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티질링 사제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순간 이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생각해보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친구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해왔던가.
불사조 탑의 학생들이 먹은 끼니만 생각해도 사제들은 이한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
갑자기 사과를 하는 티질링 사제의 모습에 이한은 의아해했다.
뭐지?
‘교단 행사에 초대해서 그런가?’
이미 시커먼 속셈으로 가고 있는 이한에게 저런 사과는 오히려 미안한 부분이 있었다.
“아니. 죄송해 할 건 없는데.”
“작업을 방해해서 죄송하다는 거겠지.”
버두스 교수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워다나즈가 얼마나 지금 마석 작업을 마저 하고 싶겠는가.
그걸 예전에 한 하찮은 약속 때문에 미루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리라.
“아... 정말 죄송해 할 거 없겠군 그러면.”
이한은 진심을 가득 담아 단호하게 말했다.
* * *
프리싱가 교단의 신전에는 보통 저주받은 사람들이 많이 방문했다.
저주가 걸린 지역을 모르고 방문했다가 저주가 걸렸거나, 혹은 저주받은 아티팩트를 실수로 착용했거나 등등.
프리싱가 교단의 사제들은 이런 손님들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친절하게 치료해주고 아티팩트를 정화하고 가끔은 자기들이 직접 착용했다.
마지막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저주 걸린 일반인들에게 프리싱가 교단만큼 든든한 이들도 드물었다.
“사제님. 도와주세요! 이 팔찌를 차고 나서 제 팔이 언데드의 팔로 변했습니다!”
“사제님! 제 종족이...! 저는 냄새나는 드워프 놈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으흑흑!”
“저번 주에 여행을 갔다 왔는데, 뭘 잘못 건드렸는지 피부가 청동으로...”
셋이 탄 워다나즈 가문의 마차가 신전 정문 앞에 도착했다. 버두스 교수가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재밌네. 연구하기 좋겠어.”
“교수님. 제 생각에는, 신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고 계시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주 걸려서 신경 날카로운 사람들 앞에서 ‘당신은 참 좋은 연구사례입니다’란 말을 했다가는 칼이 날아올 수도 있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사제, 메흐리드가 반가워하며 달려 나왔다. 못 보던 사이에 또 저주받은 아티팩트를 착용했는지 머리 위에 희한한 투구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한은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마음까지 겸손하진 않았다.
실제로 불사조 탑 학생들을 위해 해줬던 요리들을 생각해보면 이한은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왜?”
메흐리드 사제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한은 이럴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도와주러 오셨습니다.”
“예? 저 교수님이 말입니까? 아, 아니... 싫다는 건 아닙니다.”
이한은 메흐리드 사제의 반응이 매우 이해가 갔다.
하긴 이한이어도 버두스 교수가 도우러 왔다고 하면 상당히 놀랄 터.
“아티팩트 전문가신 만큼 이런 행사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도움을 주실 것 같지가... 아, 아니. 싫다는 건 아닙니다.”
‘은근히 냉정하시네.’
메흐리드 사제는 사제였지만 결코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적 사제였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만은 교수님께서 열심히 도움을 주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늘 행사가 빨리 끝나야 절 데리고 가서 일을 시키시거든요.”
“......”
메흐리드 사제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 * *
확실히 뛰어난 마법사가 한 명 있으면 교단의 일을 돕기 쉬웠다.
버두스 교수는 팔짱 끼고 앉아 있다가 사람 한 명 찾아오면 대뜸 말했다.
“불의 저주를 받았어!”
“예?!”
“불의 저주를 받았다고!”
이한이 옆에서 대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지금 들고 계신 상자 안에 있는 장신구에 불의 저주가 걸렸다고 하십니다. 멋대로 착용할 경우 화상을 입으실 수 있습니다.”
“그, 그런...”
장신구를 들고 온 손님은 겁에 질려서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수님. 해주 가능합니까?”
“내놔봐!”
“아,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제님.”
“사제 아냐. 마법사야.”
버두스 교수는 장신구를 받아서 걸린 저주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갖고 온 사람은 고개를 연신 꾸벅이며 고마워했다.
이한은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흠. 이것도 사업이 될 수 있겠군.’
‘저주를 해제해드립니다’라는 간판을 걸고...
문제는 프리싱가 교단이라는 독점 체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교단의 가장 위협적인 점은 무료라는 점.
어디 프리싱가 교단이 없는 곳 없나?
“이거 봐. 이게 화상의 저주야. 여기 새겨져 있는 문양이 보이지?”
“그렇게 말하셔도 저는 모르는 마법입니다만.”
“외워. 외워야 다음에 똑같은 마법 나오면 네가 하지.”
“오...”
이한은 버두스 교수의 양심 없는 소리에 놀라워했다.
‘외워야 나중에 도움이 되지’가 아니라 ‘외워야 나중에 네가 하지’라니.
진심으로 1학년 학생한테 저주 아티팩트 해제 작업을 맡길 생각이란 말인가?
‘새삼 미친 사람이야.’
“여기에 마력 좀 불어넣어봐.”
버두스 교수는 들고 있던 작업용 마도구를 이한에게 내밀었다. 안에 불어넣은 마력이 다 소모됐는지 빛이 깜박였다.
이한은 별 생각 없이 장비를 붙잡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확 차오르는 마력에 버두스 교수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이야. 잘하네.”
‘아차.’
버두스 교수가 ‘또 하나의 쓸모를 찾았네’하는 표정을 짓자 이한은 아차 싶었다.
이한의 쓸모를 버두스 교수가 많이 알아봤자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파직, 파지직, 파직!
“됐네. 가져가. 저주 해제됐어.”
“대단하십니다!”
옆에 있던 사제가 버두스 교수의 실력에 감탄을 표했다.
경험 많은 프리싱가 교단의 사제들도 저렇게 빨리 해결하지는 못했다. 실로 놀라운 실력이었다.
“하나도 안 대단한데? 애벌레도 할 수 있는 일이었어.”
“과, 과연...”
사제가 당혹스러워하자 이한은 그냥 교수 대신 계속 자기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수님. 그냥 제가 대신 말할 테니 교수님은 작업이나 하시죠.”
“어? 고마워.”
* * *
“이건 해제 불가능하겠는데.”
버두스 교수라고 모든 저주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불길한 문양이 새겨진 팔찌는 저주를 풀 경우 그냥 박살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역시 저주가 걸린 물건이었습니까? 젠장, 어쩐지 찜찜하더라니...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팔찌를 주워 온 사람은 아쉬워하며 내려놓았다.
좋은 거라도 있지 않을까 감정하러 왔는데 저주가 걸려 있었다니.
이런 식으로 해주가 불가능한 아이템들은 보통 교단에서 맡아서 처리를 해줬다.
저주가 걸린 아티팩트들은 기본적으로 처리 자체가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그런데 무슨 저주가 걸린 물건입니까?”
또 한 명의 손님이 돌아가자 이한은 기지개를 펴며 물었다.
“마력 발산 억제.”
“마력 발산 억제요? 흡수 같은 겁니까?”
“흡수랑 다르지. 너 바보야?”
제자의 말실수를 부드럽게 지적해주는 버두스 교수의 모습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궤가 다르긴 하겠군요.”
마력 흡수의 저주는 착용하는 순간 그 사람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식이라면, 마력 발산 억제의 저주는 그 사람의 마력을 뿜어내는 것에 제한을 거는 식이었다.
둘 다 마력을 쓸 줄 아는 사람들에게 금제를 걸기 위해 쓰는 저주였지만 방식이 달랐다.
“한 번 착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던가.”
이한은 팔찌를 꼈다.
‘에인로가드에서 당하기 전에 미리 당해놓는 게 좋겠지.’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경악할 소리였지만 이한은 냉정했다.
에인로가드에서 당하는 것보다는 먼저 당하는 게 나았다. 해결책을 대비해 놓을 수 있었으니까.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요?”
“마법 써봐.”
이한은 그 말에 물 구슬을 불러냈다.
허공에 나타난 물 구슬은 별 문제 없이 잘 통제됐다.
“잘 됩니다만?”
“더 복잡한 거 해봐.”
“복잡한 거라면...”
물 원소의 기본적인 응용에 대해서는 이미 숙달한 이한이었다.
여기서 더 어려운 영역이라면 증발이나 회전으로 가야 했다.
‘회전으로.’
회전 속성은 이한이 아직 완벽하게 다루지 못했다. 시간을 많이 들이거나 불완전한 수준에서 추가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쉬이이이익!
“!”
이한은 깜짝 놀랐다.
물 구슬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시간을 엄청나게 쏟아 붓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이게 대체...? 그런 건가!’
이한은 상황을 파악했다.
예를 들자면 마력 흡수의 저주는 1씩 계속 흡수하는 것이었다.
10의 마력을 가진 사람은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만, 10000의 마력을 가진 사람은 훨씬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마력 발산 억제의 저주는 100의 마력을 갖고 있든, 10000의 마력을 갖고 있든 쓸 수 있는 마력을 10으로 제한 걸어버리는 식이었다.
원래라면 매우 곤란해야 할 저주였지만 이한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평소에 워낙 막대한 마력을 힘들게 힘들게 다루다가 강제로 적은 양의 마력만 쓰게 되자, 그 통제가 훨씬 쉬워졌던 것이다.
마치 무거운 갑옷만 입고 다니다가 가벼운 갑옷으로 갈아입은 기분이었다.
쉬이이익! 쉬이이이이익!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마력의 움직임에 이한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마법사는 이럴 때 전능에 가까운 전율을 느꼈다.
세계의 규칙을 바꾸는 힘을 스스로가 통제한다.
이것만큼 황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마법사들은 평소에 다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사실 아니었다.
이한이 그 많은 마력을 갖고서도 나름 수월하게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건 그만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지금 불필요하게 많은 마력을 빼버리니 이런 통제력을 느끼는 거지, 다른 마법사들은 보통 저런 걸 느끼지 못했다.
“교수님. 훌륭합니다! 이런 아티팩트가 있었을 줄이야... 가르시아 교수님께서는 왜 이런 아티팩트가 아니라 마력 흡수 아티팩트를 주신 거죠?”
“그야...”
버두스 교수가 설명하기도 전에 이한의 팔찌가 박살이 났다.
콰직!
“......”
이한은 씁쓸한 눈빛으로 팔찌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버두스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저렇게 되거든.”
“...일찍 말해주시지.”
부서질 일이 거의 없는 마력 흡수 아티팩트와 달리. 마력 발산 억제 아티팩트는 마법사의 역량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부서졌다.
하물며 끝이 없는 마력을 가진 이한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랬다.
마법 한 번 잘못 쓰면 그냥 박살이 나는 것이다.
이한이 어떤 마법을 써도 버틸 수 있을 정도려면 고대 유물에서 찾는 게 빨랐다.
“그래도 오늘 마력 발산 억제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가 하나는... 더 나오겠죠?”
“글쎄? 그리고 기능이 아니라 저주야.”
‘아차. 그랬지.’
버두스 교수의 말에 이한은 제정신을 되찾았다.
너무 탐이 나는 바람에...
다행히 마력 발산 억제 저주가 걸린 아티팩트는 그 후로도 3개나 더 나타났다.
콰직!
아니, 2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