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새가 가장 빨리 죽는다는 속담처럼, 너무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가 오히려 단명하는 일은 제법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재능이 없는 마법사는 필요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지만 재능 있는 마법사는 그 재능만큼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마법이란 학문은 태양과도 같았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불타죽는 태양.
‘아무도 알려줄 사람이 없나?’
디레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마법학교의 사악한 교수들은 자기 분야에만 관심이 있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신입생이 나타나면 ‘너는 이 마법을 배워야겠구나!’라는 말만 할 줄 알지, 그 신입생이 다른 마법을 배우고 있는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보면 순진무구한 신입생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도망칠 수 없는 마법지옥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가르시아 교수님 같은 괴짜나 그런 걸 버틸 수 있지...!’
더군다나 이제 막 중간고사 기간이 끝났으니 남은 기간 동안 다른 마법 분야들을 더 배울 것 아닌가.
누군가 알려줘야 했다.
바로 지금!
“후배!”
디레트는 각오를 다지고 외쳤다.
“조심해! 너는 지금 교수들한테 속고...”
“???”
이한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팟!
그러나 돌아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
“방, 방금 뭐였지?”
“잘 모르겠지만 불길하긴 하군.”
이한은 텅 빈 복도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익숙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해골 교장의 마력 같은데...’
설마?
* * *
부글부글 끓는 소리와 함께 솥 안의 물약 색이 천천히 납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불을 껐다.
이제 <활력 뼈 재생 포션>의 마지막 과정만 남은 것이다.
‘갓 딴 엉겅퀴꽃만 넣으면 되겠군.’
“난 왜 푸른색이야? 난 왜 푸른색이냐고!”
“이... 이거 납색 같지 않나? 납색 같아 보이지 않아?”
곳곳에서 현실을 부정하는 친구들은 내버려두고, 이한은 요네르와 시선을 교환했다.
엉겅퀴꽃 따러 가자!
“이제 내일만 되면 시험도 끝이군.”
이한의 말에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한 주 동안이었는데도 마치 몇 주는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걸 한 번 더 해야 한다니...
“정말 힘들었어.”
“그래. 나도.”
“......”
요네르는 ‘이한 넌 스스로 무덤을 판 거 아니야?’라는 말을 꾹 참아야 했다.
상대가 가이난도였다면 했겠지만 이한이었으니까.
이미 충분히 힘든 친구였다.
“시험들은 다 잘 봤어?”
“그럭저럭.”
“응?”
이한의 말에 요네르는 의아해했다.
1학년 중에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여럿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이한은 압도적이었다.
보통 A 강의에 뛰어나면 B 강의에 서투르고, B 강의에 뛰어나면 C 강의에 서투른 것 같은 약점을 보여주기 마련인데...
이한은 마치 그런 약점이 없는 것처럼 완벽했다.
그런데 그럭저럭 봤다고?
“흑마법에서 실수했어? 점수가 어떻게 나왔는데?”
“아니. 만점 나왔는데.”
“그러면 소환마법에서?”
“아니.”
“...환상마법?”
“환상마법도 만점인데... 음. 생각해보니 잘 봤군. 미안하다. 요네르. 습관적으로.”
요네르는 처음으로 이한한테 화를 낼 뻔했다.
“무슨 일이지?”
원래 엉겅퀴꽃 밭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학생들이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다가섰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
그 많던 엉겅퀴꽃들이 싹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너희들이 다 뽑아간 건가?”
이한은 최대한 예의바르게 물었다.
물론 태도가 예의바르다고 해서 목소리까지 친절하게 나온 건 아니었다.
목소리에 담긴 살기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움찔해서 뒷걸음질쳤다.
“아니다. 워다나즈. 우리가 왔을 때는 이미 누군가 뽑아간 뒤였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잘 생각해봐라. 워다나즈! 갓 딴 엉겅퀴꽃이 필요하잖나! 그런데 우리가 먼저 따갈 이유가 뭐가 있겠나! 우리도 쓰지 못하게 되는데!”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목검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 때문에, 이미 흰 호랑이 탑 안에서는 ‘워다나즈 놈을 상대할 때는 최소한 네 명이서 같이 다녀라’같은 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상대하게 될 줄이야...!
“일리가 있긴 하군.”
이한은 일단 지팡이를 내렸다. 흰 호랑이 탑 학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깐.’
“비켜봐라.”
엉겅퀴꽃 밭 근처에는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나있었다. 먼저 온 학생들이 새긴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꽃밭 안쪽에 있는 발자국에 주목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발자국이었다.
‘이건...’
이한은 신중하게 발자국의 모양을 확인하고 측정했다.
그걸 본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꽃밭에 먼저 들어온 발자국을 구분하는 건가? 어떻게?”
워다나즈가 무슨 사냥꾼 출신도 아니고 저런 기술을 어떻게 쓸 줄 아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이한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너희 탑에 닐리아가 있지 않나? 왜 안 배웠지?”
“...사, 사냥꾼이 아니라서?”
“??”
이한은 매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시선을 던졌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자기가 잘못한 느낌을 받았다.
‘저 눈빛을 어디서 봤...?’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은 뒤늦게 깨달았다.
저건 교수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볼 때 보여준 눈빛이었다.
‘어째서! 사냥꾼 기술을 내가 왜 배워야...’
“요네르.”
이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요네르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범인이 누군지 알겠는데.”
“누구야? 흰 호랑이 탑 학생?”
“아니. 우레걸음 교수님.”
“......”
* * *
우레걸음 교수는 잘 만들어진 브랜디 한 통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온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이 각자 흩어져 앉아 편안한 얼굴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가는 만큼 교수들의 마음도 풀어지기 마련.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르시아 교수.”
우레걸음 교수는 가르시아 교수를 발견하고 브랜디를 한 잔 따라줬다.
이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트롤 혼혈 교수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받았다.
“별 거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가르시아 교수만큼 고생하는 사람이 또 어딨겠습니까.”
우레걸음 교수는 이 눈앞의 트롤 혼혈 교수를 진심으로 존중했다.
다른 교수들은 자기 분야 마법에 몰두하고, 오수 고나달테스 같은 자는 온갖 사악한 변덕을 부리는 동안,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며 학생들을 신경 써 주는 마법사.
가르시아 교수가 없었다면 에인로가드는 한층 더 지옥 같은 곳이 되었으리라.
“우레걸음 교수님도 거의 다 끝나셨죠?”
“예. 내일이면 학생들이 제출할 겁니다.”
“기간이 긴 만큼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해골 교장이었다면 ‘연금술은 문제 내주고 술 마시며 기다리면 되는 일이니 게으름뱅이의 학문 아닌가’하며 비꼬았을 것이다(사실 우레걸음 교수도 일정 부분은 동의했다).
그러나 착한 가르시아 교수는 언제나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줬다.
“학생들이 재료를 모으고 제작하는 걸 계속해서 신경써주셔야 할 테니까요.”
“맞습니다.”
사실 가르시아 교수가 말한 것처럼 신경써주지는 않았지만 우레걸음 교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칭찬을 굳이 거절해서 무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또 맞는 부분도 있었다.
“안 그래도 어제 꽃밭에 가서 엉겅퀴꽃들을 싹 캐어 와야 했습니다.”
“네? 어째서인가요?”
“학생들을 위해서지요.”
우레걸음 교수는 살짝 신이 나서 설명에 나섰다.
<활력 뼈 재생 포션> 제작 마지막에 필요한 갓 딴 엉겅퀴꽃.
학생들은 이 꽃밭의 위치를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 꽃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촉박한 기간인 만큼 새로 찾거나 구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학생들은 엉겅퀴꽃 없이도 어떻게든 포션을 완성시켜야 하리라.
“엉겅퀴꽃이 없어도 포션은 어떻게든 완성 가능하긴 합니다. 품질은 떨어지겠지만 말입니다. 그걸 학생들의 지혜로 극복하는 거죠.”
“......”
가르시아 교수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걸 칭찬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처음부터 엉겅퀴꽃 없이 만들어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굳이 학생들에게 충격과 혼란을 줘야 하나?
“과... 과연. 정말 좋은 방법 같은데요.”
“고맙습니다. 가르시아 교수. 학생들을 위한 애정이지요.”
우레걸음 교수는 만족스럽게 브랜디를 홀짝였다.
그러나 우레걸음 교수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한 번 교수의 공방을 턴 학생은 두 번도 털 수 있다고.
* * *
“각수관으로 간다.”
하루 종일 시험을 봐서 피곤했지만 이한은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제출인 만큼 시간이 빠듯했다.
우레걸음 교수의 탑, 각수관의 2층에는 분명히 엉겅퀴꽃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을 불러 모으면...”
“그럴 시간 없어. 요네르. 게다가 숫자가 많으면 위험해.”
이한도 이번이 두 번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위험이 올라간 상황이었다.
조용하고 빠르게.
“...그렇지만 닐리아는 부르자.”
“잘 생각했어.”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위험해서 안 불렀다’고 말해봤자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음. 랫포드도 부르자.”
“그래.”
“아산도...”
“...그냥 다 부르는 게 낫지 않아?”
“그래. 그러는 게 낫겠다.”
이한은 포기하고 친구들을 부르기로 결정했다.
30분 후.
이한과 친구들은 서로 어두운 외투 입고 한곳에 모였다. 요네르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다들 이 시간에 도둑질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나?’
다들 너무 자연스럽게...
“가자.”
별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다들 이미 몇 번 손발을 맞춰 본 사이였다.
이한은 앞장서서 움직였다.
저번에도 왔던 만큼 그리 어렵지는 않...
“!”
이한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복면을 쓴 채 서투른 동작으로 각수관 정문을 따려고 시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지?’
이한은 처음에는 연금술을 듣는 다른 학생들이 먼저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찬찬히 훑어보니 연금술을 듣는 학생들이 아니었다.
설마 이한이 엉겅퀴꽃을 확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한밤에 교수의 공방을 습격해서...
‘...그럴 리는 없겠군.’
그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나간 일이었다.
“다른 강의 때문에 온 거 같아.”
요네르가 뒤에서 속삭였다.
“다른 강의?”
“쟤네 <기초 춤과 사교> 듣는 학생들이거든. 그 강의에서, 우레걸음 교수님 탑에 춤 잘 추게 만들어주는 물약이 있다는 소리가 나왔었는데...”
“...!”
이한은 놀랐다.
일단 <기초 춤과 사교> 같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에 놀랐고, 고작 춤 하나 잘 추려고 물약의 도움을 빌리려는 점에서 놀랐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지 그걸 도둑질로?”
“우리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요네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앞의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학생들이 또 나타났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었다.
“저 친구들도 <기초 춤과 사교>를 듣나?”
“아니. 쟤네들은... <기초 음악>에서 봤었는데...”
“......”
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로 다른 세 무리가 서로 다른 목표 때문에 이 한밤중에 공방 앞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도둑질은 그렇다 쳐도 물약 먹고 시험 봐도 되나?”
“나도 궁금해서 교수님께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하시더라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