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사실 지젤도 황무지 별잡이보다는 그림자 순찰대 소속 순찰자에게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황무지 별잡이는 겉멋이 너무 심해.’
실력은 있었지만 너무 지나치게 포장된 느낌이라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정말... 나한테... 배울 생각인가?”
바이샤다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약간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는데... 쿨럭. 잠시만.”
바이샤다는 물통의 뚜껑을 열고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긴장 완화의 물약을 마셨다. 대형 몬스터를 사냥할 때도 안 마시던 물약이었다.
“솔직히 다 저기로 갈 줄 알았거든.”
“황무지 별잡이보다는 그림자 순찰대가 낫죠.”
이한의 말에 바이샤다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크게 감동을 받은 듯이 눈꺼풀이 떨렸다.
“그게 정말이야? 에인로가드 학생이 이렇게 생각해줄 줄은 몰랐는데...”
사실 닐리아와의 우정 때문이었지만 이한 일행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눈앞의 사냥꾼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워낙 짠해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지젤마저도 가만히 있었다.
“좋다! 내가 반드시 너희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더 대단한 사냥감을 찾아서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이샤다는 의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에인로가드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북부 산맥으로 돌아가면 다른 순찰대원들에게 꼭 전해줄 생각이었다.
동료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어... 잠시만요.”
“?”
“사실 저희가... 이미 기말고사 과제 준비를 끝냈습니다.”
“???”
“???”
바이샤다는 깜짝 놀랐다.
더르규도 깜짝 놀랐다.
“언제?!”
“너희 친구 아니었나?”
바이샤다는 당황스러워했다. 셋이 친해보였던 것이다.
“저번에 도마뱀한테 쫓겼을 때. 거인 만나서 머리털을 좀 잘라왔거든.”
“이한. 내가 네 친구긴 하지만 방금 말은 우정으로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난해한 말이다...”
더르규는 두통이 올라오는 표정으로 말했다.
거인의 머리털을 무슨 길가다가 돌멩이 주웠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게 더르규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이야기하면 조금 긴데.”
이한은 대충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거인과의 만남->체스를 못 둠->내기 승리->전리품과 함께 탈출.
“거인이 체스를 그렇게 못 뒀나?”
“못 두던데.”
“......”
지젤은 뭐라고 하려다가 참았다. 말해봤자 스스로의 체면만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미안하다. 더르규. 원래 말해줬어야 하는데, 옆에 있던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실망하거나 질투할까봐 시기를 놓쳤군.”
“아니다. 이해할 수 있다. 정말 다행이었군.”
“잠깐. 마법사들.”
바이샤다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그러니까 거인 상대로 내기 이긴 건... 그렇다 치고. 다른 것들도 좀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다 그렇다 치고. 그래서 지금 전리품이 있는 건가?”
“예.”
“그러면 난 뭘 하면 되는 거지?”
“...어... 같이 사냥이나 하시겠습니까? 고기가 좀 필요한데.”
“......”
* * *
바이샤다는 살짝 시무룩해졌지만 곧 기운을 차렸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그림자 순찰대를 황무지 별잡이보다 더 높게 쳐줬는데 그게 뭔 대수인가 싶었던 것이다.
“맞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결과 아니겠습니까? 다른 학생들은 저희가 바이샤다 씨 덕분에 거인을 쓰러뜨렸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건 좋은데... 그래도 되나?”
바이샤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여기 있는 어린 마법사들한테 그림자 순찰대가 황무지 별잡이보다 더 뛰어나단 걸 알리고 싶긴 했다.
하지만 저건 속임수 같은데...
“그러셔도 됩니다. 결과가 좋다면 다 괜찮다는 게 마법학교에서 배운 가르침입니다.”
“그래? 놀라운데?”
“??”
“???”
시간 여유가 있어진 바이샤다는 셋을 데리고 적당한 사냥감을 찾으며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이런 비탈길을 걸을 때 어떻게 걸어야하는지 알아?”
“서두르지 말고 발바닥 전체로 땅을 밟으려고 노력하고, 호흡과 걸음을 일체화해서 피로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맞았어! 대단한데?!”
바이샤다는 정말로 놀랐다.
보아하니 대귀족 가문 출신 같은데, 그렇다면 산을 타면서 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능숙할 줄이야.
상대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다른 그림자 순찰대 소속에게 배운 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음. 점점 말하기 힘들어지는군.’
사실 그림자 순찰대 출신에게 배웠다고 말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상대방이 하나하나 가르쳐주면서 매우 신이 났는데 거기다가 대고 ‘이미 다 배운 적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용기가 필요했다.
“자. 한 번 걸어 올라가봐.”
“이렇게가 맞습니까?”
“맞았어! 잘하고 있어!”
“......”
닐리아를 아는 더르규는 황당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못 본 척 무시했다.
* * *
바이샤다는 쏘아서 떨군 새 몇 마리를 꼬챙이에 꿰었다. 깃털과 내장을 빼낸 뒤 노릇노릇하게 구운 새고기는 사냥꾼들에게 별미였다.
“불사조 축제 기간이라서 그런가? 불이 좀 세네.”
바이샤다는 타탁거리며 거세게 타오르는 불의 세기를 조절했다.
안 그래도 볼라디 교수한테 경고를 들은 이한이었다. 바이샤다의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정말 화염의 기운이 강해지고 있나보군.’
“그러고 보니 마법학교에 불사조가 소환된 적 있나?”
“불사조 말입니까??”
세 학생은 질문에 당황했다.
불사조라니.
환수 중에서도 상당히 희귀한 환수 아닌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몬스터였다.
“본 적 없는데, 불사조는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아.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아주 가끔 축제 때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나타난다면 마법학교에 나타나지 않을까 했지. 환수니까 마력이 많은 곳을 좋아할 거 아니야.”
“하하하. 그런 식이라면 마법학교는 벌써 수많은 몬스터들의 소굴이 되었을 겁니다. 바이샤다 씨.”
더르규는 웃으며 말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반쯤 몬스터들의 소굴인 것 같은데.’
환수들이 마력이 많은 곳을 좋아해서 나타난다는 건 상당히 불길한 정보였다.
이한은 떨떠름함을 달래기 위해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바이샤다에게 말했다.
“활을 잘 쏘시던데요.”
“고마워. 한 번 쏴보겠어?”
“활은 조금 자신이 없습니다만.”
어지간한 건 다 배우겠다고 나서는 이한이었지만 궁술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표적에 쏘아 보내는 것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건 노기사 알라르롱이 기초를 가르쳐 줄 때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움직이는 작은 표적을 맞추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 걸 맞추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
“하긴 활은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게다가 마법사는 활을 꼭 익혀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래. 화살에 마법을 걸어서 쏴보는 건 어때? 마법 중에는 이럴 때 쓰는 마법들도 있잖아?”
바이샤다가 이런 말을 꺼낸 건 전적으로 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경험 많은 마법사라면 방금 말이 상당히 어이없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궁수의 노련함과 실력으로 활을 쏘는 대신, 각종 부여 마법으로 보조해서 활을 쏘는 것.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사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짓이었다.
화살 하나 쏠 때마다 화살에 여러 마법을 걸어서 쏜다니.
아무리 간단한 부여 마법이라 하더라도 마력 소모가 보통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화살처럼 부피가 작은 물건에 부여 마법을 몇 겹 겹쳐서 거는 건, 한 번 시전할 때마다 마력 소모량과 난이도가 훌쩍 뛰었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1학년인 이한은 그 사실을 떠올리기 앞서 나름 괜찮은 생각이라고 판단했다.
‘확실히 이제 쓸만한 부여 마법들을 몇 개 배우긴 했다.’
이한이 요즘 ‘부유’나 ‘자동 방어’나 ‘반사’같은 말도 안 되는 속성들만 공부하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더 쉬운 속성들도 많았다.
‘가속’이나 ‘중량 증가’나 ‘관통력 강화’처럼 위력 부분에서 보조해주는 속성.
‘흔들림 제거’나 ‘명중 강화’나 ‘조준 보조’처럼 그 외 부분에서 보조해주는 속성.
안 그래도 구슬 형태의 마법을 다루는 이한이었다. 언젠가 한 번 이런 부여 마법들로 위력을 올려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물 구슬처럼 이한이 소환한, 마력으로 유지하고 있는 물체에는 추가로 마법을 거는 게 난이도가 너무 높았지만...
화살처럼 이한이 마력을 유지하지 않아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물체에는 비교적 쉬웠다.
‘화살부터 해보고, 화살에 잘 걸린다면 다음에는 쇠 구슬에도 해봐야겠다.’
화살, 쇠 구슬, 물 구슬 순으로 난이도가 높아지는 만큼 화살로 연습해보는 건 나쁜 생각이 아니었다.
“빨라져라, 무거워져라. 날카로워져라.”
옆에서 새 구이를 뜯어먹으며 구경하고 있던 더르규와 지젤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사실 지젤은 ‘저건 또 뭐하는 짓이냐’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흥미는 흥미였다.
“이한. <하급 중량 증가>나 <하급 관통력 강화>도 익혀놨었나?”
“강의 시간에 나왔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버두스 교수가 가르쳤다기보다는 책에 적혀 있는 수많은 기초 부여 마법들 중 하나였다.
“나오긴 했지. 그렇지만 뒤에 있었잖나.”
하지만 저 두 마법은 비교적 뒤에 위치해 있었고, 안 그래도 연습해야 할 마법이 많은 학생들은 굳이 뒤에 있는 마법까지 먼저 건드리진 않았다.
그걸 잡지 않아도 이미 해야 할 마법들이 충분히 많은 것이다.
“<하급 중량 증가> 같은 경우는 시험해볼 일이 있어서 연습해봤지.”
“그렇군. ...어? 그러면 <하급 관통력 강화>는?”
“그건 지금 처음 써봐.”
“......”
“......”
더르규와 지젤은 처음으로 생각이 일치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아, 아차. 내가 무슨 생각을.’
더르규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날려보냈다.
이한은 훌륭한 친구였지만 가끔 마법에 대한 재능을 보여줄 때면 ‘사기 좀 그만 쳐라’란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진짜 재수없네.”
“...모라디! 같은 조의 동료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왜 갑자기 호들갑인데? 뭐야?”
친구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이한은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가속했고, 중량 증가했고, 관통력 강화했고, 명중 강화시켰고, 조준도 강화시켰고...
‘더 걸 게 뭐가 있었지? 아. 흔들림 제거.’
“떨림이여, 가라앉...”
지팡이를 휘두르던 이한은 멈칫했다. 주문이 제대로 시전되지 않고 튕겨나간 것이다.
몇 번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지, 이한?”
“아. 맞다. 잊고 있었군.”
화살 같은 것에 부여 마법을 여러 개 겹쳐서 걸면 마력 소모부터 시전 난이도까지 급격히 상승하는 것이다.
이만큼이나 걸었으니 더 이상 걸리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
“그러면 보통 시전하기 전에 깨달아야 하지 않나?”
바이샤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물었다.
두 학생은 못 들은 척 외면했다.
“그러면 여기까지 해보겠습니다.”
“저기 떨어진 바위를 맞춰봐.”
이한은 호흡을 가다듬고 활을 조준했다. 화살에서 복잡하고 세밀하게 짜여진 마력의 구조가 느껴졌다.
명중률과 조준을 강화해서 그런지 그냥 시위를 메겼을 때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퉁!
콰직!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이 바위를 뚫고 1/3 쯤 틀어박혔다.
이한은 노렸던 중앙에서 제법 떨어진 화살의 위치에 안타까워했다.
‘두 개로는 이 정도인가?’
“역시 어렵습니다.”
“뭐라는 거야...”
바이샤다는 이한을 괴물 보듯이 보며 말했다.
능숙한 궁수도 아니면서 바위에 화살을 꽂아 넣었으면 잘한 거지, 정중앙에 못 맞췄다고 아쉬워할 게 전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