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말은 그렇게 해도 이한은 최대한 조심해서 화염을 통제했다.
잘못해서 도서관에 불이라도 나면 해골 교장 성격에 진지하게 화형을 집행할지도 몰랐다.
쉭!
좁은 통로 곳곳에 응축된 불꽃들이 나타났다.
고작해야 손등을 태울 정도의 작은 크기였지만, 화염 원소의 파괴력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화염 키워봤자 통제하기만 힘들다.’
불꽃들이 어지럽게 통로를 날아다니며 달려오는 망령들을 불태웠다. 한 번 불꽃이 작렬할 때마다 그늘 망령들은 몸부림치며 나뒹굴었다.
실체가 없는 몬스터인데다가 암흑 속성을 갖고 있는 만큼 화염이나 빛에 더욱 더 취약했다.
게다가 이한이 불러 온 화염은 그늘 망령 두셋 불태웠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처럼 끊임없이 마력을 공급받아 타올랐다.
-■■■■! ■■■■!
그늘 망령들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좁은 통로를 돌파하려고 했지만 이한은 계속해서 화염을 움직였다.
아무리 망령들의 물량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좁은 통로에서는 돌파에 한계가 있었다.
하물며 통로를 막은 마법사가 마력에 제한 없이 계속해서 화염을 불러올 수 있는 마법사라면 더더욱!
‘막을 수 있겠...’
콰직!
막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그늘 망령들이 계속해서 들이박았는지, 책이 잔뜩 쌓인 서고 한 칸이 무너지며 들어올 구멍이 생겨버린 것이다.
“막아!”
이한의 지시에 학생들은 황급히 새로 생긴 구멍을 향해 마법을 날렸다.
“화염이여...”
“쏘아져ㄹ...”
매직 미사일이 날아들고 불꽃이 날아들며 마법 특유의 섬광을 만들어냈다.
제법 위력이 있어보였지만 이한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구멍이 생각보다 크다!’
좁은 통로와 달리 서고가 무너져서 생긴 구멍은 너무 넓었다.
황녀가 친구들을 지휘하며 마법을 퍼붓고 있었지만 벌써 그늘 망령들이 하나씩 들어오고 있었다.
이한은 이를 악물고 지팡이를 돌렸다.
“타올라라!”
이한이 지팡이를 돌린 덕분에 새로 생긴 구멍에서 달려드는 그늘 망령들의 기세는 잦아들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완전히 난장판이 됐을 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문제는...
‘온다!’
그 사이 좁은 통로로 오는 그늘 망령들이 거리를 확 좁힌 상태였다.
다시 공격을 하더라도 몇 마리는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미 각오한 바였다. 이한은 전신에 마력을 끌어올리며 빙의를 대비했다.
‘마력이 많을수록 저항력도 강해진다. 그늘 망령들이 빙의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빠르게 떨쳐낼 수 있을...’
이한은 자신의 마력이 가진 저항력을 믿었다.
정신 계열 마법이나 독에 대해 상당히 강한 저항력을 보여주었으니 이런 망령 몬스터의 빙의에도 강한 저항력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았다.
아까 가이난도도 빙의 당했지만 어찌어찌 빠져나온 것처럼 이한도...
퉁!
“?”
“??”
-?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한에게 전력으로 들이박은 그늘 망령이 튕겨나가는 소리였다.
그것도 그냥 튕겨나가는 게 아니라 화염 마법을 맞은 것처럼 타오르면서!
투투투투투투투투투퉁!
그늘 망령은 하나만 달려오지 않았다.
수십 마리가 꾸역꾸역 통로를 뚫고 온 만큼 가속도가 붙어 그대로 들이박았다.
그리고 모조리 다 튕겨나가서 불타올랐다.
“......”
“......”
이한의 뒤에서 돕고 있던 푸른 용의 탑 학생은 기겁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저게 뭔...?
투투퉁! 투투투투투퉁!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빙의 실패로 갈려나가자 그 뒤에 있던 그늘 망령들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속도를 줄이려고 했지만 뒤에 있는 다른 그늘 망령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퉁...
“망... 망령분쇄자! 망령분쇄자!!”
“쓸데없는 별명 붙이지 마라.”
제국 사람에게 저런 업적에 걸맞은 칭호는 명예로운 별명이었지만, 이한은 친구들한테 망령분쇄자 같은 별명을 받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냥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망령들을 쓸어버린 게 다라면 더더욱!
이한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역으로 밀어붙였다. 그늘 망령들이 빙의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좁은 통로에 몰려 있던 그늘 망령들은 말 그대로 싸그리 터져나갔다.
“도와주러 왔다!”
“뭐? 통로는 다 막았어?!”
무너진 서고 구멍을 막고 있던 학생들은 통로 쪽에 있던 이한과 친구들이 돌아오자 놀랐다.
“이야기하자면 길어!”
“워다나즈! 가자!”
“?????”
학생들은 이한과 친구들이 마법을 쓰는 대신 그늘 망령들이 꾸역꾸역 몰려있는 구멍 쪽으로 냅다 달려가자 깜짝 놀랐다.
“지금 뭐하는...”
투투투투투투투투퉁!
“...세, 세상에.”
“뭐 저런...?”
“저걸 보고 내가 칭호를 만들었어! 망령분쇄자야! 괜찮지?”
“망령분쇄자... 오...”
아산은 그거 좀 괜찮은 별명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별명이라면 지금 저기서 명예롭게 싸우고 있는 워다나즈와 잘 어울리는 것 같은...
‘앞으로 워다나즈를 소개할 일이 생기면 붙여줘야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마법 지원이나 해!”
이한의 호통에 고개를 끄덕이며 칭호에 공감하고 있던 황녀는 화들짝 놀랐다.
사실 황녀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근데 이한한테 물어봤어? 이한이 좋대?”
“당연히 좋아하겠지. 명예를 아는 친구들이 자기 업적을 칭송해주기 위해 붙여준 칭호잖아.”
“망령분쇄자 별로인 것 같은데...”
가이난도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요네르가 살짝 감탄했다.
가이난도에게 저런 눈치가?
“난 ‘위대하고 존엄하며 고귀한 혈통을 이은, 망령들의 대적이자...’정도로 긴 게 나은 거 같아.”
“오. 제법 괜찮은데?”
“......”
요네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쌓여라, 흙이여!”
“바위처럼 단단해져라!”
살코는 패거리에 속한 학생들과 함께 전면에서 바리케이드를 쳤다.
흙과 돌이 섞인 바리케이드 밖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령들이 어지간히도 몰린 모양이었다.
“옆으로 하나 들어온다!”
쉭!
닐리아는 옆으로 들어오려는 그늘 망령을 화살로 꿰어버렸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런 정확한 사격은 찬사 받을 묘기였지만, 닐리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다른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숫자가... 안 줄어드는 거 같지?”
“큰일이군.”
이한이야 변수만 없으면 다 잡을 자신이 있었기에 통로에 진을 쳤지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다.
대신 통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올려서 버티기에 들어갔다.
그늘 망령의 숫자가 일정 이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면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불행히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천장의 불빛은 밝아지지 않는데 그늘 망령들의 숫자만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곳도 난리 났을 것 같은데...”
닐리아는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그늘 망령에 빙의당해서 이쪽으로 오기라도 한다면?
‘...워다나즈가 빙의당하면 진짜 무서울 거 같은데...’
“워다나즈다!”
“안, 안 돼!”
“??”
옆에 있던 랫포드가 희한하다는 듯이 닐리아를 쳐다보았다.
“뭐가 안 되는 겁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닐리아는 황급히 바리케이드 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이한은 그늘 망령한테 빙의된 상태가 아니었다. 매우 멀쩡한 표정이었다.
“다행... ???”
“??????”
투투투투투투투투투퉁!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한을 무슨 공성추마냥 앞세우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많던 그늘 망령들이 이한과 부딪칠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터져나갔다.
“......”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몇 번 슥슥 돌면서 그늘 망령들을 치워버린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품위 있게 외쳤다.
“감사 인사는 받은 걸로 치지.”
사실 다른 탑 학생들이 빙의당해서 난리치는 걸 막기 위해서 왔지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그걸 감안해도 스스로가 매우 명예롭다고 생각했다.
일단 도와주러 온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저 자식들 왜 아무 말이 없지?”
“그러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대답을 기다리며 머뭇거리다가 아무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툴툴대며 떠났다.
감사 인사도 할 줄 모르나!
그러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은혜를 몰라서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떠나고 나서야 학생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방...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 *
불사조 탑 사제들도 반응은 비슷했다.
다만 들어가는 통로가 활활 타고 있었을 뿐.
이한은 하급 화염 저항 마법을 시전한 다음 그늘 망령을 쓸어버렸다.
아프하 교단의 니기소르 사제가 반가워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소.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불사조의 탑 학생들은 사실 가장 상황이 좋았다.
푸른 용의 탑처럼 벽이 무너져서 새 침입로가 생긴 것도, 검은 거북이 탑처럼 그늘 망령들이 쌓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보아하니 니기소르 사제가 펼친 화염 마법이 상당히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통로 전체에 광역 화염 마법을 쓴 건가? 어떻게 서고를 태우지 않았지?”
이한은 아프하 교단의 비전인가 싶었다.
화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교단인 만큼, 이 주변에 광역 마법을 시전하고도 통로를 태우지 않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런 거라면 꼭 배우고 싶다.’
니기소르 사제는 이한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질렀소만?”
“...아. 그, 그렇군.”
이한은 살짝 뒷걸음질쳤다.
진짜 광기가 바로 저런 게 아닌가 싶었다.
도서관에서 뒷일 생각하지 않고 광역기를...!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놈들 구하러 가자.”
‘귀찮군.’
다른 놈들이 당하면 귀찮아지는 만큼 나서기는 했지만, 몇 번을 돌자 슬슬 피곤했다.
니기소르 사제가 감탄하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소.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괜찮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
“...아니. 명예로운 일에 다른 사람 손을 빌릴 수는 없지.”
이한은 순간 유혹을 느꼈지만 참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도 불바다가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 * *
어딘가 꼬질꼬질하고 피곤한 표정으로 도서관에서 걸어 나오는 학생들을 보며 해골 교장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열심히들 공부했나보군.
학생들은 무시했다.
해골 교장을 기쁘게 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꾸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무시에 심술이 난 해골 교장은 이한을 발견하고 둥둥 날아갔다.
던전 공략에서 보여준 뛰어난 실력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과, 던전 공략을 재미없게 만든 걸 혼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드는 참 특이한 제자였다.
열심히 공부했나?
“예. 덕분에.”
너는 참...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호승심이 강한 놈이다. 록 드레이크를 잡아버리고 말이야. 다른 교수들도 놀라더군.
“...예?”
이한은 멈칫했다.
‘잡았다’는 오해와 별개로 해골 교장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한을 놀라게 만들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놀라운 건 아니었다.
학교 곳곳에 해골 교장의 눈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해골 교장 성격에 그 재밌는 구경을 하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다른... 교수님들이요?”
그래. 그런데 이번 원정에서 솔직히 귀찮지 않더냐? 다음에는 혼자 들어가서 싸워보는 게 어떠냐?
은근슬쩍 개소리를 지껄이는 해골 교장은 무시하고, 이한은 차오르는 공포를 참으며 물었다.
“혹시 어느 교수님들이 계셨습니까?”
글쎄. 하도 여럿이 왔다갔다해서... 또 내가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는 성격이 아니잖느냐.
“배그렉 교수님도 계셨습니까?”
배그렉은 있었지. 그 자는 내 흥을 깨는 재주가 있어서 기억하지.
이한의 얼굴이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