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생각했던 것보다 무사히 넘어가자 이한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선하게 살아서 행운이 따라주는구나.’
그리고 다른 생각 하나가 이어서 떠올랐다.
‘나중에 또 기회가 된다면 밟을 수 있을까?’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자만은 위험을 부르는 법.
아무리 즐거워도 그렇지 교수의 발등을 두 번이나 밟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교수님. 외부에서 온 손님들인 만큼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그러고 싶나?”
“예.”
이한은 강하게 말했다. 볼라디 교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밖에서 온 손님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축제 때문에 신난 게 분명하군.’
볼라디 교수는 이한이 축제 때문에 신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발드로가드 같은 곳에서 온 손님들을 뭐하러 저리 대접하겠는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한의 예의바른 인사에, 발드로가드의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도 스스로의 혈통을 증명하곤 했다.
억양, 습관, 행동 등 매순간 보여주는 짧은 모습들에서 귀족들은 서로 눈치 챌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부(富)를 쌓아 올린 신흥 하급귀족 가문들이 제국의 유서 깊은 대귀족 가문들처럼 행동하려다가 비웃음을 사는 건 다 저래서였다.
화려한 저택과 재산은 쌓아 올릴 수 있어도 가문의 시간과 관습을 쌓아 올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눈앞의 소년이 보여주는 모습은 대귀족 가문 출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툴툴대던 발드로가드 학생들도 살짝 입을 다물 정도였다.
“어느 가문 출신인가요?”
“워다나즈 가문 출신입니다.”
“워다나즈! 과연... 에인로가드에 입학할 만하군요.”
상대 교수는 칭찬의 뜻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이한에게는 별로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에인로가드에 입학할 만하다는 건 분명히 칭찬인데, 왜 우울하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군.’
이한은 화제를 돌렸다.
“발드로가드의 명성은 여기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말에 학생들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어느 누가 하는 칭찬보다도, 눈앞의 에인로가드 학생이 하는 칭찬이 가장 달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한은 발드로가드의 명성을 학교에서 들은 적이 없었다.
당장 먹고 살고 과제하기 바쁜데 누가 한가하게 발드로가드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런가요? 아주 기쁘군요.”
하지만 이한이 한 선의의 거짓말이 상대를 기쁘게 만든 건 확실했다.
발드로가드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다 행복해진 것 같았다.
행복해하는 학생들을 쳐다보던 이한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어떻게 남의 학교 축제에 방문할 수 있는 거지?’
발드로가드.
제국 서부에 위치해 있고, 귀족 가문 출신들만 들어간다는 것 정도가 이한이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거기도 어쨌든 마법학교 아닌가.
발드로가드 학생들도 숨막히는 학교 안에서 괴로워하며 투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축제에 방문하신 겁니까?”
“?”
이한의 말에 상대 교수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시죠?”
“그러니까... 학생들은 일단 밖에 못 나가잖습니까.”
“??”
발드로가드의 교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아, 강의 도중에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밤에?”
“...강의 끝나고... 남는 시간에... 학교 밖으로 못 나가지 않습니까?”
이한은 질문을 하면서도 섬뜩한 두려움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설마.
설마??
“농담도 참!”
교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닙니까?”
“아니죠! 남는 시간에 학교 밖으로 못 나가게 하다니. 그런 짓을 왜 하겠습니까?”
“오...”
이한의 속마음도 모르는 채 발드로가드의 교수는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발드로가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도시가 위치해 있었고,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말을 타고 대도시로 놀러가 각종 여가생활을 즐기고 오곤 했다.
가끔 혈기 넘치는 학생들이 저녁에 술에 취해 문제를 일으키곤 했지만 그것 또한 젊은 혈기라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귀족이라면 이러한 사교활동도 중요한 덕목이었다.
‘제국 귀족 놈들 정말 미친듯이 재수없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재수없는 놈들!
“그러면 이번 여행도... 그냥 별 문제없이 오신 겁니까?”
“예. 학생들이 제국을 돌면서 경험을 쌓겠다고 신청하면 통과가 되지요.”
“그래도 아무나 나올 수 없는 그런 규칙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아. 있긴 있습니다.”
“역시...! 학교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만 나갈 수 있다거나?”
“그건 너무 가혹하네요. 한 달에 도시에서 소란을 네 번 이상 피운 학생은 일주일 외출 금지입니다.”
“......”
이한은 볼라디 교수가 왜 발드로가드를 쓰레기 취급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런 느슨한 규칙 때문에 귀족들의 정신이 썩어빠지는 것 아닌가.
‘정신 차리자.’
이한은 마음을 다잡았다.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부러웠지만 지금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 있겠는가.
중요한 건 외부에서 온 손님들에게 잘 보이는 일이었다.
인맥이란 건 평소부터 관리해둬야 했다. 언제 어디서 쓰게 될지 몰랐으니까.
졸업 이후 찾아간 일자리에 발드로가드 출신 마법사가 상관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 오신 분들은 몇 학년이십니까?”
“2학년과 3학년입니다.”
“...2학년과 3학년이 같이 다녀도 되는 겁...? 아, 1학년만 같이 안 있으면 되니 그런 겁니까?”
“무슨 소리신지...? 1학년도 같이 있어도 됩니다. 1학년들은 다른 곳을 여행하기로 해서 방향이 달라졌지요.”
“!”
이한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발드로가드는 1학년을 따로 분리시켜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겠군.’
생각해보니 도시 외출도 가능한데 1학년을 따로 분리시킬 이유가 없었다.
“왜 그런 질문을...? 혹시 에인로가드는 1학년을 따로 격리시켜놓나요?”
“예.”
이한은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발드로가드에서 온 손님들은 믿지 않았다.
대신 폭소를 터뜨리면서 이한의 농담에 감탄했다.
“그런 농담을...!”
“아하하하하!”
“1학년만 따로 분리시켜놓으면 사교활동도, 파티도, 클럽 활동도, 아무것도 못하잖아!”
이한은 우울한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빨리 꺼져줬으면 좋겠군.’
외부에서 온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사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 * *
대화가 끝났는데도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떠나지 않았다.
대신 천막에 걸린 <물 구슬 피하기>에 과도한 호기심을 보였다.
“저건 뭔가요?”
“축제 기간에 진행하고 있는 행사입니다.”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공손했지만 매우 의욕적인 태도로 참가하고 싶어 했다.
물론 이한은 발드로가드 학생들의 낯짝에 물 구슬을 굳이 날리고 싶지 않았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야 경고를 해줘도 덤벼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외출권도 필요 없잖은가.
“저희도 참가해도 될까요?”
“괜찮습니다만, 상품은 외출권입니다. 저희 학교 외출권은 아무 쓸모가 없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더 귀한 상품은 바로 명예니까요.”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
이한은 분노했다.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심심하면 외출할 수 있다지만 에인로가드 학생들에게 저 외출권 하나는 거의 목숨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는 놈들이 그냥 자기들 명예를 위해서 외출권을 노리다니.
제국의 귀족들은 양심이 없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참가하시죠.”
“!”
이한의 허락이 떨어지자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을 들었다.
반드시 에인로가드 학생들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고야 말겠다!
“제가 먼저 나서도록 해주십시오.”
“마법 실력으로 봤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나서야 합니다. 방어 마법에 가장 뛰어나지 않습니까.”
“방어 마법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제 예지 마법으로 해결하겠습니다.”
“육체 강화 마법으로...”
다투는 학생들을 보며 이한은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볼라디 교수와 시선을 교환했다.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제(師弟)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 *
발드로가드?
둥둥 떠서 날아오던 해골 교장은 코피 줄줄 흘리며 자리를 떠나는 다른 학교 학생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찾아왔었나?
“예. 여행 도중에 축제 소식을 듣고 방문한 모양입니다.”
쯧쯧... 여유롭게 여행이나 하고. 그러니까 마법을 못하는 거지.
“......”
누구한테 맞은 거지?
“글쎄요. 마법을 시험하다보면 부상을 입는 건 당연한 일이니...”
해골 교장은 청각을 강화시켰다.
-다들 너무 좌절하지 마렴. 상대는 너희들보다 더 오랫동안 마법을 수련한 고학년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교수님. 상대는 4학년이었나요, 5학년이었나요?
-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치료해 줄 테니까, 피가 멎으면 다른 곳을 구경하자꾸나.
?
해골 교장은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떤 간 덩어리가 부은 4,5학년생이 해골 교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신입생들의 축제 자리에 고개를 들이밀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4,5학년쯤 되는 놈들은 학교 돌아가는 꼴을 대충이나마 이해한다.
그런 일을 들키게 할 리가 없었다.해골 교장은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흘린 코피 자국을 빠르게 추적했다.
...아하!
해골 교장은 볼라디 교수와 이한이 서있는 모습을 보고 모든 걸 이해했다.
어쩐지!
잘했다. 에인로가드의 명예를 드높였구나.
날아오는 해골 교장을 본 이한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상대를 다치게 만든 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해골 교장이 웬일로 위로를 해주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발드로가드 놈들은 멍청한 귀족들의 돈이나 우려내서 소꿉장난이나 하는 쓰레기들이니까 힘이 좀 들어가는 것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놀랍게도 볼라디 교수 정도면 온전한 편이었다.
해골 교장의 폭언에 이한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발드로가드 분들도 충분히 뛰어나셨습니다.”
고학년을 어린애 손목 비틀듯이 팬 놈이 그렇게 말해봤자 전혀 설득력이 없다! 너는 좀 더 오만함을 드러내야 한다.
“......”
해골 교장의 충동질에도 이한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했다.
원래 옛날이야기에서도 악마가 저런 속삭임을 할 때 넘어가면 인생이 꼬이는 것이다.
이한이 반응하지 않자 해골 교장은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기는... 어쨌든 가자.
“어딜 말입니까?”
배그렉 교수. 시간 끝났나?
해골 교장의 질문에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을 나눠서 쓰기로 해골 교장과 합의를 봤었고, 정해진 시간을 마침 다 쓴 것이다.
“끝났습니다.”
볼라디 교수는 글자를 치우고 천막의 문을 닫았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이한은 충격 받은 눈빛으로 볼라디 교수를 쳐다보았다.
“?”
불행히도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눈빛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 발 한 번 더 밟을 거 그랬군.’
* * *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아느냐?
해골 교장을 따라가면서 이한은 공손히 대답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아끼시는 어진 교육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징그럽고 소름 돋는 소리하지 마라. 황제가 시켜서다.
‘아.’
이한은 뒤늦게 깨달았다.
교장의 취미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이건 교장의 취미치고는 신입생들한테 너무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이한은 신입생인데도 전혀 즐겁지 않았지만...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합니까?”
이것저것. 일단 마법 폭죽부터 만들자꾸나.
“보통 축제 시작할 때 쓰는 것 아닙니까?”
이한은 해골 교장이 이런 센스가 있었나 싶어서 놀라워하면서도, 약간 늦지 않았나 싶었다.
끝날 때 쓰려는 건가?
학생들한테 쏠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