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어이가 없었지만 이한은 일단 직면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세 무리의 학생들 모두 사이좋게 징벌방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너희들은 뭐야! 우리가 먼저 왔어!
-이런 일에 먼저고 늦게고가 어디 있나!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런 프로답지 못한 놈들.’
도둑질을 하러 왔으면 프로답게 소리를 낮추고 침착하게 행동해야지 서로 감정적으로 다퉈?
“모두 진정해라.”
이한은 말리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으헉!”
“도... 도둑이야!”
이한을 본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자기들은 도둑이 아닌 줄 아나?’
이한은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탑 학생들이 놀란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이한과 친구들의 복장은 정말로 철저하게 도둑다웠던 것이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복면이라고 해봤자 대충 천쪼가리 잘라서 얼굴에 두른 수준이라, 얼핏 보면 모를까 뚫어져라 쳐다보면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쉬웠다.
그에 비해 이한과 친구들은 몇 번 경험으로 배운 지식과 랫포드의 조언, 그리고 밖에서 사온 옷감들로 철저하게 얼굴을 가린 복면과 외투를 착용하고 있었다.
...진짜 밖에서 온 도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진정해라. 우리도 너희들과 같은 목적으로 왔으니까.”
“워... 워다나즈냐?”
‘아니. 어떻게 알았지?’
이한은 나름 목소리를 바꿔서 말했는데 상대가 알아듣자 놀랐다.
“이 정도로 철저하게 도둑질 할 놈은 워다나즈밖에...”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난 워다나즈가 아니다.”
시치미를 뗐지만 다른 탑 학생들은 그리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벌써 반쯤은 확신한 표정이었다. 이한은 괜히 억울해졌다.
“들어봐라. 지금 여기 모인 학생들은 모두 이 각수관 안에 들어가는 게 목적이다. 서로 싸워봤자 주변의 시선만 끌겠지.”
이한의 말에 다른 탑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각수관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서로 다퉈봤자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서로 협력하자.”
“...알겠다.”
“좋다.”
모두 동의했지만,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었다.
세 무리의 동행은 이제 시작이었던 것이다.
“누가 앞장설 거지?”
“...우린 뒤에 서겠다.”
“개소리하지 마! 어디서 혼자 뒤에 서려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바로 충돌했다.
교수의 공방에 들어가는 일인 만큼 가장 뒤에서 들어가는 게 유리했던 것이다.
“조용히 해라. 내가 정하겠다.”
이한이 말했지만 다른 탑 학생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가 뭔데, 워다나즈?”
“왜 우리가 네 명령을 받아들여야 하지? 협력한다고 했지 네 부하가 된다는...”
이한은 지팡이를 들고 겨눴다.
싸늘한 침묵이 학생들 사이를 채웠다.
“내가 정하겠다.”
“...그... 그래.”
“잘 알아둬라. 워다나즈. 네 협박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싸워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수긍한 거다.”
싸움이 멈추자 이한은 말했다.
“우리가 가장 앞에 서겠다.”
“!?”
당연히 다른 탑 학생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괜... 괜찮나?”
“그래. 길을 알고 있는 게 우리밖에 없으니까.”
“......”
다른 탑 학생들은 경악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 자식들 언제...?!
“중간과 뒤는 너희들이 정해라.”
이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이한은 정색하고 지팡이를 겨눴다.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가위바위보, 좋네. 좋지.”
* * *
이한과 친구들이 목표로 하는 곳은 각수관 2층의 온실이었다.
엉겅퀴꽃이 자라고 있는 꽃밭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3층까지 가지 않아도 해결된다는 점이 장점이다.’
각수관 3층은 자격 없는 자에게는 미로나 마찬가지.
2층에서 조용히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이한이 오늘 이렇게 온 것이었다.
“눈이여, 암흑을 꿰뚫어라.”
어둠에 잠겨 있는 각수관 1층 복도가 녹색으로 변하며 그 숨겨진 모습을 이한에게 드러냈다.
“......”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암흑 시야 주문을 외우는 이한에게 ‘너 대체 그 마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배운 거냐’라고 묻지 않았다.
워다나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입학하기 전부터 온갖 사악한 비의란 비의는 다 꿰고 있는 놈이니...!
“잠깐. 그런데 너희들이 찾는 물약은 어디에 있지?”
이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흰 호랑이 탑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의 움직임도 계산을 해둬야 했던 것이다.
“1층... 어딘가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1층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
이한과 랫포드는 동시에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런 안일한 준비로 찾아오다니.
“그래. 정보가 부족했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
‘방금 우릴 되게 한심하게 본 것 같았는데.’
“그러면 1층을 수색해라. 우린 2층으로 올라가겠다.”
“그래. 그렇게 하겠다.”
이한과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에 들어온 학생들과 거리를 벌렸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낯익은 형태의 드넓은 식물원이 일행을 맞이했다.
저번처럼 미친 황소 놈이 날뛰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런지 밤의 식물원은 훨씬 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니까 오히려 불안한데...”
“어허.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이한은 닐리아에게 경고했다.
원래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롭게 끝나는 게 정상이었던 것이다.
“저기 꽃밭이다.”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들어서 엉겅퀴꽃을 조심스럽게 캐내기 시작했다.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우레걸음 교수님 없고, 버드나무 교수님 없고. 별 일 없겠군.’
“다 됐지? 빠져나가자!”
이한과 친구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조용히 기쁨을 삼켰다.
긴장한 것에 비해 완벽에 가깝게 일을 끝낸 것이다.
랫포드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도둑질의 쾌감은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법.
초보 도둑으로 시작해서 점점 성장해나가는 친구들을 보는 랫포드의 마음은 뿌듯함 그 자체였다.
쾅!
“......”
그러나 그런 기쁨은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사라졌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온갖 소란들이 복도 양옆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쳤나?’
“이... 이런 아마추어들이!”
랫포드도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이한은 빠르게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지금 뭐하는 거냐? 다들 정신 차려라!”
이한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듣지 않았다.
마치 술에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해롱거리며 강의실의 의자를 집어던졌다.
와장창!
“뭔가 잘못 마신 거 아니야??”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아무리 다른 탑 학생들이 도둑질의 아마추어라 하더라도 아무거나 함부로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한은 열린 강의실 문 안쪽에서 달짝지근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느꼈다.
평범한 향기가 아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향기였다.
그 순간 이한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모두 숨 멈춰라!”
“!”
생각해보니 춤 잘 추게 되는 물약이나 음악 잘 하게 되는 물약 같은 게 가져가기 좋게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각수관 1층에!
‘우레걸음 교수가 다른 교수와 손을 잡고 함정을 팠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이한의 직감은 가능성이 높다고 신호를 보냈다.
이 마법학교는 충분히 가능한 곳이었다.
설명을 들은 요네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속삭였다.
“하지만... 엉겅퀴꽃은 함정이 없었잖아?”
“...우레걸음 교수님이 잊었을지도...”
이한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한도 그게 제일 의아했다.
왜 다른 강의에 필요한 물약은 함정을 깔아놓고 정작 자기 강의에 필요한 건 함정을 안 깔아놓은 걸까?
설마 정말 가져가라고 해놓은 걸까?
정답은 그렇게 시간이 촉박한데 누가 도둑질로 해결하려고 하겠냐고 방심해서였지만, 이한은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알겠어. 워다나즈. 어쨌든 빠져나가자.”
닐리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게 함정이든 다른 탑 학생들의 실수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여기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저렇게 소란을 피우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 돼. 데리고 나가야 해.”
“어째서, 워다나즈?”
아산은 놀라서 물었다.
그리고는 알겠다는 듯이 손바닥을 쳤다.
“내가 괜한 질문을 했군. 명예...”
“두고 가면 우리들 이름을 불 테니까.”
“...그래도 명예도 조금은 있지?”
이한은 아산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일단 조용히 시켜야겠다.”
“어떻게 하려고?”
요네르는 의아해했다.
아마 학생들은 광란이나 난동의 향기를 맡은 게 분명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신나게 날뛰고 있었으니까.
저런 상황에서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퍽! 퍼퍼퍽! 퍽퍽퍽퍽!
“됐다.”
“......”
“하지만... 어떻게 데리고 나오실 생각이십니까?”
랫포드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프로도둑놈들은 동료여도 함정에 빠지면 가차없이 버리는 게 규칙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데리러 들어갔다가는 이한도 다칠 수 있었던 것이다.
“최대한 해봐야지. 잠시만.”
이한은 밧줄로 몸을 묶었다. 그리고는 숨을 최대한 참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만약 내가 상태가 안 좋아질 것 같으면 스스로 기절할 테니까, 밧줄을 끌어내서 당겨.”
“이한. 여기 저주 마법 해제 물약이야.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네르는 품속에서 물약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한은 감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셨다.
“좋아. 들어간다.”
이한은 숨을 멈추고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알 수 있었다.
강의실 가운데에 설치된 마법진에서 마력이 섞인 연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함정이 맞았군.’
이한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힘을 줘서 마법진을 훼손했다. 다행히 마법진은 쉽게 파괴됐다.
‘연기가 멈췄다!’
이제 환기시키고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그 순간, 벽 쪽에서 마력 반응이 일어났다. 숨어있던 새로운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를 욕했다.
‘이런 미친...!’
확!
푸른 연기가 이한을 감쌌다. 숨을 참아도 온몸으로 파고드는 지독한 연기였다.
이한은 지팡이를 잡았다. 상태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스스로 기절할 생각이었다.
“...?”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아직 남아 있던 원래 연기를 좀 마셨다.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뭔가 안에서 살짝 변화가 있으려다가 바로 끝나버리는 느낌?
“......”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한명씩 끌어냈다.
다행이긴 한데...
...왜 이렇게 허무하지?
“해독 물약이 통한 거구나!”
뒤에서 보고 있던 아산이 눈을 빛냈다.
“도와주러 가야겠다. 메이킨! 부탁해!”
“잠깐, 아직 확실하지 않은...”
아산은 물약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이한이 있는 강의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눈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산.”
이한은 아산을 기절시켰다.
* * *
털썩!
이한과 친구들은 간신히 마지막 학생까지 풀숲 안에 던져놓았다.
서로 땀투성이가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뿌듯했다.
“...다들 고생했어.”
“그래. 정말...”
‘친구들 품 뒤져서 보수 받자고 하면 너무 나쁘게 들릴까?’
“이 자식들 때문에 시간낭비만 했는데 품 뒤져서 보수 받아 가면 안 되나?”
이한의 말에 랫포드는 존경의 시선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