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이상한데.’
해골 교장은 성격이 고약한 거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연회장이 그랑덴 시 한복판에 위치해있다는 걸 분명히 알 텐데, 말려드는 외부인이 나올 가능성을 무시하고 학생들을 괴롭힌다?
‘...이거 혹시 내 적이 아니라 공작 적 아닌가?’
이한은 힐끗 이칼도렌 공작을 쳐다보았다.
공작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는 골목 안에서 뭐가 나오든 상관없다는 오만함이 느껴졌다.
만약 학생들을 습격한 적이라면 좀 더 놀라거나 다른 반응을 보여야 했다.
‘공작 적 맞구나!’
이한은 속으로 후회했다.
그냥 공작의 호위도 있겠다 맡겼으면 끝날 일인데 괜히 끼어든 것이다.
‘하여간 해골 교장은 도움이 되지 않는군.’
이한은 이제라도 호위를 불러서 협력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골목 안에 있던 적의 습격이 우선이었다. 점점 강해지던 기운이 칼날처럼 정제되더니 살기와 함께 뛰쳐나왔다.
* * *
이한이 짐작했던 것처럼 이칼도렌 공작은 놀라지 않았다.
물론 상대가 누군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이칼도렌 공작은 이런 습격에 지겨울 정도로 익숙해져있었다.
제국의 공작 정도 되면 적이 없을 수가 없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으로 활동해온 이칼도렌 공작은 대귀족 가문부터 범죄자 길드까지 원수를 한 명씩 배치해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원수들은 감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꼬리를 내린다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으면 일년에 두세번 정도는 정례행사처럼 이런 습격을 겪게 되는 법.
물론 이칼도렌 공작은 그 오만한 성격답게 겁을 먹지도 않았고 행동을 조심하지도 않았다.
대신 경계를 막강하게 올렸다.
지금 이칼도렌 공작이 착용하고 있는 방어 아티팩트들은 성 십수개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는 가격이었고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호위들은 길드 하나 정도는 도륙해버릴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걸어다니는 성채나 마찬가지인데 하찮은 암살자들의 습격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두려워해야 하는 건 습격하는 암살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이칼도렌 공작은 정말로,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습격에는 말이다.
‘정말 놀랍군!’
이칼도렌 공작은 이한의 행동에 무슨 뜻이 담겨있는지, 그 짧은 사이에 무수히 많은 추측을 시도했다.
이 상황에서 나서는 이유는?
황녀 아덴아르트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는 걸 수도, 혹은 이칼도렌 공작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는 걸 수도 있었다.
‘아니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군.’
공작은 후자에 무게를 뒀다.
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신입생치고는 매우 정력적이었다. 많은 천재들이 에인로가드에 들어간다지만 1학년 때부터 저렇게 입지를 다지고 명성을 쌓는 천재는 흔치 않았다.
‘네 야망을 존중하겠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 하지만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상황을 파악한 이칼도렌 공작은 이한의 계획에 있는 빈틈을 알아차렸다.
‘그건 결국 네가 습격을 혼자서 처리해야 한다는 거다.’
저렇게 자기가 막겠다고 나선 이상 공작 호위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칼도렌 공작을 습격하려는 자들은 대부분 공작을 습격하기 위해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를 해온 강자들.
‘이 몸을 습격하는 놈들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알지 못할 터.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신입생. 습격자들을 상대하기는 힘들 텐데?’
마법사의 마법이 워낙 경천동지의 위력을 갖고 있어서 흔히 착각하기 쉬웠지만, 생각보다 마법사들의 전투력은 부족한 편이었다.
마법은 완성되면 강력하지만 완성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걸 잘 아는 자들은 마법사들을 손쉽게 갖고 놀았다. 주문 방해부터 집중력 끊기까지 마법을 방해하는 방법은 많고 많았다.
이칼도렌 공작은 이한이 습격자들을 상대로 이기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가늠했다.
만약 저렇게 말하고 나서 도움을 받는다면 저 야심찬 소년의 체면에는 크게 손상이 가겠지만, 공작은 이한이 밀린다 싶으면 바로 개입할 생각이었다.
이한이 크게 다치면 자신도 곤란해졌다.
‘돕는다 하더라도 이 몸을 원망하지 마라.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주인님. 조심하십시오. 독입니다!”
“그만 징징대라. 진심으로 외치는 거라면 네놈의 눈이나 뇌 중 하나가 고장난 걸 테니까.”
공작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호위에게 말했다. 호위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공작이 갖고 있는 아티팩트들의 해독 성능이라면 이 주변이 독으로 모두 녹아내려도 공작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실제로 호위가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발걸음 하나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괴물이지? 슬라임 같지는 않고. 정령이나 차원 야수를 섞어서 소환한 것 같은데.”
공작과 호위는 습격자가 골목에서 기어 나오자마자 정체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도 많은 습격을 당한 만큼 이제 겉모습만 봐도 견적을 잡는 게 가능했다.
부정형으로 독액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걸 보니 슬라임, 정령, 차원 야수 정도인데 슬라임치고는 너무 움직임이 빨랐으니...
정령이나 차원 야수를 맹독으로 오염시키거나 융합해서 소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습격자는 공작이 이 주변을 지나간다는 정보를 얻고서 시간에 맞춰 저 맹독 오염체를 소환시킨 것이리라.
범인은 나중에 상황 마무리된 다음 마법사들을 시켜 흔적을 추적하면 됐고, 지금은...
‘무리겠군.’
이칼도렌 공작은 단정지었다.
상대가 너무 나빴다.
복잡한 마법이나 기교를 쓰는 암살자라면 모를까 저런 식으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적은 지혜로운 대처가 불가능했다.
힘 대 힘으로 제압해야 했는데 저 맹독 오염체가 뿜어내는 독은 공작을 죽일 정도는 아니어도 주변 담벼락 정도는 가볍게 녹일 수 있었다. 신입생이 해독하기에는 너무 강한 독이었다.
게다가 그렇다고 느리거나 힘이 약한 것도 아니니, 싸움이 벌어지면 한 번의 격돌로 승패가 가려지리라.
“쓰러지면 바로 구ㅎ...”
쾅!
“?!”
이칼도렌 공작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파르르 흔들렸다.
놀랍게도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먼저 덤벼든 것이다!
‘미쳤군!!’
아무리 젊은 혈기에 오만해도 그렇지 저건 정신 나간 짓이었다.
그나마 맹독 오염체가 바로 덤비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이 자리에 이한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많아서였는데, 먼저 덤벼들어서 자기 자신을 목표로 좁혀버리다니.
스스로 무덤을 파는 수준이 아니라 관까지 짜서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 * *
‘다행이다!’
이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공작의 호위에게 도움을 빌려야 하는 민망한 상황은 넘어가도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상대의 상성이 아주 좋았던 것이다.
후우우우욱-
갑자기 달려와서 일격을 먹인 이한에 분노한 맹독 오염체가 짙은 독안개를 내뿜었다.
다른 마법사였다면 독의 통제력을 뺏기 위해 마법을 썼겠지만 이한은 그냥 내버려뒀다.
예상대로 독은 이한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호흡을 해도 거대한 마력이 독을 대양(大洋)처럼 희석시켜버렸다.
“박무여, 퍼져라.”
독 저항 덕분에 번 귀중한 시간을 이한은 새로 익힌 <오고닌의 박무>를 시전하는데에 사용했다.
이한의 형체가 초점을 잃고 일렁거리며 흔들렸다. 맹독 오염체는 연달아 일어나는 납득 불가능한 일들에 크게 당황했다.
상대가 냉철하고 노련한 적이면 모를까 저런 소환체라면 육체적인 능력은 뛰어나도 이런 돌발적인 상황에는 약했다. 이한은 바로 다음 주문을 시전했다.
“뼈여, 적을 붙잡아라.”
강력한 힘은 아니었지만 맹독 오염체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다른 일반적인 마법사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뼈 구속구가 맹독 오염체의 발목에서 생겨났다.
“쏘아져라!”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탄환처럼 맹독 오염체의 육신에 틀어박혔다.
일반적인 구조의 몸이 아니라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고통은 어딜 가지 않았다. 맹독 오염체는 울부짖으며 주변에 독액을 발사했다.
치이이이익!
‘윽.’
이한은 녹아내리는 망토와 옷을 보며 혀를 찼다. 다행히 자기 돈으로 산 게 아니라 가문의 돈으로 산 옷붙이들이었다.
‘조심해야겠군.’
이칼도렌 공작이 이한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이런 살벌한 싸움의 와중에 목숨 걱정이 아니라 옷 걱정부터 하고 있었으니.
‘구울의 왕처럼 방어력이나 회피력이 유별난 경우는 아니군. 육신은 그대로 갖고 있고, 데미지만 넣으면 되나.’
계산을 끝낸 이한은 바로 행동에 나섰다.
환영 분신 소환, 투명 마법 시전, 뒤로 우회, 쇠구슬에 5중 강화 마법 연속 시전 후 발사!
퍽!
그 동작이 어찌나 망설임 없이 재빨랐는지 공작의 호위들의 반응이 반 박자 정도 늦을 정도였다.
호위들은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고 훨씬 더 빠르게 마법을 연속으로 시전하는 이한의 모습에 경악했다.
신입생이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 마법을 저 정도 속도로, 그것도 연속으로 시전하다니.
어떤 상황이든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서 놀라지 말아야 하는 호위들의 입장에서는 굴욕에 가까운 일이었다.
“놈을 쓰러뜨렸습니다. 확실히 끝내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불을 지르고 싶었지만, 괜히 주변에 불이라도 번지거나 놈과 반응해서 예상치 못한 일이라도 벌어질까 싶어 이한은 호위들을 불렀다.
호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아들어 휘둘렀다.
불타는 검이 작렬하자 이미 가슴팍에 치명타를 입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맹독 오염체가 푸른 화염에 휩싸였다.
마법의 화염이 독을 순식간에 불태우며 오염체까지 잡아 삼켰다. 이한은 호위들이 갖고 있던 검들을 보고 속으로 욕했다.
‘저 정도 아티팩트들을 갖고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물론 이한이 상대하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조금 도와줄 수도 있지 않았는가.
이한이 그것 때문에 트집을 잡을 정도로 속이 좁은 사람도 아닌데!
“훌... 훌륭하군.”
이칼도렌 공작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표정을 뒤늦게 수습하며 말했다.
그 모습에 로웨나는 쾌감을 느꼈다. 언제나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오만하게 굴던 공작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내 호위들에게 공을 양보할 줄은 몰랐는데.”
‘아.’
이한은 뒤늦게 공작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원래 이런 업적은 ‘이한 혼자 잡았다’와 ‘이한과 공작의 호위가 같이 잡았다’의 차이가 좀 컸다. 그리고 누구나 독식을 좋아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별 상관 없었다.
‘현상금 걸린 놈도 아닌데. 상관없지.’
현상금을 나눠 갖는 것도 아닌데 공을 좀 나눠준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사례는 공작이 할 것 아닌가. 자기 호위한테 양보했다고 사례를 깎는다면 그건 공작이 아니라 시정잡배였다.
“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적을 빨리 제압해서 주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이 감동의 박수를 쳤지만 이칼도렌 공작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저렇게 야심찬 놈이 그런 이유 때문에 양보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건 공작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당신의 야심만큼 나 또한 야심이 있소. 우리 같은 야심가끼리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오.
이칼도렌 공작은 이한이 저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것 말고는 선심을 베풀 이유가 없었다.
야심가들은 서로 알아보는 법.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칼도렌 공작은 상대를 단순히 재능 있는 신입생이 아닌, 테이블 맞은편에 대등하게 앉을 자격이 있는 젊은 야심가로 올렸다.
“...이해했네. 제안,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지.”
나쁘지 않았다.
이칼도렌 공작 또한 마법학교 안의 정보를 얻어야 했으니.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어떤 야심이 있는지는 몰라도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아니. 공작 전하! 공작 전... 뭐 저런 놈이??”
멀어져가는 공작의 뒷모습에 이한이 중얼거렸지만, 로웨나는 이한이 공작의 욕을 한 건 못 들은 척 넘어갔다.