰라요?’라고 말하지 못해서 말을 망설였다.
앙라고가 꾹 참고 입을 열었다.
“다 피하면 뭐라도 있나요?”
“그렇다.”
“상품이 뭡니까?”
“외출권.”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얼굴이 다시 돌변했다.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젠장. 소문 다 나겠군.’
왜 사람들은 호화찬란한 천막들 사이에 허름한 천막이 있으면 굳이 거기에 들리는 걸까?
그냥 호화찬란한 천막이나 들릴 것이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방문했으니 이기든 지든 소문이 퍼질 것이고 다른 친구들이 방문할 건 분명한 이치였다.
‘하지만 절대로 넘겨줄 순 없다.’
이한은 지금 외출권을 하나 갖고 있었다. 무려 진짜 외출권이었다.
하지만 이 외출권을 쓰는 건 아직도 좀 찜찜했다. 훔쳐서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사용하는 과정에서 해골 교장이라도 만난다면 ‘너 언제 어디서 구했냐?’면서 경로가 추적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짜 외출권을 합법적으로 하나 더 가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 핑계를 대서 먼저 훔친 걸 쓸 수도 있는데다가 쓰는 과정에서 빈틈을 확인해 다음 외출권을 쓸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
‘절대로!’
앞을 보니 앙라고의 눈빛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 앙라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앙라고가 갖고 있는 건 위조 외출권이었으니 더더욱 진짜가 필요하리라.
‘반드시... 손에 넣겠다!’
“앙라고. 도전하려고?”
“그러면? 너희는 안 하겠다는 거야?! 외출권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잖아! 저번에... 크흠. 그거를 쓰려면 얼마나 위험할지...”
“하지만 저 교수님... 알잖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볼라디 교수를 쳐다보았다.
뱀파이어 종족 특유의 창백한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잘생겼다 하더라도 일단 교수의 직위를 달고서 지팡이를 잡고 있으면 학생들에게는 미치광이 연쇄살인마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 구슬은 워다나즈가 던진다.”
“앗. 그렇습니까?!”
“정말이요!?”
“그래.”
이한이 대답했다.
그리고 지팡이를 붙잡았다.
“도전할 거냐?”
“물, 물론이지!”
아까까지만 해도 망설이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앞다퉈서 나섰다.
마치 친구가 먼저 도전하면 저 외출권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준비해라.”
이한 앞에 물 구슬이 하나 떠올랐다.
이한의 물 구슬에 직접 당해본 적 있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인 만큼, 바로 능숙하게 경계 자세를 취했다.
“와라. 워다나즈!”
“알겠다.”
말과 함께 물 구슬의 숫자가 우르르 늘어났다.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눈동자가 크게 부릅떠졌다.
* * *
알펜 나이튼 교수의 친구이자, 본인 또한 제국 상급 회계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켄드리 바쿠.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걸 확인한 켄드리는 발드로가드에서 온 마법사들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에인로가드를 구경하러 온 건가?”
발드로가드는 에인로가드만큼의 명성을 가지진 못했지만 꽤 괜찮은 제국의 마법학교였다.
게다가 켄드리가 보기에는 발드로가드의 교육방식이 좀 더...
...합리적이고 귀족에게 걸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을 봐도 에인로가드의 교육방식은 조금 구시대적이고 거칠 때가 있었던 것이다.
“맞습니다. 바쿠 님.”
발드로가드의 교수로 일하고 있는 마법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소년소녀들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우리 학교에 찾아오지 않는데, 우리들은 직접 찾아가야 해요?”
“에인로가드가 우리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쉿. 다른 마법사의 학교에서는 예의를 갖춰야지. 발드로가드의 명성을 더럽힐 셈이니?”
인솔자 역할을 맡은 발드로가드의 교수는 품위 넘치는 태도로 손가락을 올렸다.
그 모습에 발드로가드의 학생들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불만스러웠지만 예의 바른 그 태도에 켄드리는 학생들의 출신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서부에 위치한 발드로가드는 그 화려한 외양과 풍경에 어울리는 제국 명문가의 자제들만 학생들로 받아들였다.
학생들은 따뜻하고 포근한 제국 서부의 기후와 풍광명미한 자연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런다고 질투심과 열등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해가 안타깝군.’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발드로가드에 찾아가지 않는 게 아니었다.
교장이 못 나가게 괴롭히는 거였지.
켄드리가 보기에 에인로가드 학생들한테 ‘발드로가드 방문할 사람?’하고 묻는다면 서로 때려눕혀서라도 권리를 쟁취하려고 할 것이다.
“누가 먼저 방문하느냐로 격이 정해지는 건 아냐. 발드로가드가 더 관대하고 너그러운 거지.”
켄드리의 말에 학생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2,3학년 학생들이지만 아직 미성숙했다. 이런 말에 넘어갈 정도면 더더욱 그랬다.
“저기 축제에서 에인로가드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 실력을 보여주겠어요.”
“......”
켄드리는 발드로가드 학생들한테 ‘지금 너희들이 축제에서 볼 수 있는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신입생밖에 없다’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1학년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왜 1학년을 따로 분리해놔요? 접촉을 못해요? 그러면 선배들하고 이야기를 못 하잖아요? 클럽 활동도 못 하고.. 대체 왜?
‘음. 그냥 저기 교수한테 맡겨야지.’
켄드리는 빠르게 포기했다.
“그러면 바쿠 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으음... 조심하라고.”
발드로가드의 교수는 귀족다운 우아한 태도로 인사를 한 뒤 학생들을 데리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켄드리는 자신의 충고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까워했다.
‘저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나타났다.
발드로가드의 학생들은 지팡이부터 잡았다.
“인사하고 실력을 비교해보게 해주세요!”
“다들 진정해라. 그런 무례한 짓은...”
“비켜요! 비켜!”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쓰러진 친구를 업고 달려나갔다. 몇몇은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
“...???”
발드로가드의 학생들은 그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 * *
“사고가 있었니?”
“불운 섞인 실수였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한은 처음 보는 마법사와 그 제자들의 모습에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발드로가드 손님이군.”
볼라디 교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한은 그 이름을 알아들었다.
“발드로가드면...”
“쓰레ㄱ...”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볼라디 교수의 발등을 콱 밟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한테 놀랐다.
“??”
볼라디 교수가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발이 미끄러졌습니다.”
“조심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