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그거 갖고 되나? 별로 맛도 없어 보이는데.”
“맛, 맛있습니다만...”
로웨나는 이한의 혹평에 살짝 자신감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엘프들이 꼭 채식을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엘프 가문들은 채소를 환장하게 좋아하긴 했다. 이한도 그걸 알았기에 로웨나를 탓하진 않았다.
“맛없어 보인다는 말은 취소하지. 하지만 앞으로 남은 일정을 봤을 때 좀 든든하게 먹어두는 게 나을 거야.”
이한은 말과 함께 클트란의 접시를 뺏었다.
꿀과 시럽에 푹 절여진 두툼한 팬케이크와 세 종류의 과일 타르트, 그리고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삼층짜리 고기 파이가 예술에 가깝게 쌓여진 접시를 뺏기자 클트란은 발목이 부러진 저번 격구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황녀의 얼굴은 살짝 밝아졌다.
이한은 황녀 앞에 접시를 놓고, 녹색 접시는 클트란에게 내밀었다.
“클트란. 넌 이거 먹어라.”
“...그냥 다시 갖고 오면 안 되겠나? 워다나즈?”
“그러던가.”
클트란은 팬케이크가 다 동나지 않았기를 빌며 초조하게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로웨나는 이한 앞에 접시가 없는 걸 보며 말했다.
“뭐라도 조금 드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난 이걸로도 충분하니까 너야말로 접시를 좀 채워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도 괜찮...”
“뭐라고요? 황녀 전하? 걱정된다고요? 너 걱정된다잖나.”
황녀는 팬케이크를 입에 넣다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지만 이한은 못 본 척 무시했다.
로웨나는 알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정말 그 접시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이한은 로웨나의 싱그러운 녹색 접시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한은 거친 음식에 익숙했다.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딱딱한 검은 빵을 갖고 캑캑댈 때도 이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었으니까.
“워다나즈 님께서는 역시 채소를 좋아하시는군요.”
“그건 아닌... 아니. 그냥 접시나 채워가지고 와. 휴식 시간 끝나가잖아.”
이한은 로웨나까지 다시 자리에서 내보냈다. 그리고는 황녀에게 말했다.
“추종자들이 괴롭히는 건 아닙니까?”
황녀는 먹다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이한은 잔을 건넸다. 황녀는 과일 주스를 조금 마시고 천천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까? 학교에 있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저건 좀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만.”
황녀는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것 같았다.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조금... 의욕이 과하긴 한데...”
‘가이난도가 저걸 봐야 하는데.’
이한은 최대한 추종자들을 욕하지 않으려는 황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가이난도였다면 ‘이 자식들은 내가 먹겠다는데 못 먹게 하고 놀겠다는데 못 놀게 하고 공부 좀 안 하겠다는데 억지로 시키고 이게 무슨 추종자야’하며 바로 비난이 튀어나왔을 텐데.
“자제하라고 하면 안 됩니까? 한 마디만 해도 알아들을 텐데.”
이한의 말에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에게 멋대로 구는 건 황족으로서 무책임한 일이고 그들의 기대를 깨뜨리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황족으로 지지를 받는 이상, 추종자들이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일일이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숙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더 카리스마 있게 느껴지기 마련.
‘아니 뭐지?’
이한은 감탄을 넘어서 경악했다.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물론 황족들 중에 저런 책임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야 있었지만 가이난도와 놀다 보니 괜히 비교가 되고 놀라웠다.
‘혹시 가이난도보다 다섯 살쯤 많은 거 아닌가?’
“그래도 추종자들의 숫자가 아직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을 텐데, 지금부터라도 설득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추종자들이 어느 정도 되십니까?”
이한은 보가준이나 주드란타스, 그리고 저 둘과 같이 놓기도 조금 민망했지만 가이난도의 추종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시의 소문에 따르면 보가준의 추종자로 꼽히는 이들은 중간 정도 되는 규모의 대지 원소 마법사 길드 하나, 꽤 이름이 알려진 모험가 파티 하나, 상단 셋, 은행 둘, 격구 팀 하나, 도시귀족 가문 다섯 정도였고 주드란타스의 추종자로 꼽히는 이들은 발드로가드 출신 마법사들이 세운 탑 하나와 대형 피혁 길드 하나, 살육식물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마탑 하나, 그리고 검객 길드 둘과 기사 가문 셋 정도였다.
가이난도의 추종자로 꼽히는 이들은 억지로 뽑아보자면 그랑덴 시 과자가게 주인이나 장난감가게 주인 정도?
당연히 황녀의 추종자들은 가이난도보다는 많겠지만 보가준, 주드란타스 정도라면 하나씩 설득해나가며 인간적인 지지를 얻는 것도 해볼 만했다.
“종려나무 기사단, 적우(積雨) 마법사 탑, 제국 서부 연합 상회, 십자가 형제 검객단, 올로도 파티...”
“......”
그러나 황녀의 입에서는 이한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목록들이 흘러나왔다.
종려나무 기사단은 제국 대귀족들이 모여서 만든 명예 기사단으로 무력은 진짜 기사들보다 약했지만 그 이름값은 기사단 몇 개 정도는 그대로 짓누를 수준이었고, 적우 마법사 탑은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사들이 모여서 세운 마탑이었다.
제국 서부 연합 상회는 서부 지역의 상단들과 상인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거대자본집단이었고, 십자가 형제 검객단은 뛰어난 검사들을 여럿 배출한 명문 검술 길드였다. 몇몇 기사들이 가서 검술을 배울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올로도 파티는 이한도 이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모험가 파티였고,
‘이 정도였나?’
제국 신문에 이름이 자주 올라간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저 정도 되는 거물들이 벌써 지지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심지어 저게 끝이 아니라 더 남아있는 것 아닌가.
이한은 왜 신입생 친구들 중에 황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이해가 갔다.
‘나라도 지지하고 싶어지겠군.’
저 정도면 제국에서 가장 승률 높은 말 아닌가. 이한이라도 지지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황녀는 말을 멈추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방학에도 수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는 학년 수석인 만큼, 지금 상황에 대해서도 명석한 조언을 해주리라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황녀 전하.”
“!”
“힘내십시오.”
“......”
황녀는 이한을 노려보았다.
아까와는 말이 달라진 것이다.
“...설득해보라고 했잖습니까.”
“음. 생각해보니 가끔은 설득보다는 위엄이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침묵이 황금보다 귀하단 말도 있잖습니까. 저기 가이난도 보십시오.”
치사하게 가이난도를 예시로 들자 황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 * *
행사의 마지막까지 이한은 긴장을 놓지 않았지만 별다른 습격은 없었다.
해골 교장이 우울한 눈빛으로 시의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걸 보고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살았군.’
“참. 워다나즈 님. 가면서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로웨나의 말에 이한은 의아해했다.
“혹시 모험가 의뢰 같이 하자는 제안인가?”
방학 때 소문을 들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 몇몇은 이한을 볼 때마다 ‘내가 이런 의뢰를 찾았는데 성공하면 우리 모두 금화무더기에 앉을 수 있을 거야’라고 제안하곤 했다.
그러나 이한이 보기에 대부분은 다 허황된 의뢰들이었다. 너무 가능성이 희박한 탓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의뢰서의 색이 바래져 있을 정도로.
“아. 죄송합니다. 저는 구울의 왕 정도 되는 존재를 토벌하는 의뢰에 대해서는 새로 듣지 못했습니다.”
“...로웨나. 일단 난 구울의 왕 같은 존재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닌데.”
“겸손하시기는.”
로웨나는 일단 넘어가겠다는 듯이 웃었다. 이한은 흰 호랑이 탑 놈들은 정말 다 짜증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어볼 게 뭔데?”
로웨나는 품속에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책자 겉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명예로우신 아덴아르트 전하에게, 이 수수께끼가 전하의 지루함을 달래드리기를 빕니다.
“정말 무례하지 않습니까?!”
“으... 으응?”
이한은 로웨나의 분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로웨나는 뒤늦게 설명해줬다.
황녀의 추종자들 중에서는 로웨나처럼 적극적으로 믿고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저것 비교하고 시험하고 간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이런 이들은 아쉬울 게 없는, 제국에서도 나름 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 정도도 없으면 저런 줄타기를 할 수 없었다.
이번에 받은 수수께끼는 제국 공작 중 한 명이 보낸 것이었다. 말이 선물이지 받는 입장에서는 못 풀 경우 명성이 꺾일 수 있었으니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확실히 무례한...”
“공작께서는 저번에도 이런 수수께끼를 보내셨습니다! 한 번이면 족할 일을 자꾸...! 아무리 금화로 보상을 한다고 해도 계속 이런 짓을 하시면...”
“금화?”
“네?”
“방금 금화라고 하지 않았나?”
“네. 했습니다만?”
당연히 상대가 황족인 만큼 저런 수수께끼만 보내고 끝내지는 않았다.
수수께끼를 맞힐 경우 시험한 것에 대한 사과도 곁들일 겸 막대한 선물을 축하로 보내는 것이 귀족의 명예였다.
그 설명을 들은 이한은 아덴아르트에게 막대한 질투심을 느꼈다.
‘부럽군!’
이한도 저런 수수께끼 열심히 풀 수 있는데, 왜 다른 대귀족들은 이한에게는 안 보낸단 말인가.
사실 이한도 이유는 잘 알았다. 제국의 후계자 중 하나인 황족이니까 저런 걸 보내도 되는 거지 같은 대귀족끼리 저런 걸 보내는 건 그냥 미친놈의 시비였다.
“잠깐. 가이난도는... 아니다. 됐다. 괜한 걸 물을 뻔했군. 어쨌든 그래서 이 수수께끼를 다 같이 고민하고 있는 건가?”
“예.”
“저번에도 다 같이 고민했나?”
“예.”
“혹시 받은 금화는 황녀께서 다 챙기셨나?”
“아니요. 저희에게 나눠주셨습니다만?”
“......”
이한은 진지하게 가이난도 말고 황녀와 친해졌어야 했나 고민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긴 했지만, 황녀의 추종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후회가...
“이거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 아니신가.”
고민하던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은 놀랍게도 이칼도렌 공작이었다.
“이거 기쁜 우연이군. 저번에 만난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칼도렌 공작이 오늘 이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마법학교의 학생들 중 가치 있는 이들과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라면 가장 가치 있는 카드라고 할 수 있었다.
‘아덴아르트 황녀와 같이 있다니. 혹시 황녀를 지지하는 건가? 가이난도 황자와 친하다고 들었는데?’
이칼도렌 공작은 그 짧은 사이에도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다.
“뵙게 되어 기쁩니다. 공작 전하.”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라도 하지 않겠나?”
로웨나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한은 표정 관리를 하라는 뜻으로 로웨나의 등을 찔렀다.
-왜 그래?
-저 공작께서 무례한 수수께끼를 보내셨단 말입니다!
-아니 정말로? 하긴 저번에도 바실리스크의 알을 통 크게...
-예?
-아무것도 아니야.
공작이 자꾸 황녀를 시험하려고 하든 말든 이한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수께끼를 낸 게 공작이라면 오히려 더 접근해야 했다. 그래야 힌트라도 알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바로 그 때 골목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노골적으로 살기가 섞인 위험한 기운이었다.
이칼도렌 공작의 호위들이 깜짝 놀라며 달려들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주인님!”
“됐습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이한은 한숨을 쉬며 지팡이를 들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자신감에, 호위들은 경악해야 할지 말려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라 반응이 한 박자 늦어버렸다.
“대체 무슨... 워다나즈 님. 에인로가드의 마법사이신 건 알지만 이건 절대 장난이 아닌...”
“제가 상대하겠다고 했잖습니까.”
이한은 골목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해골 교장의 장난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연회장 안에서 끝내야지 밖에서 이런 짓을 하면 이렇게 말려드는 외부인이 생기지 않는가.
“...잠깐.”
이한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골목 안에서 나오는 기운이 점점 강해지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장난 같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