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그러나 이한은 보수를 받지 못했다.
품을 뒤지기도 전에 상대가 깨어난 것이다.
“...헉!”
“대, 대체 무슨 일이?”
“......”
이한과 랫포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탑 학생들을 노려보았다.
깨어날 거면 아까 복도에서 깨어날 것이지 고생해서 업고 나왔더니...
‘이 자식들 자고 있는 척 한 건 아니겠지.’
“고, 고맙다. 워다나즈.”
정신을 차린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은 상황을 파악하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마지막 기억은 강의실 안에 들어갔을 때, 불길한 마법진에서 나오는 연기를 마신 부분에서 끊겨 있었다.
그 뒤의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워다나즈와 친구들이 구해준 게 분명했다.
탁-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은 이한이 내민 손을 붙잡고 악수했다.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품을 뒤지려고 뻗은 손이었던 것이다.
“고맙다. 워다나즈.”
“우릴 구해줄 줄은 몰랐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하나둘씩 깨어났다.
그리고는 똑같이 감사 인사를 했다.
“이렇게 들고 나와 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지.”
일어난 학생들은 예의바르게 감사를 표하고 돌아서서 떠나갔다.
이한은 괜히 얄미워서 그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다시 기절시키시겠습니까?”
랫포드의 속삭임에, 이한은 아주 조금 흔들렸다.
* * *
“거 참 신비한 일이군...”
우레걸음 교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갸우뚱거렸다.
숙취 때문은 아니었다. 원래 술을 많이 마시면 숙취가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 찾아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숙취는 물약으로 몰아내고, 우레걸음 교수는 다시 한 번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아무도 안 잡힌 거지?’
다른 교수들의 부탁에 우레걸음 교수는 여러 물약들을 각수관 1층 강의실에 배치해놓았었다.
학생들을 골려주는, 아니, 성장시키는 일은 다른 교수라 하더라도 협력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설치된 마법진의 효과를 감안했을 때, 학생들이 들어왔다면 분명히 아침까지 강의실 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침입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의자들이 날아다니고 마법진이 훼손된 이상 침입은 확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눈치를 채고 공략한 건가? 아니... 눈치를 챘으면 마법진을 발동시키지 않았을 텐데.’
우레걸음 교수는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금요일 아침이라고 연금술 과제를 제출하려고 찾아온 학생들이 한 명씩 나타났다.
“그래. 좋은 아침이다.”
한 명씩 물약을 앞에 제출하고 돌아갔다.
그 시무룩하고 고뇌 어린 표정에 우레걸음 교수는 흐뭇해졌다.
재료를 다 구하지 못해서 밤새 고민한 얼굴들이 분명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그래. 워다나즈.”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을 보자 문득 의심이 들었다.
‘...아니지.’
눈앞의 워다나즈 가문 출신 소년이 한 짓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이한은 그 강의들을 듣지 않았다.
강의를 듣지 않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우연의 일치였다.
“놓고 가겠습니다.”
“그러도록 해라.”
이한은 얌전히 물약을 제출하고 돌아섰다.
그러고 나서도 우레걸음 교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으음. 정말이지 신비하군.’
우레걸음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들이 제출한 물약들을 확인했다.
재료가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애처롭게 발악한 흔적이 느껴졌다.
‘이건 개망초를 대신 넣었나? 아이디어는 참신하지만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을 텐데. 이 녀석은... 무식하군. 재료 없이 그냥 진행했나. 대담한 건 좋지만 효과가 너무 줄어들었어. 이 물약은 완전히 자포자기로군. 비슷한 색의 다른 물약을 부어버리다니.’
확인하던 우레걸음 교수는 멈칫했다.
놀랍게도 완벽에 가까운 물약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
우레걸음 교수는 화들짝 놀라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그러나 다시 확인해도 물약의 효과는 완벽했다.
어떻게??
‘엉겅퀴꽃을 어떻게 구한 거지? 다른 꽃밭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우레걸음 교수는 혀를 차며 그 운 좋은 학생의 이름을 확인하려고 했다.
-이한 워다나즈
“......”
우레걸음 교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간질간질한 것이 우레걸음 교수의 뇌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잖아??’
둘러보니 엉겅퀴꽃을 구한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레걸음 교수는 설마 싶었다.
설마...
설마?!?
* * *
“끝났다!!!”
금요일 저녁.
푸른 용의 탑 신입생들은 휴게실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었다.
몇몇 학생들은 아껴뒀던 음료수 병의 뚜껑을 따고 거침없이 흩뿌렸다.
잘 봤든 못 봤든 중간고사가 끝난 지금, 모든 학생들이 해방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끝났다! 끝났다고!”
“카드놀이 한 판?”
“교수님들 저주받아라!”
“카드놀이 한 판??”
“워다나즈! 이게 다 뭐야?”
“시험 보느라 다들 고생 많았다.”
이한은 친절한 미소로 친구들을 반겼다.
아껴놨던 사치품들이 차례대로 탁자 위를 채웠다.
차가운 과일 주스가 든 유리병들과 각종 디저트들이 빈 틈 하나 없이 꽉꽉 들어찼다.
바삭바삭한 크림 브륄레와 딸기가 위에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복숭아를 사용해서 만든 차가운 크림소다와 아이스크림. 포도와 크림, 우유를 섞어서 굳힌 푸딩 등 에인로가드에서 평소에 먹을 수 없는 디저트들의 향연.
그 향연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
“워다나즈...!”
“너는... 정말이지...!”
이한이 제국을 구했어도 이 정도로 감동받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좋아하니 양심에 찔리는군.’
사실 이런 식의 사치품 위주로 가는 게 이한도 이윤이 많이 남았다.
안 그래도 이미 충분히 이득을 보고 있는데 여기서 더 뜯어내는 게 찜찜해서 그렇지.
텃밭이나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는 신선한 식재료들에, 밖에서 사온 양념과 향신료를 이용해 넉넉한 식사를 만들면 이득은 저렇게까지 나오지 않았다.
‘...아니. 흔들리면 안 된다.’
이한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특식은 어쩌다 한 번이지, 이런 걸로 식재료 창고를 채우고 식단을 짜면 창고는 순식간에 거덜나고 학생들은 굶주림에 빠져들리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한에게도 좋지 않은 일!
“다들 밀지 말고 줄 서라. 양 충분하니까.”
다른 탑에 비해 먹을 게 넉넉해 질서정연한 푸른 용의 탑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서로 앞에 서기 위해 밀치고 당기고 난리가 났다.
이한은 요네르의 도움을 받아 친구들을 줄 세웠다.
“자. 줄을...”
“내가 먼저야!”
“이 어디서 시험도 못 본 놈이!”
“...줄 서라고.”
“앗. 예.”
“죄, 죄송합니다. 워다나즈 씨.”
물론 사소한 마찰이 있었지만 친구들은 다 이해해줬다.
이한은 황녀의 추종자들이 줄 서서 받아가는 걸 보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한테 가져다주려는 거군.”
“아!”
“...너희 설마 잊고 있었던 거 아니지?”
이한의 질문에 추종자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갖다 오면 다시 줄 테니까 가져다주던가.”
추종자들은 멜론 주스를 든 유리병을 한 번 쳐다보고, 먹음직스럽게 잘린 조각 케이크를 한 번 쳐다보고, 계단 위를 쳐다보았다.
“황녀님은 이런 거 안 좋아하실지도...”
“......”
이한은 경악했다.
충성심이 맛있는 디저트에게 지다니?
“원래 소식하는 분이신데 우리 때문에 억지로 드셨던 걸지도...?”
“맞, 맞아.”
“내가 보기엔 아닌데.”
이한의 말에도 추종자들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디저트가 너무 먹고 싶었던 것이다.
“...그냥 내가 불러오마.”
“역시 워다나즈 님!”
“비꼬는 것처럼 들리니까 그만해.”
이한은 계단을 올라가서 황녀의 개인실 문을 두드렸다.
황녀가 문을 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곧 사라졌다. 이한의 손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
황녀의 눈동자가 저번에 샌드위치 몰래 훔쳐 먹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흔들렸다.
“지금 아래에서 다들 간식 먹고 있으니 내려와서 드시죠.”
황녀는 아주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계단을 내려온 이한의 뒤를 따라 황녀가 내려왔다.
그걸 본 추종자들은 깜짝 놀랐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렇게 시끄러운데...”
“생각에 잠기실 때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올라가 계시는 게...”
황녀는 정색하고 추종자의 손등을 쳤다. 추종자는 당황했다.
“워다나즈. 황녀님이 힘드시면 어떡하지?”
“전혀 힘든 표정이 아닌데.”
“맞아. 너희들의 충성심은 일그러져있다고.”
가이난도가 푸딩을 입에 채우며 투덜거렸다.
저 존경심의 1/100만 보여주지...
“시끄러워. 가이난도. 네가 내 충성심의 뭘 안다고.”
“맞아. 내 충성심은 순수해.”
귀찮아진 이한은 손사래를 쳤다.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하겠지. 저기 잘 서 있잖아.”
“그... 그런가? 괜찮겠지? 그보다 어떻게 설득해서 데리고 나온 거야?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
이한은 친구들이 황녀와 제대로 된 이야기는 나눠봤는지 조금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한도 마찬가지였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했지. 자. 다음.”
“이한. 디저트 다 나눠주면 카드놀이 한 판 할래?”
“너 계속 졌잖아?”
가이난도를 걱정해서 해준 말이었지만, 그게 가이난도의 자존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가이난도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쓰며(물론 부들부들 떨리는 게 티가 났다) 말했다.
“그... 그건 테스트 용도의 덱이었어. 이번에 새로 산 카드들을 넣었으니... 더 강해졌다고...!”
‘비싼 카드들만 넣는다고 덱이 강해지는 건 아닌데.’
가이난도는 전형적으로 소환하는데 마력이 많이 드는 카드만 무작정 꽉꽉 채우는 타입이었다.
그에 비해 이한은 상대 마법사의 생명력을 깎는 저마력 카드 위주로 덱을 구성해서 초반에 게임을 끝내버리는 타입.
당연히 이한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한 번 해줄 테니까...”
쾅!
휴게실의 문이 열리고 데스 나이트가 나타났다.
학생들은 모두 경악했다.
“휴... 휴일인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래도 돼? 진짜 이래도 돼?!”
그러나 학생들의 외침과 달리, 죽음의 기사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온 것이었다.
지금부터 이름 부르는, 낙제한 학생들은 징벌방으로 이동한다.
“......”
“......”
이한은 경악했다.
‘낙제하면 징벌방 간다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교육에 있어서는 마법사 개인이 원하는 대로 배울 수 있게 해줘서 널널하다고 착각하기 쉬웠지만, 듣는 강의까지 나태하게 공부해도 될 정도로 에인로가드가 만만하지는 않았다.
가이난도.
“안 돼! 안 돼!”
황금 같은 주말을 징벌방에서 보내야한다는 사실에 가이난도는 도주를 시도했다.
물론 데스 나이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한! 사식 넣어줘! 사식 넣어줘야 해!!”
몇몇 불운한 학생들이 데스 나이트에게 끌려 나갔다. 밖에는 죄수나 탈법한 감옥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워다나즈.
“?!”
이한보다 다른 학생들이 더 놀랐다.
워다나즈가 어떻게 낙제를?
“뭔가 착각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감안을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당신 같은 언데드도 그렇게 강의를 들으면 하나 정도는 낙제를 할 거라고!”
푸른 용의 탑 수석이다. 따라와라.
“......”
친구들은 왠지 얄미워져서 이한을 노려보았다. 이한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잘못 아니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