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마침내 찾아온 주말.
원래라면 지독한 강의 끝에 찾아온 휴식인 만큼 서로 버텨낸 걸 축하해도 모자랐지만...
...이번 주말에는 그런 게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기말 전 과제들.
아무리 배짱 넘치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이 과제들을 모두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방학 동안에도 징벌방 안에 갇혀 있는 수가 생겼다.
흰 호랑이 탑 학생, 앙라고 알파는 하품을 했다.
아침 햇살이 유난히 따가운 기분이었다.
“앙라고.”
“왜 부르지?”
“피곤하긴 한데, 조금 뿌듯하지 않나?”
“사실 조금 그렇긴 해.”
앙라고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자고 있는 동안, 앙라고는 친구와 함께 버두스 교수의 성각관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토요일 아침부터 과제를 위해 이렇게 움직이다니.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학생이 또 어딨겠는가.
앙라고는 스스로에게 취할 수밖에 없었다.
“불사조의 탑도, 푸른 용의 탑도 우리처럼 일찍 나오진 않았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덜컥-
앙라고는 말과 함께 성각관의 문을 열었다.
버두스 교수가 학생들을 위해 열어준 성각관 1층의 강의실은 인기척 하나 없이 어두웠다.
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별 생각 없이 천장에 달린 발광 아티팩트의 끈을 당기려고 했...
“켜지 마라.”
“으아아아악!!!”
앙라고는 고함을 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강의실에서 사람 목소리가 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가 귀신이나 유령을 두려워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침입자!!’
머릿속에 저번 주에 학교를 뒤집어놓은 침입자가 떠오르자, 앙라고는 재빨리 목검을 뽑아들고 휘둘렀다.
“다가오지 마라! 다가오면 베겠다!”
“시끄럽고. 조용히 해라.”
“...워다나즈?”
“그래.”
이한은 피곤한 얼굴로 강의실 허공에 불빛을 불러왔다.
원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오늘은 유독 피곤해보였다.
“언제부터 나와 있던 거냐?”
“어제 오후부터.”
“......”
“......”
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헛기침을 했다.
갑자기 아침 일찍 좀 나왔다고 자랑스러워한 자기들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불은 왜 끄고 있었던 거냐?”
“마법진 작업 중인데 밝으면 잘 안 보이더군.”
이한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여러 교수들이 ‘부유하는 강철 방패 언제 되나?’ ‘방패 언제 보여줄 생각이지?’ ‘방패 궁금한데’ 이렇게 쪼아댄 만큼, 이한은 다른 수많은 할 일들을 미뤄두고 집중하고 있었다.
평일 강의 끝나자마자 잠도 안 자고 몰두하고 있었으니...
덕분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마법진까지 쓰면 어떻게든 되긴 하겠는데.’
부유하는 방패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부분.
그건 방패에게 ‘주인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아다니다가 위험이 찾아오면 알아서 막아라’라고 명령을 내리는 부분이었다.
이 복잡한 명령을 마법사는 지팡이 동작과 주문만으로 시전해야 하니, 처음 하는 마법사로서는 뇌가 꼬이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한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마법의 난이도 설정이 잘못된 것이었지만...
이한은 포기하지 않고 접근했다.
-난이도 높은 마법을 쪼개서 시전했던 것처럼, 부유 방패도 쪼개서 접근한다.
쪼개서 접근하기.
이한은 이미 몇 번 전적이 있었다.
일명 <유미디후스의 수옥탄>이라고 불리는, 맹렬하게 회전하는 물의 탄환을 쏘아내는 마법.
이한이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현재 실력으로는 한 번에 시전할 수 없었지만...
놀랍게도 이한은 시전에 성공했다.
물 구슬을 띄워놓고 될 때까지 회전을 먹인 것이다.
막대한 마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
마력이 남아도는 만큼 이한은 이런 식으로 단계를 쪼개서 접근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었다.
몇 번 연습하면 마력 고갈로 쓰러질 다른 마법사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
물론 이번 마법의 난이도는 쪼개서 접근해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한은 마법진까지 동원했다.
마법사의 시전 과정 중 일부를 대체해주는 만큼 마법진은 이런 고난이도 마법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문제는...
“이거 혹시 완성된 건가?”
“대충 구색은 갖췄지.”
“...어, 마법진을 이렇게 빨리 완성할 수 있는 거였나??”
저번에 축제 때 경험했던 것처럼 마법진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려워지고 복잡해질수록 온갖 오차와 변수가 나왔다.
그리고 이걸 확인하려면 마법사가 직접 꾸준히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밤을 샜잖나.”
“......”
“......”
그게 밤을 샌다고 되는 일인가?
흰 호랑이 탑 학생 둘은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강하게 반박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이한은 학년 수석이었고 그들은 그냥...
...학생이었으니까.
이한이 ‘마법학교 학생이라면 하룻밤 새면 부유 방패 마법진 정도는 완성해야지’라고 하면 그들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데...’
‘나이튼 교수님이 계셨다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앙라고는 일단 그렇다치고 넘어갔다.
“잠깐. 그러면 부유 방패가 완성된 건가!?”
“아니. 지금 시전하면 몇 초 후에 떨어질 거다. 마법 지속 시간 증폭 작업이 안 끝났어.”
이한의 주문과 방패에 새긴, 주문을 도와주는 보조 마법진들의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든 방패를 띄워서 돌아다니게 만들 수는 있었다.
문제는 지속 시간이었다.
이런 강력한 주문은 낮은 서클 마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아무 대책 없이 그냥 시전하면 몇 초도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 시간 증폭 작업이 필수인데...
이한은 찌푸린 미간을 손으로 주물렀다. 말을 듣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솔직히 더럽게 복잡한데 여기에 지속 시간 증폭까지 가능할지 걱정이군.’
완성하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 방패에 새겨진 마법진들은 아슬아슬했다.
이한도 ‘용케 이게 완성이 됐구나’싶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마법진들!
이제 여기에 지속 시간 증폭 마법진까지 끼워 넣었을 때 고장 나지 않을 확률은?
‘...99% 고장 날 것 같은데. 새로 짜야 하나.’
아무리 터프한 이한이라지만 이걸 다시 새로 짤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법진 말고 직접 거는 방식으로는... 더 힘들 테고.’
“그래도 한 번 구경해보면 안 되냐?”
“구경을?”
앙라고는 이한이 노려보는 것 같자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 꼭 보여달란 건 아닌데, 화났냐? 화난 거 아니지?”
“화 안 났는데.”
이한은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부유하는 방패는 예전부터 갖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냥 어떻게 굴러가나 보고 싶었는데...”
“알겠다. 알겠어.”
“...화난 거 아니지?”
“안 났다니까.”
이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 한 번 쓸 때마다 남은 마력량 계산해야 하는 마법사들과 달리, 이한은 마법 한 번 더 쓴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마법진 완성한 김에 잘 굴러가나 확인도 해봐야 했고...
“재수 없으면 1초 만에 가라앉을 수도 있으니까 잘 봐둬라.”
“그, 그래!”
“준비됐다,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누가 봐도 두근두근하는 표정이었다.
‘이 자식들은 왜 이렇게 방패를 좋아하지?’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닌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무구에 보내는 비이성적인 집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검과 방패, 갑옷 같은 무구들은 기사에게 신체의 일부분이자 자긍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세상에. 저 기사 봤나? 아직도 아에론 길드에서 만든 검을 쓰고 있어!
-그 대충 만들어서 무식하게 갖다 파는 싸구려 검을 쓰다니. 쯧쯧. 기사로서 체면이 있지.
자존심 때문에라도 더 귀하고, 더 비싼 무구를 추구하는 게 바로 기사들이었다.
“일어나 주인을 지켜라, 방패여!”
이한은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책상 위에 널브러져있던 강철 방패가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이한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앙라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진짜 떠올랐어!!”
“워다나즈! 워다나즈! 공격해 봐도 되냐!? 그게 꼭 널 공격하겠다는 게 아니라 방패 성능이 궁금해서...”
“빨리 해라.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흰 호랑이 탑 학생은 허겁지겁 종이뭉치를 던졌다.
그러자 방패가 빙글 돌더니 종이뭉치를 막아냈다.
“내가! 내가 해볼래! 난 뒤쪽에서 던질게!”
“그래! 던져!”
‘이 자식들 뭔 술먹고 왔나?’
밤을 새서 피곤한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신난 기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신이 났어?
툭!
“막... 막아냈어!! 사각에서 던졌는데도!!”
이한은 ‘니 공격이 너무 서툴러서 다 느껴졌다 사각은 무슨’이라고 말하려다가 피곤해서 말았다.
어쨌든 방패는 일단 반쯤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제 지속 시간만 늘리면...
“다음 간다!”
“좋아, 이번엔 의자다!”
“목검 던진다!”
깡! 쿵! 쾅!
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신이 나서 계속해서 집어던졌다.
사실, 방패를 떠나서 이한에게 무언가를 집어던진다는 것 자체에 신이 난 걸지도 몰랐다.
“...뭐, 뭐하십니까 다들?”
“너희 뭐해?”
뒤늦게 들어온 학생들은 강의실 안의 기괴한 모습에 경악했다.
이한을 두고 잡동사니를 던지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라니.
상대가 이한이 아니었다면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사람 괴롭힌다!’라고 반응했을 것이다.
“워다나즈가 부유 방패를 만들어서 테스트를 도와주고 있어!”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은데.”
“하나만! 딱 하나만 더 던져볼게!”
“그래라...”
귀찮아서 다시 의자에 앉은 이한은 멈칫했다.
‘잠깐. 지금 한 시간 넘게 지나지 않았나?’
어라?
* * *
“모라디.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떻게 보면 이건 우리에게 행운이다. 다른 조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이잖나.”
더르규는 지젤의 기분을 풀기 위해 말을 걸었다.
황금 같은 주말에 산을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몇몇 특이한, 예를 들자면 그림자 순찰대 출신 학생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산맥에 들어가려고 모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지젤도 더르규도 잉걸델 교수의 기말고사가 만만찮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 몇몇은 쓸만한 사냥감을 미리 찾아놓으려고 다른 기말 전 과제를 던져놓고 산맥에 들어가고 있었다.
다른 강의는 낙제를 받더라도 검술 강의에서는 성적을 내겠다는 결연한 각오였다.
물론 지젤 입장에서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미친놈들아, 탑 평균 성적 좀 그만 깎아먹어! 그러니까 무시를 받지!’
“모라디. 해야 할 과제량을 생각하면 주말이라도 시간 낭비는 안 된다는 거 알잖나. 서로 싸우지 말고 잘 해보자.”
“나도 알고 있으니까 이제 좀 그만 조잘거려. 부여 마법 과제는 얼마나 했는데?”
“꽤 진도가 많이 나갔지. 이한이 도와준 덕분에. 괜찮다면 같이 하지 않겠나?”
“......”
지젤은 고민에 잠겼다.
워다나즈와 엮여서 좋을 게 없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워다나즈의 마법 능력은 탐이 나긴 했다.
탑 내에서 다른 친구들의 지적인 조언을 기대할 수 없는 만큼 더더욱!
“워다나즈는 절대 순순히 응하지 않을 걸.”
“으음. 확실히 이한이... 아무 대가 없이 전폭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더르규도 양심이 있어서 이한이 그냥 도와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한도 아직 부여 마법 과제를 끝내지 못한 상태다. 같이 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정도라면 대답해줄 거야. 기말고사까지 서로 싸워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둘이 먼저 와있었군.”
“이한!”
마침 이한이 도착하자 더르규는 반가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이한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방패를 보고 경악했다.
“아... 아니... 말이 안 되는데?? 말이 안 되는데...!”
“뭘 말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