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다리라도 부러뜨려야 하나?”
“다리보다는 팔을 부러뜨리는 게 낫지 않아?”
“가이난도. 그걸 말이라고 해? 진지하게 걱정해.”
“나만 한 게 아니라 메이킨도 했는데?!”
이한이 추위 문제를 해결하고 간신히 기숙사로 돌아왔지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친구가 날이 밝으면 사악한 리치에게 끌려가게 생긴 것이다.
“그... 그래도 교장 선생님과 일대일로 면담하는 거니까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
아직 순진함이 남아있는 학생 몇몇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이게 일반적으로는 맞았다.
이 마법학교 에인로가드의 교장, 오수 고나달테스는 제국의 뛰어나고 비범한 마법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대마법사였다.
만약 마법학교의 상황을 잘 모르는 외부인이라면 ‘뭐? 대마법사 고나달테스와 일대일로 만날 기회가 생겼다고? 그 위대한 분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이어받을 수 있다니, 너는 정말 행운아구나!’같은 반응을 보였으리라.
하지만 신입생들은 이제 슬슬 눈치채고 있었다.
명성 높고 실력 있는 대마법사에게 일대일로 가르침을 받는다는 게 꼭 좋지만은 않다는 걸!
그리고 그 대마법사가 해골 교장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워다나즈가 지금 끌려가서 90% 확률로 고문당하게 생겼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 너희가 그러고도 친구냐?”
“고... 고문이란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아산이 대신 화를 내자 다른 학생들은 주눅 들었다.
황녀의 추종자 중 한 명인 키락 가문의 네블렌은 황녀에게 속삭였다.
“황녀님. 교장 선생님이 물론 괴팍하고 위험한 인물이긴 하지만 이렇게 일대일로 면담하는 건... 워다나즈의 재능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전해주려는 의도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요?”
다행히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블렌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죠? 꼭 나쁜 것만은...”
황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나빴다.
“...나쁜가요?”
“그렇다니까. 키락. 너 자꾸 그러면 네가 대신 가. 워다나즈 대신 네가 희생해.”
“아... 아니... 미안해. 다들. 워다나즈. 내가 교만하게 말했어.”
이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괜찮다는 듯이 손만 흔들었다.
솔직히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둬야지.’
해골 교장과 주말에 외출하게 됐는데 친구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저 각오를 다질 뿐.
“봐봐. 너 때문에 워다나즈가 상처받았잖아!”
“워다나즈가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 * *
토요일 새벽.
이한은 주의를 기울이며 정문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함정은 없었다.
방심하지 않다니.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타라.
해골 교장은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말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고급스럽게 생긴 여행용 마차였다.
이한은 촌스럽게 ‘말이 없어도 되나요?’같은 질문을 하는 대신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고풍스러운 응접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차 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출발.
-예.
밖에서 언데드 소환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학교의 거대한 정문이 열리며 마차를 배웅했다.
“어디로 가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정도야 얼마든지 대답해줄 수 있지. 목적지는 오고닌의 탑이다.
“...?”
이한은 순간 오고닌이 누군가 싶었다.
해골 교장은 그걸 알아차리고 기막혀했다.
환상마법사 오고닌. 축제 때 만났는데 잊어버린 거냐?
“아... 워낙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이한은 그렇게 변명했지만, 사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인상을 깊게 남긴 인물이라면 잘 잊지 않았다.
하지만 오고닌은...
‘몰래 들어온 주제에 1학년한테 들키고 마법 시전도 실패한 안쓰러운 마법사’정도의 인상이었다.
오고닌이 들었다면 수치스러워서 한동안 탑에 칩거할 정도의 인상!
아무리 일이 많아도 잊어버릴 정도면 대단찮게 여긴 걸 텐데... 어쨌든 오고닌이 한 일이 있으니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다.
‘정말 안타깝군.’
이한은 오고닌을 동정했다.
오고닌이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 같지도 않은데, 이렇게 해골 교장이 직접 나서는 지독한 복수를 겪게 되다니.
“오고닌이라는 분이,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복수를 할 정도의 마법사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당연히 이한의 설득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골 교장의 기분은 꽤나 좋아졌다.
바로 그 태도다.
“?”
이한은 의아해했다.
무슨 태도?
‘말렸다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진작 그랬어야지. 그렇게 하는 거다.
해골 교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워다나즈 가문 출신 소년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그 유약함이었다.
하지만 오고닌 정도 되는 마법사를 저렇게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걸 보니, 그 단점도 고쳐질 낌새가 보였다.
마법학교의 교육자로서 실로 기쁜 일이었다.
애초에 환상 마법사란 놈들은 하나같이 다 뒤틀리고 속 좁은 놈들이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쿠 교수 편을 들 필요 없다. 어차피 여기 있지도 않은데.
“쿠 교수님뿐만 아니라 발도르오른 같은 분도 있고...”
발도르오른?
해골 교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상 마법을 가르치는 키르민 쿠 교수 말고도 여러 환상 마법사들이 있지만, 발도르오른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게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렇습니까? 저번에 밖에 나갔을 때 우연히 뵌 분인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은거 마법사인가.
제국의 뛰어난 마법사들이 꼭 적극적으로 사교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었다.
몇몇 마법사들은 자신만이 아는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진리를 탐구하곤 했다.
이런 마법사들은 해골 교장도 그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아쉽군. 그렇게 실력이 좋으면 교수로 초빙해야 하는데. 은거 마법사들은 영 까다롭단 말이지... 아마 힘들겠지?
“예.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별 관심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어쨌든 오고닌 같은 하찮은 놈 이야기는 그만하고... 네 마법 이야기를 해보자. 마법은 잘 배우고 있겠지?
“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한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정말 신입생 중에서 이한만큼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강의 말고는 뭘 공부하고 있지?
“...교장 선생님. 강의만 따라가도 힘듭니다만.”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해골 교장이 너무 자연스럽게 ‘듣는 강의 말고 어떤 걸 공부하고 있냐’라고 물은 것이다.
지금 듣는 강의도 따라가기 벅찬데 신입생한테 대체 뭘 기대하는...
될성부른 놈들은 힘들어도 스스로 마법을 찾아서 공부한다. 언제나 그렇지. 그래서 강의 말고는 따로 공부하지 않고 있나?
“하고 있긴 합니다만...”
해골 교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살짝 억울해졌다.
어쩌다보니 추가로 공부하게 된 거지 이한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우연입니다.”
안 물어봤다. 뭐 공부하고 있는지나 말해봐라.
해골 교장은 이한이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호기심을 보였다.
성격이 유약하다고 불평은 많이 해도, 눈앞의 워다나즈 가문 소년은 해골 교장이 현재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인재였다.
언젠가 비전을 이어받을지도 모르는 제자 후보인 만큼,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교장 선생님께서 주신 책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네 가장 큰 장점은 옥석을 구분할 줄 아는 바로 그 눈이다.
이한은 아부했고 해골 교장은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심심하면 검은 책은 알아서 이한의 꿈에 들어와 강제로 마법을 전수했으니까!
“그리고 혈마법...”
혈마법? 너무 구식 아닌가? 게다가 너한테는 필요도 없는 잔기술이다.
“...과 연계하기 좋은 마법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한의 대답에 해골 교장은 흥미롭다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혈마법은 쓰기도 까다롭고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비주류 기술이었지만, 혈마법과 연계되는 마법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혈마법은 피를 촉매로 사용하여 마력을 증폭시키는 기술.
그런 혈마법과 연계되는 마법들은 특징이 있었다.
막대한 마력량 소모, 비교적 적은 컨트롤 요구 등.
확실히 저 워다나즈 가문 소년에게는 잘 맞으리라.
영리하군.
“감사합니다.”
무슨 책으로 공부하고 있지? 혈마법 책은 쓸만한 게 적을 텐데.
이한은 배낭에서 책을 꺼냈다. <기초 혈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였다.
파라락-
해골 교장은 책을 공중에 띄우고 넘겼다. 눈으로는 낱장을 읽으면서, 해골 교장은 다시 물었다.
혈마법 말고 다른 건 뭘 공부하고 있지?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솔직히 해골 교장의 마법을 공부하고 혈마법까지 공부하고 있는 만큼 이미 넘칠 만큼 충분했다.
문제는 이한이 정말 다른 것도 더 공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책을 꺼내면서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억울하군. 내가 일부러 찾아서 공부하게 된 것도 아닌데.’
<기초 번개 원소 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 책을 본 해골 교장은 그 책도 띄웠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두 책을 읽었다.
새삼스럽지만 용케 배그렉 교수 같은 녀석 밑에서 배우고 있군.
‘정말 새삼스럽군.’
이한은 무심코 끄덕일 뻔한 고개에 힘을 줬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도교수를 욕하더라도 그 밑에서 배우는 제자는 입을 다무는 게 좋았다.
“아닙니다. 언제나 배우는 게 많습니다.”
그야 그 지랄을 견뎌내기야 한다면야 배우는 게 당연히 많겠지. 드래곤의 레어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오면 남는 게 많듯이.
“......”
하여튼 정말로 제자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딴 불합리한 강의를 들을 놈이 있을까 했는데.
이한은 더 이야기했다가는 감정조절을 실패할 것 같았다.
‘화제를 바꿔야겠군.’
“그런데 갑자기 배그렉 교수님은 어째서?”
이거 배그렉 교수가 쓴 책이잖나?
“...!”
이한은 깜짝 놀랐다.
이상할 정도로 상세하게 쓴 두 마도서가 배그렉 교수가 쓴 책이었다고?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니 저렇게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왜 말로는?’
이한은 분노를 표정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몰랐나보군.
“너무... 상세하게 쓰여 있어서...”
원래 말재주 없는 놈들이 깃펜 잡으면 주절거리는 법이지. 어디서 구했나? 배그렉 교수가 직접 줬나?
“번개 마법은 주셨고 혈마법은 제가 주웠습니다.”
이건 학창 시절에 쓴 것 같은데 용케 주웠군. 운이 좋구나.
“제가 주운 게 아니라 제 친구들이 주웠습니다만.”
그렇지만 지금은 네 손에 들어가 있지. 그게 인연인 거다.
‘혈마법 마도서와 인연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배그렉 교수의 가르침이 잘 맞는 모양이지만, 너무 교수 한 명의 가르침에만 의존하지는 마라.
“...저 그렇게까지 잘 맞는 건 아닙니다.”
따로 공부하는 책 세 권 중 두 권이 배그렉 교수 책인데?
이한은 학교에 돌아가자마자 도서관을 뒤져서 쓸만한 마도서 서너 권을 추가하겠다고 다짐했다.
마법사들이 추구하는 진리는 하나라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제각각 다르다고 하지. 제자가 스승에게 너무 영향을 받으면 알을 깨고 나오기 힘든 법이다.
“예.”
무릇 제자란 스승의 등을 찌르고 그 모든 걸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하지.
“예... 예?”
이한은 멈칫했다. 순간 속마음이 들킨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딱히 함정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해골 교장은 고대 출신답게 진심으로 ‘스승의 등을 찌를 정도의 배짱이 있어야 마법사는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한은 해골 교장의 희고 매끈매끈한 두개골을 빤히 쳐다보았다. 해골 교장은 정색하고 말했다.
지금 말고. 나중에 다 배우고 나서 이야기다.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됐다. 어쨌든 괜한 걱정이었나보군.
살짝 걱정했던 해골 교장은 확신했다.
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어떤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던 간에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마법사에게는 실로 중요한 덕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