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어쨌든 감사했습니다?”
터덜터덜 학교 쪽으로 떠나는 데스 나이트의 모습에 이한은 일단 감사인사를 했다.
물론 페르쿤트라는 속지 않았다.
진정 감사해하는 사람은 ‘어쨌든’같은 말로 시작하지 않는데다가 말끝에 의문을 담지도 않는 것이다.
–네 의심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으...
“오해입니다.”
이한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물론 페르쿤트라가 이번에 보여준 모습이 조금 아쉽긴 했다.
어떻게 싸우나, 얼마나 강한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는데 대화와 설득만으로 상대를 돌려보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제까지의 전적과 비교한다면 이번에는 충분히 활약한 셈이었다. 이한은 페르쿤트라의 평가를 조금 올렸다.
당연히 페르쿤트라는 조금 오른 평가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 무례한 어린 놈이... 시간만 조금 더 있었어도...!
페르쿤트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제 곧 역소환 될 시간이라 이한에게 제대로 따질 수가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다음에 다시 소환해라! 다시 소환한다면 오늘 내가 보여준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제대로 설명해 줄...
-하지만 계약에 따라, 그렇게 멋대로 자주 소환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걸 떠나서 페르쿤트라 같은 정령을 소환해서 자기 자랑 듣는 건 시간 낭비였다.
-^$&@!
페르쿤트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남기고 역소환됐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이한이 정령을 불러낸 다음 일을 마치고 인사 뒤 돌려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이고르 님에게 들은 것처럼 정령 친화력이 실로 훌륭하시군요.”
“오해다.”
* * *
놀랍게도 해골 교장은 그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먼저 돌아온 데스 나이트를 보고 미리 실망을 다 끝낸 게 분명했다.
징벌방이나제대로지키고있을것이지눈치없는고대정령놈...
‘눈 마주치지 말자.’
이한은 시선을 피했다.
해골 교장이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해서 심술을 안 부린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다들 잘 돌아왔다.
“교장 선생님! 대체 그 데스 나이트는 뭡니까!”
“......”
이한은 그냥 조용히 정문 통과하면 되는데 굳이 불을 지르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반응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사 놈들은 정말로...!’
이한 때문에 시무룩해질 대로 시무룩해진 해골 교장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 덕분에 살짝 생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무슨 소리지?
“아무리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 데스 나이트를 배치하시다니요!”
앙라고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지적했다.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한은 회의적이었다.
‘반응할수록 상대만 즐겁게 만들어줄 뿐.’
이한이 보기에 해골 교장이 가장 즐거워하는 때가 학생들이 ‘어떻게 이러십니까!’할 때였다.
반응 안 해주면 알아서 시무룩해지게 되어 있었는데...
내 데스 나이트를 내가 배치하는데 너희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냐?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설마 지금 그런 장애물 하나 극복할 자신이 없어서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 마법학교의 학생이 되어서?! 하! 그런 건 발드로가드 학생이나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닙니다!”
‘넘어가지 좀 마라...’
이한이 안타까워하는 사이 즐길 만큼 즐긴 해골 교장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화제를 전환했다.
참. 잊을 뻔했군.
“?”
해골 교장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서 외출권 한 장과 자주색으로 타오르는 화염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출권이 그 자주색으로 타오르는 화염을 통과하자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
“!”
학생들 대부분은 지금 보여준 게 뭔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몇몇은 달랐다.
앙라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들켰다!’
‘들켰군.’
이한도 침통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갈 때 통과해서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해골 교장이 받은 외출권을 다시 검사한 모양이었다.
‘저런 식으로 외출권을 확인하는 건가? 해결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역시 가짜를 쓰려면 해골 교장이 없을 때 써야...’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뭐가요?”
이제까지 이 외출권을 위조해서 나가려고 시도한 놈은 없었으니까. 너희가 최초다! 이건 진심이다. 나는 너희가 자랑스럽구나.
“......”
“...?!”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외출권을 위조했다고?”
“세상에... 어떤 간 큰 놈이?”
“검은 거북이 탑 학생 아닌가? 기술자가 거기밖에 없잖아.”
자랑스러운 제자를 처벌해야 하는 게 마음 아프지만 어쩔 수 없구나. 걸린 게 잘못이지. 다음부터는 걸리지 않도록 잘 하도록 해라.
“크윽...”
앙라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다른 학생들은 깜짝 놀라서 앙라고를 쳐다보았다.
“앙라고가 범인이었다고?!”
“저 자식이 어떻게 그런 위조를 했대?”
아산의 중얼거림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아산을 째려봤다.
해골 교장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앙라고에게 말했다.
공범이 있다면 말해라. 말해준다면 처벌이 줄어들 테니까.
“!”
이한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한이 앙라고 같은 처지였다면 분명히...
“없습니다!”
정말?
해골 교장은 앙라고에게 말을 걸면서 눈빛은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증거는 없다.’
“예!”
이래서 기사 놈들은... 좋다! 징벌방 행이다. 끌고 가라!
언데드들이 앙라고의 양 팔을 붙잡고 끌어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한은 속으로 다짐했다.
‘앙라고. 사식은 잘 넣어주겠다.’
* * *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조금만 자자.”
“좋은 생각이야.”
“어? 시험공부를 해야 해?”
탑으로 돌아온 이한과 친구들은 바로 침대로 가서 곯아떨어졌다.
중간고사고 뭐고 한밤중에 데스 나이트와 난리를 쳤으니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일어났을 때는 벌써 일요일 한낮이었다.
“워다나즈!”
“?”
휴게실로 내려오자 흥분한 푸른 용의 탑 학생 한 명이 외쳤다.
“교장 선생님이 미치신 게 분명해! 너도 빨리 가자!”
“침착해라. 함정이다.”
“으응?”
“아. 미안. 습관적으로.”
해골 교장과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한 번 의심하고 보는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무슨 일이지?”
“저걸 보라고!”
학생은 들어오는 가이난도를 가리켰다.
가이난도는 한손에는 커다란 솜사탕을, 다른 손에는 찰랑거리는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
축제도 끝났고 외출도 끝났는데 대체 어디서 저런 게?
“어디서 난 거지?”
“교장 선생님이 축제도 끝난 기념이라고 연회를 여셨어! 그래도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가봐!”
이한은 믿을 수가 없어서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친구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평소에 닫혀 있던 본관 1층의 대연회장 문이 열려 있고 그 안에는 온갖 먹을 것들과 마실 것들이 아직도 푸짐하게 쌓여 있었다.
몇 층으로 쌓아 올린 생크림 케이크들과 치즈 케이크, 버터 케이크. 아까 가이난도가 갖고 나온 사탕과 쿠키, 초콜렛.
꼭 디저트만 아니더라도 멧돼지를 통째로 잡아서 소스를 발라 구운 요리부터 시작해서 제국의 온갖 진미들이 테이블 위에 가득했다.
잠에서 일어났나보구나. 한 잔 하려무나!
해골 교장은 이한을 발견하고 인심 넉넉하게 잔을 건넸다.
사과를 발효시켜서 만든 사과주가 찰랑거리며 잔을 채웠다.
자! 원래 무쇠대가리들한테 술처럼 값진 건 허락해주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오늘이 왜 특별한 날입니까?”
축제가 끝난 주의 주말이잖니!
“그게 왜 특별한 겁니까?”
그런가? 그러면 그냥 학생들을 배려해주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려무나!
“...교장 선생님. 설마 지금 내일부터 중간고사라고...”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해골 교장은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정말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진짜 이렇게까지?’
평소에는 학생들 맛있는 걸 먹이는 것에 그렇게 인색한 사람이 내일 중간고사라고 이렇게 술까지 대접해주다니...
이쯤 되자 감탄이 나왔다.
대단하다 정말!
이미 늦었다. 많은 학생들이 벌써 먹고 마시고 있지. 네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
이한은 해골 교장의 말에 의아해했다.
‘내가 그걸 왜 막지?’
다른 경쟁자들이 맥주 마시고 사과주 마시고 행복하게 본관 잔디밭에서 드러누워 잠들면 이한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제가 그걸 왜 막습니까?”
시치미 떼지 마라. 이제까지 내 일을 방해하며 못된 기쁨을 즐겼으면서.
“......”
이한은 무슨 소리인지 깨달았다.
해골 교장은 이한이 친구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아직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해한다. 수준이 맞는 상대와의 지적 경쟁은 즐거운 법이지. 나 또한 네 덕분에 조금 더 즐거워졌다는 걸 아예 부정하지는 않겠다.
‘미치겠군.’
이한은 속으로 좌절했다.
해골 교장의 개짓거리를 피하려고 노력한 덕분에 해골 교장이 영감을 얻다니.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이 자리를 빠져나간 다음, 앙라고한테 사식이나 가져다줘야겠다고 이한은 생각했다.
내일은 기초 마법 인성 교육 강의다. 알고 있겠지?
“예.”
학생들에게 전해라.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시험은 본관 4층 딱정벌레 강의실에서 진행될 거라고.
“알겠습...니다?”
갑자기 왜 4층인가 불안했지만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은 지금부터 시작해서 다음 주 금요일까지다.
“그렇게 문제 분량이 많습니까?”
무슨 소리냐? 기껏해야 한 장이다. 언제든 강의실에 가서 문제를 풀어서 제출하면 된다는 거다. 기간을 넉넉하게 잡아준 거지.
“...?”
순간 이한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해골 교장이 저렇게 친절하게 문제를 낼 리가 없지 않은가.
“다음 주 금요일까지 언제든 가서 풀고 제출만 하면 됩니까?”
그래.
“...본관 4층 딱정벌레 강의실까지 가는 길이 쉬운 편입니까?”
약간 어려울 수도 있겠지?
“......”
이한은 자리를 박차고 대연회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해골 교장이 다음 주 금요일까지 시간을 줬다는 건...
‘지금부터 찾아내도 모자랄 수 있다!’
중간고사 기간에 다른 강의 시험도 생각해보면 절대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달려 나가는 이한의 뒤에 해골 교장이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가이난도. 일어나 이 자식아! 시험 보러 가야 해!”
이한은 가이난도의 뺨을 양쪽으로 쳤지만 가이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술에서 깨는 마법을 배웠어야 했나?’
가이난도 뿐만 아니라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지금 너무 행복한 상태라 부름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한은 가차 없이 친구들을 버렸다.
시험 전날에 술을 먹은 이상 사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리석은 녀석들 같으니...’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그렇지 교장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마시다니.
이한은 움직이면서 책을 꺼냈다. 중간고사가 한 강의만 있는 게 아닌만큼 시간이 촉박했다.
‘혈마법 책은 나중에 읽고, 교장이 준 책도 나중에 읽어야겠군. 교장이 준 상자에 있던 마법 거의 다 해독했는데... 이것도 나중에 하고.’
가는 길에 취해서 신나게 노래 부르고 있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보였다.
이한은 잘 됐다 싶었다.
“어이. 친구들한테 알려라!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시험이 열렸다! 4층 딱정벌레 강의실이야!”
“뭔 개소리야? 워다나즈. 우릴 속이려고...”
이한은 지팡이로 흰 호랑이 탑 학생의 명치를 정확하게 때렸다. 상대는 방금까지 마신 술을 그대로 토해냈다.
“커허허허헉!”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한은 물 덩어리를 불러내서 흰 호랑이 탑 학생에게 끼얹었다.
“술이 좀 깼나?”
“깼, 깼어! 깼다고! 깼으니까 그만해 이 자식아!”
“다행이군.”
이한은 진심을 담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잘 기억해라.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시험이 열렸다. 4층 딱정벌레 강의실이야. 알겠지?”
“알, 알겠어.”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두고 떠났다.
물에 흠뻑 젖은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이한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미... 미친 놈...!”
“쉿. 다시 돌아오면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