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어쩔 수 없나.’
이한의 속마음은 꿈에도 눈치 채지 못하고 해골 교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고닌이 협박이나 굴욕을 당한다고 순순히 가르침을 내릴 마법사가 아니었는데 저러는 걸 보면...
이한의 예의바른 행동이 꽤 마음을 움직인 게 분명했다.
더 망신주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저 정도로 양보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라 오고닌 같은 대마법사가 직접 가르쳐주는 것 아닌가.
여기 탑의 마법사들도 쉽게 받기 힘든 귀한 기회였다.
쯧. 오고닌. 이걸로 빚을 갚는다 치지. 잘 가르치도록.
“최선을... 다하겠네.”
해골 교장은 둥둥 떠서 밖으로 나갔다.
다른 마법사가 가르침을 전수하는데 옆에 있는 건 무례한 짓이었다.
“괜찮습니까?”
“음?”
이한의 질문에 오고닌은 살짝 미소지었다.
보아하니 아무 대가도 없이 오고닌 같은 대마법사에게 이렇게 일대일로 가르침을 받아도 되나 싶은 모양이었다.
아직 어린 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괜찮네. 강압이나 협박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그게 아니라, 교장 선생님이 밖에 계신 분들을 괴롭히실까봐...”
“...괜, 괜찮을 걸세. 아마.”
매우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고나달테스의 제자 모습에 오고닌은 살짝 당황했다.
...제자 맞나?
* * *
이한이 알고 있는 환상 마법에 대해 들은 오고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하이트의 환상 마법 시리즈라. 파하이트 그 친구는 제법 괜찮은 환상 마법사지.”
‘약간 무례하시군.’
오고닌과 파하이트의 관계를 모르는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화염 원소를 기반으로 사용하는 환상 마법이라 초심자들이 익히기도 좋고, 응용하기도 쉽단 말이지. 굳이 단점을 꼽자면 추운 곳에서는 효과가 줄어드는 것 정도일까.”
“어... 추운 곳에서 시전했는데 잘 시전됐습니다.”
“음? 아하. 마력이 워낙 많아서 그렇겠군.”
오고닌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한의 시선에는 이미 아주 살짝 의심이 섞여 있었다.
“파하이트의 환상 마법도 좋은 마법이지만, 나는 다른 마법을 가르쳐주겠네. 조금 거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제법 쓸만할 걸세.”
사실 오고닌의 말은 지나치게 겸손한 편이었다.
지금 오고닌이 가르쳐주려는 마법은 오고닌이 직접 만든 비전 마법이었으니까.
다른 환상 마법사들에게는 ‘오고닌의 환상 마법’이라고 불리며 존중받는 비전 마법!
여러 환상 마법사들이 이 마법의 깔끔한 구조와 날카로운 발상, 뛰어난 효과에 감탄하곤 했지만 오고닌은 이 비전 마법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
직접 개발한 다른 환상 마법들은 책으로 펴낸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유는 하나.
워낙 어렵고 까다로운 만큼 직접 전수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수가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년은 배울 자격이 있지.’
단순히 해골 교장한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해서는 아니었다.
빚을 갚기 위해서 자신이 만든 비전 마법을 함부로 넘길 정도로 오고닌은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오고닌은 이한이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르고 상대를 배려하는 소년이라는 걸 이미 알았다.
축제 때 마법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그랬고, 오늘 결투에서 있었던 일이 바로 그랬다.
거기에 해골 교장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정도의 마법 재능이라면...
그런 소년이라면 가르쳐줘도 무방하리라.
“무슨 마법입니까?”
“음. 딱히 이름을 구체적으로 붙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은 오고닌의 비전 환상 마법이라고 부르니, 자네도 그렇게 부르면 될 것 같군.”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한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물론 제국의 마법 체계는 방대했고 이한이 들어보지도 못한 특이한 마법들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들어본 적 없는 마법보다는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지 들어본 적 있는 마법이 신뢰가 가는 게 사실이었다.
...괜찮은 거 맞겠지?
‘후.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군.’
이한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고닌이 완전히 무능한 마법사는 아닌 것 같긴 했다.
이런 탑을 운영하고 있고, 다른 마법사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 이런저런 책도 썼고...
...물론 이한 앞에서 추한 모습을 많이 보이긴 했지만, 원래 사람이 현역을 떠나서 은퇴하면 감각에 녹이 스는 법.
지금은 은퇴하고 시간이 좀 지나서 능력이 쇠퇴했지만, 전성기 때는 대단한 마법사였던 게 분명했다.
은퇴한 적 없는 오고닌은 이한의 속마음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파하이트는 환상 마법뿐만 아니라 화염 원소의 응용에도 뛰어나서, 두 영역을 결합시킨 마법을 여럿 개발했네. 방금 말했듯이 장점이 명확한 마법들이지.”
제국의 마법은 다른 학문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했다.
후대의 마법사들이 선대의 마법을 보고 배워서 갈고 닦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발전의 경향성은 주로 편리함과 효율에 치중되어 있었다.
익히는 데에 100의 노력이 필요한 마법이 있다면 10의 노력이 필요하도록.
시전하는 데에 100의 마력이 필요한 마법이 있다면 10의 마력이 필요하도록.
이런 식으로 발전된 마법들이 나오면 그 마법들은 기존의 비효율적인 마법들을 대체하고 새로운 유행을 불러오곤 했다.
이한이 익힌 파하이트의 환상 마법도 그런 부류의 마법이었다.
화염 원소를 응용해서 만든 마법이라 익히기도 좋고, 응용하기도 쉬웠지만...
“하지만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는 법. 파하이트의 환상 마법은 환상 마법 그 자체에 숙련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네. 다른 원소를 응용해 시전하는 환상 마법들도 그런 면에서는 전부 부적합한 편이지.”
화염이나 냉기, 흙 같은 걸로 환상을 만들면 마법을 익히는 난이도는 내려갈지 몰라도 환상 마법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됐다.
오고닌은 난이도가 어렵더라도 환상 마법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받아 적던 이한은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환상을 소환해야 합니까?”
“오직 순수한 마력으로. 상상하기 난해하고, 통제하기 힘든 길이지만 그 길만이 가장 직접적으로 가는 길이지.”
오고닌은 말과 함께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의자 위에 두 번째 오고닌이 앉아 있었다.
“건드려보게.”
이한은 두 번째 오고닌을 건드렸다.
놀랍게도 오고닌은 일그러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단단한 질량감을 갖고서 버텨냈다.
파하이트의 환상과는 전혀 다른 환상이었다.
“나 자신이라는 개념을 실체화시킨 환상일세.”
“대단하십니다.”
이한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역시 은퇴했어도 실력은 어디 가질 않는 걸까?
“자네도 곧 배울 수 있을 걸세.”
오고닌은 미래의 대마법사를 바라보는 흐뭇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건 몇 서클 마법입니까?”
“...5서클...”
“......”
이한의 어이없다는 눈빛에 오고닌은 자신이 한 실수를 뒤늦게 깨달았다.
탑의 마법사들과 어울려 지내는 바람에 눈앞의 소년이 신입생이라는 걸 잊었던 것이다.
“꼭 이걸 지금 배우란 소리는 아니었네. 이건 언젠가 익힐 마법으로 알고 있도록 하게.”
“아. 예. 그렇군요.”
오고닌은 급히 말을 바꿨다. 그러나 이한의 눈빛은 살짝 차가워져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마법들이 스스로의 분신을 만드는 어려운 것만 있진 않네. 비교적 쉬운 것도 많지.”
“그렇군요. 잠깐. 그런데 왜 그걸 먼저 가르쳐주지 않으신...”
이한의 의문에 오고닌은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자기 자신의 실체를 가진 환영 분신을 만드는 건 정말 고등한 마법이었고, 환상 마법에는 훨씬 더 쉬운 마법들도 많았다.
1서클 마법. <오고닌의 감정 인지>.
주변 생명체들이 뿜어내는 감정을 읽어내는, 환상 마법사에게는 반쯤 필수적인 마법이었다.
상대의 감정에 따라 사용하는 환상 마법들도 달라지는 것이다.
2서클 마법. <오고닌의 차오르는 불안감>, <오고닌의 밀려오는 공포감>, <오고닌의 몰려오는 절망감>.
상대의 감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신 간섭 계열 환상 마법이었다.
이후 더 고등한 정신 간섭 계열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이 마법들로 요령을 익혀둬야 했다.
3서클 마법. <오고닌의 박무(薄霧)>.
마법사 주변에 환영의 안개를 퍼뜨려, 외부의 적이 공격할 때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게 초점을 분산시키는 마법이었다.
마법이 제대로 시전되면 상당히 넓은 범위의 아군을 원거리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데.’
하나씩 설명을 들어가며 연습하던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마법이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같은 서클이라 하더라도 어떤 마법이냐에 따라 난이도는 천차만별이라지만, 오고닌이 가르쳐주는 지금 마법들은 하나같이 다 너무 어려웠다.
이한이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으음. 역시 좀 어렵나?”
오고닌은 이한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제가 부족해서 그런지 만만치 않습니다.”
“자네가 부족해서는 아닐세. 이 마법이 워낙 어려운 마법이거든.”
“아닙니다. 제가 부족해서겠죠.”
“아니. 진짜 어려운 마법일세.”
오고닌은 이한이 오해하는 것 같자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아까 파하이트의 환상 마법이 가진 단점을 지적했던 것처럼, 오고닌은 환상 마법에 다른 요소를 넣는 방법을 선호하지 않았다.
일체의 타협이나 개량을 거부하고 오로지 순수한 환상 마법만!
난이도야 확 올라가겠지만, 길게 본다면 결국 그게 가장 짧은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당연히 오고닌의 비전 마법들은 일체의 타협이나 개량 같은 게 들어가 있지 않은, 외골수적인 환상 마법들이었다.
당장 <오고닌의 감정 인지> 같은 마법도 다른 환상 마법이었다면 상대의 눈동자나 근육의 움직임, 혹은 체온 변화 등의 요소들을 모두 활용했을 터.
그러나 <오고닌의 감정 인지>는 오로지 하나.
집요할 정도로 상대의 영혼만 놓고 판단했다.
난이도가 어려울 수밖에.
“......”
설명을 들은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은퇴하고 시간이 지난 마법사답게 가르침이 좀...
* * *
잘 배웠나?
“가르침이 어려워서 이제 발을 뗀 기분입니다.”
그렇겠지. 오고닌은 원리주의자니까 말이야. 하지만 제국에서도 오고닌처럼 순수한 고전주의 환상 마법을 고수하는 마법사는 많지 않다. 잘 배워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이한은 자신이 오늘 배운 마법들을 깊게 파고들지 의문이었다.
안 그래도 배워야 할 마법이 많은데 저렇게 힘든 마법까지 한다면...
그래도 운이 좋군.
“?”
오고닌이 널 마음에 들어 한 게 분명하다. 매주 시간을 내서 가르침을 주겠다고 한 걸 보니. 주말마다 찾아와라. 오고닌을 연결해주겠다.
“......”
이한의 표정이 굳었다.
주말에 마법을 배우는 게 귀찮더라도 감내해라. 이건 정말 좋은 기회가 맞으니까. 심술부리는 거 아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눈동자로 욕을 해놓고 뭘.
이한이 마차에 타려고 하자, 탑 안에서 환상 마법사들이 달려 나왔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 그 모습에 해골 교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우정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던 것이다.
“오늘 결투는 잊지 못할 걸세. 꼭 자네의 대성을 빌지.”
“언젠가 결투계에 자네의 이름이 들리길 빌겠네. 참. 가문과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입니다.”
“그래.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역시 뛰어난 기사답게 가문도... 음?”
환상 마법사들은 멈칫했다.
으응?
그러는 사이 해골 교장은 마차의 문을 닫았다.
“잠, 잠깐만요. 각하.”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라. 채찍 휘두르기 전에.
“방금 워다나즈 가문이라고... 아악! 고작 이런 일에 채찍을 휘두르시다니요!”
대마법사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