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혼잣말을 마치고 난 이한은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름 침착하려고 했는데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보통 저학년들 중간고사는 학교에 별 영향을 주지 않고 끝나지만, 고학년들의 중간고사는... 좀 많이 민폐를 끼치지.
디레트가 팥떡을 먹으며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저학년들은 아직 마법 실력이 낮은 만큼 시험을 보면서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쳐도 그 여파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고학년들은 달랐다.
마법의 규모가 훌쩍 커진 만큼 실수할 경우 그 여파도 학교 전체에 끼칠 정도로 심각해졌다.
-선배가 되어서 후배들한테 이래도 됩니까?
-너도 억울하면 선배 되서 똑같이 해. 그리고 이건 하고 싶어서 하는 일도 아니야. 그냥 여러 명 사고가 겹치다보면 예측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는 거지.
어떨 때는 소환마법들이 중첩된 탓에 용암 정령들이 사는 정령계와 연결이 강해졌고, 그로 인해 학교가 용암투성이가 된 적이 있었다.
또 어떨 때는 마력의 흐름이 뒤엉킨 탓에 마법을 써도 전혀 다른 마법이 나오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물론 화나는 건 알겠는데 후배. 복수는 나중에 생각하고 조심하라고.
-알겠습니다. 가능한 최대한 물자를 비축하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아티팩트들을 구해보겠습니다. 탑의 친구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서 피해가 나오지 않도록...
-그... 그렇게까지 전문적으로 대비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는 않네.
디레트와의 대화를 끝내고 나서 이한은 탑으로 돌아와(가이난도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친구들과 이런저런 준비들을 했다.
검은 거북이 탑의 암시장에 찾아가서 쓸만한 아티팩트들을 찾고, 탑에 보관된 물자들을 정리해서 계산하고, 텃밭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일단 우선적으로 캐내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착잡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주도 힘들겠군.’
* * *
“최악의 일요일인데.”
“이건 빵이 아니라 둔기 아니야?”
아침에 나오는 빵과 밥을 받은 친구들은 황당해했다.
추위 때문인지 벌써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밖에 봤어? 원래 저택에서는 이런 날씨에 눈싸움을 했었는데...”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야. 쌓인 눈을 안 치우면 문 밖으로 못 나가.”
“교수님들은 대체 왜 해결해주시지 않는 거지?”
“그야 학생들이 저지른 일이니까 학생들이 해결하라 이거겠지.”
“워다나즈!”
휴게실에서 처량한 표정으로 검은 둔기, 아니, 검은 빵을 들고 있던 학생들은 반색했다.
이한의 등장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다들 안타깝게 됐지만 이 눈보라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텃밭에서 나오던 식재들도 한동안 구할 수 없을 거고. 한동안은 절약 식단이야.”
“...!”
“걱정 마. 워다나즈. 우리도 에인로가드 학생이야. 배 좀 곯는다고 약한 소리를 하진 않아.”
“맞아, 워다나즈!”
친구들의 과도한 자신감에 이한은 살짝 걱정이 됐다.
‘이 자식들 식탐이 상당히 심하던데.’
다른 탑은 애초에 배가 고프게 살았지만 푸른 용의 탑은 이한 덕분에 상당히 입이 까다로워진 상태였다.
괜찮을까?
“오늘 요리는 콩 통조림이다.”
“...다, 다른 통조림 좀 더 까면 안 되나? 콩만 먹어야 해?”
“안 돼. 절약이야.”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콩 통조림으로 딱딱한 빵을 먹을 생각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한은 그냥 콩 통조림을 까서 그릇에 담아줄 정도로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한은 전날에 텃밭에서 캐온 양파와 마늘, 버섯을 팬에 넣고 콩과 함께 기름으로 볶았다.
그리고 통조림을 하나 더 까서 토마토, 양파, 마늘을 넣은 뒤 넉넉하게 끓여 소금과 후추로 간을 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옆에 앉아 있던 황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살짝 감탄의 감정이 떠올랐다.
아침 식사 시간.
밖에 눈보라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어도 식사는 맛있었다.
“워다나즈.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할 것 같은데.”
“맞아. 네가 지시를 내려줘야 해.”
친구들의 말에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 말이 맞았다.
워낙 상황이 거대한 만큼 힘을 합치지 않으면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탑 앞의 눈부터 치워야 해. 안 치우면 강의도 못 듣겠군.”
“설마, 교수님들도 감안해주시지 않을까?”
“그럴 리가.”
“절대 그럴 리 없지.”
누군가 내뱉은 안일한 소리에 친구들이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지금 외투가 다 봄 외투 아닌가? 나가면 얼어 죽겠군.”
이한의 말에 친구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확실히 봄 날씨 때문에 이런 추운 상황은 생각치도 않았...
“이럴 때를 대비해서 두꺼운 겨울용 천들을 준비해놓긴 했지. 벌써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식사하고 외투부터 만들자.”
“???”
“?????”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그걸 왜 준비해놨어?
“워다나즈. 이런 사태가 올 줄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두꺼운 옷감도 쓸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샀지.”
“역시 워다나즈. 1%의 확률이라도 방심할 수는 없지.”
아산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몇몇 학생들은 여전히 ‘운이 좋긴 한데 원래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하며 아리송해하고 있었다.
“방한용품을 최대한 많이 만들자. 아티팩트들 중에서도 쓸만한 게 있겠지.”
마법학교의 장점은 불완전한 아티팩트들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굴러다닌다는 점이었다.
“이 서리안개가 갇혀 있는 랜턴은 지금 상황에서 좀 애매하겠지?”
“구석에 치워 좀.”
식사를 끝낸 친구들은 두꺼운 옷감을 꺼내고 아티팩트들 중 쓸만한 걸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한은 반지와 팔찌, 목걸이를 하나씩 착용했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염 흡수의 장신구들이 힘을 뿜어냈다.
“문 열고 비켜서.”
“워다나즈. 난 널 믿...”
“아산. 한 대 맞기 전에 비켜서라.”
“알, 알겠어.”
아산은 투덜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믿어준다고 했는데 왜!
‘탑 근처에서 불장난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
휴게실과 연결된 탑의 문을 열자 폭풍 같은 냉기와 산더미처럼 쌓인 눈이 이한을 환영했다.
이걸 내일 뚫고 강의를 갈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 뚫어야 했다.
‘녹인다!’
“타올라라!”
화르륵!
주문과 함께 화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한은 놀랐다.
‘뭐지?’
평소보다 화염을 통제하는 게 압도적으로 쉬웠던 것이다.
평소의 화염 마법은 날뛰는 야생마의 고삐를 잡고 어떻게든 끌고 가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화염 마법은 온순하게 길들여진 명마 같았다.
‘내 실력이 그 사이 천재적으로 늘었을... 리는 없고. 환경 때문이군.’
눈보라 치는 혹한의 상황이 주는 장점도 있었다.
자연에 펼쳐진 마력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만큼, 이런 상황에서 화염 마법의 힘은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한처럼 화염 마법 한 번 쓰려면 사고칠까봐 각종 봉인구를 찰칵찰칵 차고, 그리고서도 걱정되서 조심해야 하는 마법사에게는 솔직히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는 일이었다.
화르르르르륵!
이한은 곳곳에 화염을 띄워서 눈들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워다나즈.”
“썰렁한 농담 하지 마. 이미 충분히 추워.”
“......”
이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못할 말이었나?
“워다나즈. 좀 쉬어야 하지 않아?”
“아직 괜찮아.”
“워다나즈.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괜찮아. 조금만 더 하자.”
“워다나즈...”
“괜찮다니까?”
“아니. 다 녹았다고...”
“아. 그렇군.”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오전 내내 작업한 덕분에 어느 정도 나갈 길이 만들어 진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친구들이 경악의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눈보라 때문인가.’
“나는 우레걸음 교수님 오두막 좀 다녀올게. 텃밭에 남은 걸 챙겨와야겠어.”
“이한! 물약 만들었으니까 가지고 가!”
휴게실 벽난로 안쪽에서 다른 친구들과 같이 물약을 만들던 요네르가 손짓했다.
솥 안에서 추위 내성의 물약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산이 물약병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한 모금 마셨다.
“와. 속이 화끈해지는 거 같은데?”
“달카드. 그건 재료로 쓴 술이야. 추위 내성의 물약은 아직 안 담았어.”
* * *
우레걸음 교수는 오두막 근처의 눈을 마법으로 치워버린 뒤 안에 앉아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폭설이 내리는 덕분에 사방이 고요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나쁘지 않군.’
이런 사고라면 나쁘지 않았다.
웬 그림자 차원의 징그러운 괴물이 날뛰는 것보다는 훨씬 분위기 있지 않은가.
쾅!
“교수님! 남은 음식들을 좀 주십시오!”
우레걸음 교수는 기겁해서 커피를 쏟을 뻔했다.
아니 어떻게?!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 어떻게 뚫고 왔냐?!”
“화염으로 녹이고 왔습니다.”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가능할 리가... 있겠군.”
말하던 우레걸음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제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마력이 마치 무한한 것처럼 샘솟는 놈이었으니...
“그래도 용케 이런 날씨에 화염 마법으로 길을 만들 생각을 했군. 화염 마법이 잘 시전 안 될 텐데.”
“오히려 좋았습니다만.”
“?”
“?”
설명을 듣고 나서야 우레걸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괴물 같은 녀석...!’
물론 이해한다고 해서 안 놀라운 건 아니었다.
얼마나 마력이 솟구치면 이런 날씨에 화염 마법을 쓰는 게 오히려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
심지어 저렇게 제어 아티팩트를 여러 개 차고 있는데도!
“...기다려봐라. 먹을 걸 좀 챙겨주마.”
괴물 같은 재능을 가진 제자라 하더라도, 이 눈보라를 뚫고 여기까지 와서 남은 식재료를 모으는 모습은 스승으로서 조금 짠했다.
우레걸음 교수는 남은 야채들과 달걀들, 훈제하거나 절인 소시지와 햄, 치즈들을 챙겨주었다.
“텃밭은 사용 불가능할까요?”
“양심이 있으면 네가 텃밭 위에 쌓인 눈을 봐라...”
“나무 정령의 지팡이인데도 말입니까?”
“나무 정령이 아니라 나무 정령 조상의 지팡이여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양심 없는 소리를 연달아 하는 제자의 모습에 우레걸음 교수는 황당해했다.
아무리 생명력을 올려주는 지팡이라 하더라도 지금 같은 폭설을 뚫고 자라는 야채가 있으면 그건 야채가 아니라 식물형 몬스터였다.
“너무 앓는 소리만 하지 말고 긍정적인 면모를 봐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교수님? 이미 충분히 추운데 그런 썰렁한 농담을?”
아까 친구들한테 한 소리는 잊어버리고 이한은 정색했다.
우레걸음 교수는 구박하려다가 제자가 검술과 전투에 뛰어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교수는 자비롭게 용서하고서 설명에 나섰다.
“물론 생활은 좀 불편할 거다.”
“매우 불편하겠죠.”
“...그래. 매우 불편할 거다. 하지만 그동안 다루지 못했던 마법들을 연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
“음. 하긴 혈마법 같은 경우도 주변에 피해가 클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는데, 눈이 이렇게 쌓였으면 완충 작용을 할 것 같군요.”
“혈마법이 왜 나오냐?! 냉기 원소와 정령을 말한 거다!”
제자의 미친 소리에 우레걸음 교수는 깜짝 놀랐다.
“아. 하긴 그렇겠습니다.”
“그래. 이렇게 자연의 마력이 한 방향으로 쏠리면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와 거리가 가까워지지. 냉기의 정령들이 정령계에서 나와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다. 냉기 원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괴팍한 기후는 평소에 접할 일이 없는 어려운 원소들을 연습할 기회가 됐다.
냉기가 바로 그랬다.
“너는 물 원소에 상당히 능한 만큼 냉기도 잘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습니까?”
이한은 반색했다.
언제나 날로 먹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 지금 물을 불러와봐라. 아마 내 말이 무슨 소린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자연에 가득한 냉기의 마력은 마법사의 마법에 영향을 끼쳤다.
지금 물을 불러오면 분명...
“샘솟아라!”
얼거나 줄어들지 않고 평소처럼 샘솟는 물 덩어리의 모습에, 우레걸음 교수는 속으로 욕했다.
재능 넘치는 놈들은 이래서 가르칠 때 힘들었다.
“자. 냉기와 물 속성이 어떻게 연관이 있냐면...”
“지금 불러온 물은 안 씁니까?”
“...조용히 들어라.”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